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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이번에는 상대도 재깍 그의 전화를 받았다.
-또 왜?
“왜라니요? 형님은 괜찮습니까? 아버지가 준열이를 회장 자리에 앉히려는 게?”
-당연히 안 괜찮지.
백준호가 전화 건 상대는, 바로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의 장남이자, 삼명물산 대표인 백준경이었다.
그는 당연히 장남인 자신이 삼명그룹을 물려받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백승렬 회장이 그를 보는 눈빛이 변했다는 걸 느끼고, 위화감을 느끼고 있긴 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어떻게 자신과 상의한번 없이, 막내인 백준열에게 덜컥 삼명전자 주식 10%를 넘길 수 있냐는 말이다.
백준경도 다른 계열사 주식이었다면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거다.
삼명그룹 매출의 80% 넘게 책임지고 있는 삼명전자였다. 그 매출은 점점 더 늘어서 3년 뒤에는 90%에 달할 거라는 게, 삼명그룹 예산기획실의 예측이 나온 건 백준경도 익히 알고 있었다.
삼명전자가 곧 삼명그룹인데, 그 주식 10%를 백준열이 양도 받았다는 건, 그 놈이 차기 삼명그룹 회장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니 삼명물산 대표인 백준경이 어제 그 소식을 듣고 화를 내며 길길이 날 뛴 거고.
실제 본사로 백승렬 회장을 찾아가기까지 한 백준경이었다. 하지만 스케줄 상 지방 백승렬 회장이 출장길에 오른 상태라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제 밤늦게까지 술을 퍼 마신 백준경. 원래는 술병 때문에 오늘 결근하려 했는데, 그의 와이프가 그를 억지로 그를 깨워서 기어코 출근시켰다.
오늘 출근 안하면 백승렬 회장의 눈 밖에만 더 날 뿐이라면서 말이다.
이럴 때 일수록 일은 확실하게 하면서, 기회를 엿 봐야 한다나? 아내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보니 그 말대로 억지로 출근한 백준경.
그는 삼명물산 대표실에서 술 깨는 약을 먹고 쉬고 있었다. 일이야 오후에 해도 되고 말이다.
그렇게 약 먹고 겨우 속이 진정 되었을 무렵, 동생인 백준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에는 안 받으려다가 백준경은 그냥 받기로 했다. 왜냐하면 백준호 역시 자신과 같은 처지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시작 된 두 사람의 통화는, 처음에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 됐다. 누가 먼저 핵심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눈치만 본 거다. 하지만 성질이 급한 쪽이 결국 먼저 그 핵심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역시나 먼저 전화를 건 쪽인 백준호였고.
“아버지 마음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거야 형님도 알 테고.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요?”
-그래서. 뭘 어쩌자고?
“까짓 없애버립시다.”
-뭐?
“두 사람 중 하나가 없어지면....원래대로 돌아오지 않겠어요?”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대책이었다. 하지만 그 만큼 미친 짓이고 위험천만한 생각이었다. 자칫 이게 실패로 돌아가고, 그쪽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역으로 그들이 없어질 수 있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 아니요? 형님이나 저나....”
삼명그룹 회장이 되지 못하면 여생이 비루해질 거야 정해진 거고. 그걸 알기에 백준호의 말처럼 결정을 내려야 했다.
역사에 보면 괜히 반란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왕이 되지 못하는 왕자들의 운명이, 지금 자신의 처지와 같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백준경이 말했다.
“조금만 더 생각하자.”
-생각은 무슨....또 형수에게 물어보려는 거지?
백준호의 그 말에 속으로 뜨끔한 백준경. 녀석의 말처럼 지금 같은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큰일에 대해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백준경. 그런 그를 아는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그리고 지금껏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백준호는 아내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쭉 살아왔는데 그때 마다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해서, 잘못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개소리 작작해라. 나 진짜 화낸다.”
-알았어. 한 시간 줄게. 그때까지 아무 말 없으면....나 혼자 진행한다.
백준호는 이미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타깃이 누가 될지 모르지만, 그가 말한 거처럼 둘 중 하나를 없애기로 말이다.
* * *
삼명물산 대표 백준경과 통화를 끝낸 뒤 백준호가 투덜거렸다.
“병신새끼. 요즘도 형수 말에 꼼짝 못하나 보네. 완전 와이프보이(Wife Boy, 주체성 없이 무엇을 하든지 아내(wife)에게 의존하는 남자를 가리키는 신조어) 다 됐네. 야아. 여기 시원한 얼음물 한잔 가져와.”
비서에게 버럭 소리를 친 백준호. 그는 비서가 내어 온 얼음물을 마시며 끓어오르는 속을 식혔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며 백준경에게 전화가 걸려 오기를 기다렸다.
백준경과 통화한 대로 백준경이 싫다면 그 혼자라도, 두 사람 중 하나를 제거하는 건 진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만큼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지겠지. 둘 다 자기 몸 하나는 끔찍이 아끼는 터라 경호가 철저했으니까. 그래서 더 백준경과 손을 잡아야 했다.
“형수라면 알겠지. 여기서 손쓰지 않으면 회장 자리가 훌훌 날아가 버린다는 걸 말이야.”
백준호는 백준경보다 백준경의 처인 형수의 야망과 욕심을 믿었다. 하지만 기다린지 30분을 넘어가자, 그도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C발....설마 못하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야아. 여기 얼음물, 아니 술 가지고 와.”
결국 오늘은 참자했던 술을 가져 오게 한 백준호. 그는 독한 양주를 그나마 언더락스로 얼음에 희석시켜 한잔 쭈욱 들이켰다.
“캬아....이제 좀 살겠네.”
알코올 기운이 그의 몸에 퍼지자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머리도 확실히 맑아지는 거 같았고.
거기에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양주 한 잔을 더 마신 백준호. 빈속에 마신 술은 금세 그의 몸에 취기가 돌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백준호는 바로 누구 전화인지부터 확인했다.
“왔다.”
그랬더니 형인 백준경의 전화였다. 백준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전화 좀 늦게 받았다고 지랄부터 떠는 백준경. 이것만 봐도 백준경이 자신을 수평적이 아닌, 수직적인 관계로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로 기분 나빠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기로 했는데요?”
-그렇게 하자. 대신 네가 추진해. 내가 서포터 할 테니까.
한마디로 칼을 백준호가 쥐고 둘 중 하나를 제거하란 소리였다. 자기는 뒤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런 백준경의 손에 쇠파이프나 알루미늄 배트가 쥐어져 있을 거란 거다. 언제든 백준호의 뒤통수를 후려치려고 말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물러나 있는 건 좋았다. 백준호도 백준경의 도움이 필요하지 그가 직접 나서는 건, 애당초 바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의 뒤는 아니다.
백준경이 손에 무기를 쥐고 있는 거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백준호 눈에 보이는 곳에 백준경이 서 있어야 했다. 그러려면....
“형 밑에 그 애들 좀 보내 줘. 왜 그 일본 애들 말이야.”
-뭐?
백준호는 백준경에게 그의 이름이 각인 되어 있는 칼을 원했다. 그 칼로 자신이 두 사람 중 한 명을 찌르면, 백준경도 꼼짝 없이 공범이 되는 거다.
“왜? 서포터 해준다면서?”
-....
잠시 말이 없던 백준경.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좋아. 보내지. 대신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걱정 마. 나도 그 동안 놀고 있은 건 아니니까.”
자신 넘쳐하는 백준호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된 듯 백준경이 말했다.
-그래서 누구를 없앨 생각인데?
“둘 다.”
-뭐, 뭐?
“둘 다 노릴 거야. 둘 다 없애면 최상의 시나리오고, 둘 중 하나만 없어져도 좋지, 뭐 아니면....좆 되는 거고. 흐흐흐흐.”
-미, 미친 새끼....
막상 동생보고 미쳤다고 했지만, 백준경도 그 생각에 반대의 뜻을 내비치진 않았다.
* * *
백준호의 생각대로였다. 백준경은 또 중요한 시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해서 동생인 백준호에게 시간을 달라고 하고선, 자신의 아내 신미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 그의 아내, 신미나가 재깍 그 전화를 받았다.
-네. 말하세요.
“여보. 준호가....”
백준경으로부터 백준호가 하려는 짓을 전부 전해들은 백준경의 와이프 신미나.
그녀는 일본에 모회사를 두고 있는 살롯그룹 신경호 회장의 둘째 아들 신동호의 장녀로, 백준경과는 정략적으로 맺어졌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10년을 넘기고 있음에도 아직도 밖으로 나돌지 않고 백준경을 잘 내조하고 있었다. 특히나 백준경의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그 점을 높이 사서 백승렬 회장이 삼명 백화점 주식을 20%나 그녀에게 양도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준호 도련님이 당신을 그 일에 끌어 들이려는 모양이네요.
“역시....하지 말까?”
-아뇨. 당연히 해야죠.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있나요.
“절호의 기회?”
-준호 도련님께 하겠다고 하되....
신미나는 그게 왜 절호의 기회인지는 백준경에게 설명하지 않고, 그저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설명했다. 마치 그건 당신이 알 거 없다는 듯 말이다. 당연히 백준경은 자신을 무시하는 신미나의 그런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다 자신이 무능하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기에 백준경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신미나가 하는 말에 집중했다.
-....라고 하면 아마 도련님이 뭔가를 요구할 거예요. 그럼 당신은 잠깐 생각하는 척 하다가 그게 뭐든지 들어주세요.
“그게 뭐든지?”
-네. 아마도 당신도 그 일에 엮이는 쪽의 요구를 해 올 거예요.
“그럼 안 되지 않아?”
-여보. 당신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삼명그룹 회장 자리에 오를 수는 없어요. 하물며 더러운 오물 좀 만지는 거야....둘 다 손 깨끗이 씻으면 돼요. 제가 씻어 줄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그렇게 해요.
자기 믿고 그냥 자기 시킨대로 하란 얘기였다. 여태 그녀가 시킨 대로 해서 잘못 된 적이 없는 탓에, 백준경도 당장은 그녀의 말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도련님과 통화 후에 저한테 바로 전화 주시고요.
그 말을 듣고 백준경이 인상을 썼다. 마치 아내의 말이 백준호와 통화하고 나서, 자신에게 보고하란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백준호에 이어서 아내에게까지 무시를 당한 거 같아서, 백준경은 기분이 더럽다 못해 화딱지가 났다.
“이것들이 진짜....”
하지만 아내의 말 중에 손에 피를 묻히던 더러운 오물을 묻히든, 깨끗하게 씻으면 그만이라는 그 말이 왠지 그의 가슴에 유독 와 닿았다.
하지만 자기도 손은 씻을 수 있었다. 굳이 그녀가 그의 손을 씻어 줄 필요는 없었다.
* * *
백준경은 아내와 통화 후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도 지금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어제 본사로 쳐들어가기까지 한 거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어제 백승렬 회장을 만나지 않은 게 그에게는 천운이었다.
“준호 그 새끼는 둘 중....준열이를 제거하자고 하겠지?”
백준경이 아는 동생 백준호는 생각보다 단순한 녀석이었다. 거기다 백준열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백준호가 아니던가?
“아내 말대로 나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고.”
결심을 굳힌 백준경은 바로 백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아내 신미나가 말한 대로 조금 뜸을 들였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드렸다. 그랬더니 백준호가 황당한 소릴 내뱉었다.
‘둘 다 없애겠다고?’
이건 단순함을 넘어서 미친 게 아닌가? 하지만 백준경의 입가의 미소가 드리웠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아내에게 말하면,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 기대가 됐던 것이다.
백준경은 백준호와 통화를 끝내자, 살짝 흥분한 상태로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련님이 뭘 요구하던가요?
신미나가 단도직입적으로 백준경에게 물어왔다.
“당신이 네게 붙여 준 일본 경호팀을 요구하던데....”
-뭐, 뭐라고요? 그래서 설마 그 요구를 받아드린 건 아니죠?
“무슨 소리야? 당신이 준호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라면서?”
손에 피와 오물 운운하면서 말이다. 뭐 그 보고는 입 닥치고 시킨 대로 하라고 해 놓고선, 이제 와서 설마 딴 소리 하는 건 아니겠지?
-....
백준경의 그 말에 신미나도 뭐라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이미 엎질러 진 물 어쩌겠어요. 제가 수습해 볼 테니까 당신은 가만있으세요.
자신을 무슨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는 신미나. 하지만 그 때문에 백준경은 당장 화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봐도 아내가 난처해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으니까.
‘하긴 처가 쪽 끌어 들이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니까.’
뭐 결국에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어 나가겠지만, 그래도 백준호 때문에 곤란해 하는 아내가 속된 말로 쌤통이었다.
물론 아내가 하는 일이 잘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가 삼명그룹 회장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하긴....나랑 결혼한 것도 그 때문인데....어련히 알아서 할까.”
백준경은 그 일은 백준호와 아내에게 맡기고 한숨 자러 대표실 안에 수면실로 향했다.
그러면서 어제 괜히 과음 했다며 후회를 했다. 이렇게 일이 술술 풀려 나갈 걸 말이다.
한숨 자고 나서 점심으로 해장국을 먹으러 가기로 하고, 백준경은 수면실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