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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그렇지만 윤태섭은 그걸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안재규가 징역을 살고 나오면, 그때부터 진짜 지옥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감히 자신을 기망하고 협박한 것에 대한 응징으로, 놈이 죽을 때까지 그가 하는 일을 훼방 놓고 망쳐 줄 작정이었다.
물론 그게 몇 년 뒤의 일이 될 테니, 지금은 거기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때 여비서의 인터폰이 울렸다.
삐이이이~
-원장님. 차미진 이사장님 전화 오셨는데요?
“어. 바로 연결 해.”
윤태섭은 이제 그의 미래를 책임져 줄, 오리지널 동아줄 서진그룹 사모님의 전화를 바로 받았다.
“네. 이사장님.”
차미진은 서진그룹 사모님 소리보다 재단 이사장 소리를 듣길 더 좋아했다. 그걸 알기에 윤태섭은 지금처럼 차미진을 꼬박꼬박 이사장님으로 불렀다.
-윤 원장. 어떻게 됐어요?
“모든 게 순리대로 착착 진행 되어가고 있습니다.”
-순리대로라....좋은 말이네요. 그럼 오늘 중으로 내가 원하는 말을 들을 수 있겠네요?
여기서 차미진이 원하는 말은, 김명진 회장이 수술 중 죽거나, 적어도 식물인간 정도 되는 걸 말했다. 윤태섭도 가급적 김 회장이 수술실에서 테이블 데스 해 주는 게 좋았지만, 안재규의 수술 실력을 감안한다면 그렇게 까진 되지 않을 거라고 봐야 했다.
안재규가 아무리 그와 손을 잡았다고 하지만, 자기 경력에 오점이 될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김 회장이 이대로 재수술 들어가면, 식물인간 상태로 나올 공산이 가장 컸다.
“물론입니다. 아! 좀 전에 회장님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지셔서, 곧 재수술에 들어갈 거 같습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그럼 이보다 더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
“네. 수술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차미진과는 그리 길게 통화를 하지 않았다. 그녀도 결과적으로 남편을 해치는 일을 두고, 그리 오래 왈가왈부 하고 싶지 않아 보였고, 윤태섭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어째든 그를 알아보고 지금 이 자리까지 끌어와 준 건 김명진 회장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배은망덕도 유분수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윤태섭은 바로 안면몰수 했다.
어차피 갈 사람은 가고 살 사람은 살아야지. 그게 인생 아니겠는가?
“신경외과에 김 교수 좀 불러.”
-김세진 교수님 말씀이십니까?
“어.”
윤태섭은 이번 일을 마무리 지어 줄, 차기 신경외과 과장감인 김세진을 불렀다. 그러니까 안재규만 아니었어도 윤태섭은 벌써 김세진을 신경외과 과장에 앉혔을 거다. 잠시 후 김세진이 왔고....
“찾으셨습니까?”
“앉아 봐.”
윤태섭은 그로부터 10여분 동안 김세진과 조용히 밀담을 나눴다. 그리고 얼마 후 원장실을 나온 김세진은 비릿하게 웃으며 수술실 쪽으로 향했다.
뭣도 아닌 놈에게 밀려서 신경외과 과장 자리를 내 주어야 했던 김세진.
당시 그는 서진병원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 그를 붙잡은 게 지금의 병원장인 윤태섭이었다. 그가 그랬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래서 기다렸는데 윤태섭이 드디어 그 기회를 주었다. 자신의 손으로 안재규를 쳐내고, 그가 원래 앉았어야 할 그 자리, 신경외과 과장 자리를 꿰찰 수 있게끔 말이다.
“안재규....넌 이제 끝장이야.”
수술실의 참관 실에 들어서며 김세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가 여기 온 건 안재규의 수술을 직관하고 수술이 끝난 직후, 수술실의 CCTV 영상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 일은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됐건만, 윤태섭이 김세진에게 이 일을 시킨 건 그만큼 그가 용의주도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아는가? 안재규가 미친 척하고 제대로 수술해서 김 회장을 살려 놓을지. 그걸 염려한 윤태섭은 안재규 만큼이나 뛰어난 신경외과 전문의인 김세진으로 하여금, 수술을 직관하게 한 거다. 그런 주도면밀한 윤태섭의 의중을 모르는 김세진은, 팔짱을 낀 체 여유 있게 안재규가 하는 수술을 참관실에서 지켜보았다.
* * *
비록 병원 보안 요원에 의해서 중환자실 앞에서 쫓겨났지만, 민영석 비서실장 밑에 비서실 직원은 악착같이 병원에 남아서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회장님이 재수술을?”
중환자실에 있던 김명진 회장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서 재수술을 하게 된 사실을 알아 낸 비서실 직원. 그는 곧바로 민영석 비서실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뭐, 뭐라고? 재수술....이라고? 하아.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화들짝 놀란 민 실장은 하던 일도 그만두고, 곧바로 서진병원으로 달려왔다.
“회, 회장님은?”
“좀 전에 수술실에 들어가셨습니다.”
“집도의는?”
“앞 번에도 회장님 수술 하셨던 안재규 신경외과 과장님이십니다.”
“그래? 휴우....”
민영석은 그나마 김 회장의 집도의가 신경외과 과장이란 사실에 안도를 했다. 근데 이어진 비서실 직원의 말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런데....제가 우연히 봤는데 안 과장님 수술 전에 원장실에서 나오시던데....”
“그, 그게 사실이야?”
“네. 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하필 김 회장의 재수술 전에 집도의가 원장실에 갔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민영석은 일단 서진그룹 기획전략실에 전화를 걸었다.
“서진병원 안재규 과장에 대해 파. 특히 윤태섭 원장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통화 후 민영석은 곧장 수술실 앞으로 갔다. 하지만 거기 있어야 할 보호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인데 차미진이나 두 아들 정도는 여기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아....”
길게 한숨을 내 쉰 민영석. 그는 이 여사와 학민이라도 부를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이 여사는 행방을 알 수 없었고, 학민은 아직 어렸다. 이 여사가 곁에 있으면 또 모를까. 그 아이 혼자 지금 여기 불러 봐야, 차미진과 두 아들들에게 수모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회장님. 제발....”
민영석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절대자에게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수술실 안에서는 이미 그 수술 결과가 정해진 채 수술이 진행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민영석이 백날 기도해 봐야 김명진 회장은 예전의 그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이이잉!
그리고 민영석도 그걸 눈치 챘다. 수술 시작되고 2시간이 훌쩍 지났을 때, 그의 지시로 안재규에 대해 조사했던 전략기획실의 연락을 받고서 말이다.
“....그, 그러니까 안재규 과장이 윤태섭 원장이 픽해서 과장이 됐단 말이로군?”
순간 민영석은 둔기로 강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수술을 못하게 막아야 했다. 하지만....그 동안 수술이 끝나버렸고....
“수술은 잘 됐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의식이....”
수술실에서 나와 비장한 얼굴로 자신에게 말하는 안재규 과장. 민영석은 당장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 나타난 사람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회장님이 어떻게 됐다고요?”
“아버지가 왜요?”
“설마 수술 잘못 된 거 아니죠?”
김명진 회장의 법적 부인인 차미진과 두 아들들이, 민영석을 밀쳐내고 안재규와 정해진 연기를 시작했다. 그걸 보고서 정작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던 민영석.
그가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며 뒤돌아섰다. 지금 여기 있다고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차피 하나도 없었다.
지이이잉!
그때 민영석의 핸드폰이 울렸고 바로 확인한 순간,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것이 실종 된 이미숙 여사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으니까. 그는 징징거리는 핸드폰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수술실 앞을 빠져 나오며 이 여사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 실장. 이게 무슨 소리야? 회장님이 쓰러지셨다니?
“지금 어디십니까?”
-나? 지금 학민이 데리러 학민이 학교 가는 중인데. 왜?
“학민이랑 만나시면 어디 좀 들어가 계십시오.”
눈치 빠른 이미숙이었다. 민영석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걸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알았어. 거기 들어가는 데로 민 실장에게 전화 하면 돼?
“네. 제가 그쪽으로 경호원들, 아니 제가 직접 거기로 가겠습니다.”
지금 물에 빠진 민영석 입장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하지만 이미숙은 지푸라기가 아니라 구명보트였다. 그 구명보트에 올라만 탄다면 어떻게든 살 길은 열릴 터였다.
* * *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의 차량들이 줄줄이 울산 시내를 통과해서 창원으로 향했다.
이때 울산 경찰청장은 거의 대통령에 준하는 의전을 시행케 했다. 그러니까 백 회장 차량들이 신호 한 번 안 걸리고 그대로 쭉 울산시를 빠져 나가게 조치를 취해 준 것이다.
그렇게 백 회장의 차량들이 울산 시내를 막 빠져 나갈 때, 그 차량들 중에 한 대가 교묘히 대열에서 이탈해서 시내 도로 한쪽에 정차를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바로 그 차 안에 백 회장이 타고 있었다.
“김 실장. 자네 나와 얼마나 같이 일했지?”
백 회장이 운전석 옆 조수석의 김영도 경호실장에게 물었다.
“한 30년 된 거 같습니다.”
“오래 됐군. 옆에 친구는 믿을 만 한가?”
백 회장의 말에 김 실장이 운전석의 경호원을 쳐다보고 말했다.
“현석이는....송구합니다만, 제 조카 녀석입니다.”
“그럐? 좋군.”
김 실장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백 회장이, 취업 비리 운운하며 역정을 내지 않고 되레 흡족한 미소를 짓는 걸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궁금한 걸 백 회장에게 물었다.
“혹시 안 비서를 의심하십니까?”
백 회장은 자신의 수행비서인 안 비서까지 속이며, 창원으로 가지 않고 여기 울산에 남았다.
하지만 김 실장은 백 회장에게 그 대답을 듣지 못했다.
벨레레레레~
이동훈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백 회장의 개인폰으로.
이 실장이 백 회장 개인폰으로 전화를 걸 일은 하나 뿐이었다. 바로 백 회장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걸 알기에 김영도는 바짝 긴장을 했다. 백 회장은 바로 그 전화를 받았다.
“날세. 그래 확인은?....으음....역시 그렇군.”
백 회장은 덤덤하니 이 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백 회장을 곁에서 30년을 모셔 온 김영도였다.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 즉 아우라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지금 바로 서울로 가지. 창원? 나는 지금 울산이야. 그렇지. 놈들이 미끼를 물어 준다면야 고마운 일이지. 그래. 배후는 명확하게 밝혀야겠네. 누구 짓인 지야 뻔하지만....”
잠시 후 이 실장과 통화를 끝낸 백승렬 회장. 그가 김영도를 향해 말했다.
“김 실장. 서울로 가지.”
백 회장의 목소리부터가 달랐다. 목소리에 싸늘하게 냉기가 묻어났다.
“알겠습니다. 현석아?”
“네. 출발하겠습니다.”
백 회장은 화가 나면 사람이 더 차분해졌다. 대신 말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김영도도 더는 백 회장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만이 감도는 차 안, 백 회장을 태운 차가 조용히 울산을 빠져 나와서 서울로 향했다.
그 침묵은 차가 경주를 막 지나쳐 갈 때쯤 깨졌다. 백 회장이 자신의 개인폰으로 어딘가에 직접 전화를 건 것이다.
“김 대표? 날세. 삼명에 백 회장. 딴 게 아니라 내 막내 녀석 말이야. 아무래도 위에 두 형들이 가만 두지 않을 모양이야. 으음. 그래. 자식 참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군 그려. 녀석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는 준열이 녀석만 잘 지켜주게나. 음....그래. 이번 일은 내 평생 잊지 않음세. 음....수고하게나.”
통화를 끝낸 백 회장. 그런 그에게 김영도는 묻고 싶었다. 누구랑 통화를 했는지 말이다. 하지만 백 회장은 팔짱을 끼더니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차 안에서 장고에 들어갈 때 백 회장이 취하는 동작으로, 저럴 때 방해하면 크게 역정을 냈다. 그걸 알기에 김영도는 계속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백준열의 도움으로 서울의 처리자 에이전시들 중에서, 규모 면으로 따져 탑 3에 들어가는 신비 에이전시를 인수합병 하는 데 거의 성공한 김훈.
거기 뒷배들이라고 할 수 있는, 3장로들은 연일 언론의 집중 포화를 두들겨 맞고 있었다. 백준열이 인수합병한 방송사와 신문사가 앞장서서 제대로 거수기 노릇을 했다.
또한 중앙지검에서도 그들에 대한 압수수색에 들어갔고, 오늘 내일 사이 그 세 명에 대한 구속 영장이 신청 될 거라고 했다.
그런 마당에 자기 살길 찾기 바쁜 그들이, 신비 에이전시를 위해서 무슨 힘을 쓰겠나?
오히려 신비 에이전시의 도움을 받아야 할 그들이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신비 에이전시는 김훈의 처리자 에이전시에 의해 사실상 팔다리가 묶인 상태.
이제 남은 건 신비 에이전시의 지도부가 백기를 들던 아니면 옥새를 각오하고 싸우든, 두 가지 선택만 남은 상태였다.
김훈은 그래도 피를 보는 것 보다는 평화로운 결말을 원했다. 그래서 전 신비 에이전시 소속 금명훈을 중재자로 신비 에이전시 아지트로 보냈다.
금명훈으로 하여금 신비 에이전시 대표와 지도부를 설득시켜, 원만한 인수합병을 이루고 싶어서 말이다.
“왜 이리 연락이 없지?”
그런데 금명훈이 신비 에이전시 아지트에 들어간 지 두 시간이 지나도록, 여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초조해 하던 김훈에게 VVIP고객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니. 백 회장이 왜?”
김훈은 영광스럽게도 백승렬 회장의 개인폰 번호를 부여 받았다.
백 회장이 그러자고 해서 이뤄졌는데, 설마 그가 이렇게 직접 그에게 전화를 걸어올 줄이야. 김훈은 마른 침을 삼킨 다음, 정중하게 백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