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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내가 대표실에서 여기 저기 전화를 받으면서 열을 내고 있자, 김 비서도 잠잠했다. 그러다 김 비서가 봐도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인터폰이 울리는 걸 보니 말이다.
삐이이익!
-대표님. 박 부대표님께 전화 왔는데, 대표님 핸드폰 계속 통화 중이시라고....통화 끝나시면 바로 전화 달라고 하십니다.
“알았어.”
마침 박 비서에게 보낼 메일도 다 보낸 상황. 나는 곧장 박인호 부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전화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네. 한 시간 전 쯤 TVM 임시주주총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의제인 대표이사 변경 안이 상정 됐고 지금은 표결에 들어갔습니다.
“표결 하나마나에요. 우리가 이길 테니까. 주주총회 끝나면 바로 TVM으로 가세요. 가셔서....”
나는 오늘 TVM의 새로운 대표가 될 예정인 박인호 부대표에게, 그가 당장 뭘 해야 하는지 지시를 내렸다.
-그러니까 대표님이 보내 주시는 특종 기사를, 내일 새벽 뉴스부터 내 보내란 말씀이시군요?
“가능하죠?”
-물론입니다. 대표가 하라는데 해야죠.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비밀로 하시고, 변수 같은 게 생기지 않게, 가급적이면 박 대표님이 직접 챙겨주세요.”
-하하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제가 잘 챙길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나저나 대표님께 대표님 소리를 들으니 좀 어색하군요.
“앞으로 ‘쭈욱’ 대표님 소리 들으실 테니, 곧 그 대표란 소리가 익숙해지실 겁니다.”
나는 곧 TVM의 대표 자리에 오를 박인호와 통화를 끝냈다. 그리곤 박인호의 메일로, 앞서 내가 블랙머니 박 비서에게 보낸 특종 자료들을 그대로 보냈다. 그리곤 그 중에서도 특히 최지훈의 스폰서 의혹을 가장 큰 이슈로 다루라는 메모를 남겼다.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나에게 이를 드러낸 건, 심의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잘잘못을 따진다면 그쪽, 그러니까 대통령 사위 최지훈이 문제지, 나는 그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나를 먼저 건드린 건 그들이고, 해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꿈틀거린 거다. 문제는 그 뒤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나에게 더 큰 위해를 가하는 건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나도 미리 준비는 해 둬야 했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곧장 삼명그룹 이동훈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분 단위로 움직일 정도로 바쁜 사람답게, 이 실장이 전화를 받으면서 용건부터 물어왔다.
“그게....”
나도 바쁜 사람 시간 더 뺏기 싫어서, 간략하게 내일 터질 일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잘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뒤 수습은 그룹 차원에서 나서 드릴 테니 염려 마십시오.
이 실장이 대뜸 내가 잘했다고 칭찬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더 묻지 못했다.
-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끊겠습니다. 회장님을 뵈어야 해서.
뚜뚜뚜뚜뚜뚜....
아니 할 말이 더 있을 수도 있는데, 이 실장은 내가 그에게 더 할 말이 없다고 판단한 듯, 자기 할 말을 하고 나서 후다닥 전화를 끊었다.
“허얼....”
뭐 그의 말처럼 딱히 더 할 말이 없었긴 했지만....살짝 기분이 나빠진 건 사실이었다.
* * *
어제 백준열과 만나 후계자 문제에 대한 얘기를 끝마친 이동훈. 그는 그 사실을 백승렬 회장에게 잘 보고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해서 백 회장을 맞을 때, 그의 얼굴이 한결 밝아 있는 걸 보고, 백준열이 자기가 시킨 대로 했다는 걸 확신했다.
아마도 오늘 아침 가족 식사 모임에서, 백 회장은 백준열 말고 위에 두 아들들을 질책했을 거다. 그럴 것이 비서실에서 최근 장남 백준경과 차남 백준호에 대한 실책이나 비리들에 대한 보고를 올렸으니까.
그걸 보고 백 회장이 가만있을 리 없었고. 하지만 백준열은 예외였다.
이미 백준열을 후계자로 지목한 백 회장이었다. 백준열을 특별히 챙기는 건 당연한 일. 그때 백준열의 반응이 중요했는데, 다행히 어제 이동훈이 시킨 대로 백준열이 경거망동은 하지 않은 듯 했다.
“이 실장. 계획대로 오늘 준열이 녀석에게 삼명전자 주식 10% 넘겨.”
“알겠습니다.”
오늘 삼명전자 주식 10%가 삼명家의 막내아들 백준열에게 양도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건 사실상 누가 차기 삼명그룹 회장이 될지 공표하는 거나 진배없었다.
당연히 위에 두 아들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고. 물론 그에 대한 대비를 이미 다 해 놓은 이동훈 실장.
회장실을 나온 이동훈 실장은 자기 할 일을 착착 진행 시켜 나갔다. 그 중에서 그가 단연 신경 쓰고 있는 건 삼명전자 주식 10%를, 백준열에게 양도하는데 있어서 문제 될 게 없는지 살피는 거였고.
한데 그 과정에서 정부 부처, 특히 금감위와 국세청의 벽이 상당히 높았다. 물론 삼명그룹이 넘지 못할 벽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전임 비서실장이 정부, 즉 대통령을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동훈으로서는 짜증이 치밀었다.
이번 대통령은 누가 뭐래도 삼명그룹에서 밀어서 된 작자였다. 그런 자라면 삼명그룹에서 당연히 코를 꿰어서 질질 끌고 다녀도 시원찮을 판에, 너무 많은 권한을 그자가 행사하게 내버려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 질을 잘못 들였단 소리였다.
“아무래도 전임 실장이 대통령에게 뭔가 약점을 잡힌 모양이로군.”
이동훈을 그렇게 판단을 했고 ,현재 삼명그룹에서 대통령과 청와대를 상대하는 기조 자체를 곧 뜯어 고칠 계획이었다.
지금은 백준열의 후계자 반열을 공고히 하는 게 우선이라, 당분간은 참고 넘어가기로 했고 말이다. 그랬는데 백준열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대통령과 청와대가 명백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도 감히 삼명그룹의 후계자를 상대로 말이다.
한데 그에 대해 기특하게도 백준열이 반격을 가 했다지 뭔가. 무려 대통령과 청와대를 상대로 말이다.
“막내도련님의 배포가 이 정도였는지는 몰랐군.”
백준열이 머리 쓰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힌다는 건 이동훈도 알았다. 하지만 그가 판단하고 있는 백준열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성향의 인물이었다. 뭐 그런 자를 사람들은 흔히 소인배라고 하는데....
그래서 백준열은 사업은 잘 일으켰고 어느 선까지 키워내기는 하지만, 여태 최고의 자리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한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가 안 보는 사이 백준열이 많이 바뀐 거 같았다.
하지만 사람은 잘 안 변한다는 걸 누구보다 이동훈은 잘 알았다.
그나마 바뀔 여지가 있는 어린 시절, 학창시절에나 교육의 의미가 있지, 사실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한번 생긴 가치관이 바뀌긴 어렵다. 그래서 머리가 굳어버렸다는 관용구를 흔히 쓰게 되는 거고.
어째서 백준열이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이동훈은 백준열이 변했다는 생각보다는 그 주변에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백준열에게 조언을 했을 가능성을 높게 봤다. 그 누군가, 즉 조력자는 이동훈이 찾으면 금방 알아 낼 것이고.
그것보다 지금은 이 사실을 백승렬 회장에게 보고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동훈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백승렬 회장을 만나러 회장실로 향했다.
* * *
백승렬 회장은 갑작스런 이동훈 실장의 면담 요청에 의아해 하며 그를 회장실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보통 문제가 있어도 보고 전에 사전 조치를 다 취해 놓고,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백 회장 앞에 서는 게 이동훈이었다. 그런데 그런 신중한 스타일의 그가 뜬금없이 바로 면담을 요청해 왔다.
“좀 전에 준열 도련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준열이가? 왜 무슨 사고라도 쳤나?”
백 회장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이제 막 후계자로 정한 막내아들이었다. 녀석이 여기서 대형 사고라도 친다면....녀석의 후계자 로열로드가 자칫 흙탕길로 변할지 몰랐다.
“그게 아니라....”
이동훈은 좀 전 백준열과 통화한 내용을 그대로 백 회장에게 전했다. 그러자 백 회장의 굳었던 얼굴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의 한 손이 턱을 쓸었다. 그건 백 회장이 흥미로운 일을 접했을 때 보이는 반응으로, 백 회장은 지금 이동훈의 보고에 확실히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준열이가 그럴 거라고 했단 말이지?”
“네. 해서 그룹 차원에서 도련님을 지원할 대책을....”
한데 백 회장이 이동훈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대책은 무슨....됐어.”
“네?”
“지금 대통령에게 그런 건 먹히지 않아.”
“네?”
“오 실장이 왜 대통령과 청와대의 코에 코뚜레를 꿰고 멍에를 씌우지 못했을까?”
백승렬 회장이 전임 비서실장인 오규동을 거론했다. 그러자 이동훈이 눈치껏 대꾸했다.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 아닙니까? 혹시 오 실장이....”
“물론 오 실장이 대통령에게 약점 잡힌 것도 있었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냐.”
그러니까 백 회장도 알고 있었단 소리였다. 그 말은 삼명그룹에서 대통령을 통제 하지 못할 뭔가가 있다는 거고. 그걸 이동훈은 지금 백 회장의 입을 통해 들을 수가 있었다.
“대통령이 복합적으로 우리 쪽 약점을 쥐고 있었어. 그 중 80-90%가 서재국 전 대통령과 처가 쪽 비위고.”
하지만 서재국 대통령은 죽었다. 그리고 백 회장은 이혼을 했고. 그 말은 그 80-90%의 약점이 사라졌단 거다.
“나머지 10-20%는요?”
“내 두 아들들의 약점이지.”
백 회장의 두 아들들이 누군 지야 뻔했다.
“그 말씀은?”
“이제 대통령과 청와대의 코를 뚫어도 된다는 얘기지.”
“다행이군요.”
“그래서 바로 뚫을 생각인가?”
“아뇨. 그러면 재미가 없죠. 판을 더 키워서 코뚜레에 멍에까지, 한 번에 다 씌워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내 두 아들들은 피해를 보겠군.”
백 회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싫으시면 방법을 달리 할 수 있습니다.”
“아냐. 어차피 녀석들도 알아야지. 자신들의 주제가 어딘지 말이야.”
백 회장은 이번에 자신의 후계구도를 확실히 할 생각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일은....제 선에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백 회장의 허락을 맡고 이동훈은 회장실에 들어갈 때와는 사뭇 다른 홀가분한 얼굴로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몇 군데 급하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곤 만족스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일부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군.”
그 말 후 이동훈은 마저 하던 일에 매진했다. 오늘 오후쯤이면 아마도 삼명그룹이 발칵 뒤집어 지게 될 그 일을 말이다.
* * *
도쿄 인근 온천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하시모토 나나미를 태우고 나리타 공항으로 향한 히로시. 그는 출국과 탑승수속을 마친 뒤 나나미에게 말했다.
“면세점 쇼핑이나 하고 있어.”
“그럴게요.”
안 그래도 살게 있었다며 면세점 한곳으로 향하는 나나미를 보고서, 히로시는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저 히로시입니다. 네. 네. 어제 말씀드렸던 대로 지금 서울에 가려고 공항에 와 있습니다. 네. 걱정 마십시오. 나나미가 가는데 요 뭘. 네. 혹시 잘 안 풀릴 경우, 하룻밤 자고 내일 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그때는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도 회사 대표에게는 얘기를 해야 했다. 히로시의 소속사인 하이브 사쿠라의 안도 사장은 돈만 잘 벌어오면 모든 게 OK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돈을 벌지 못하면, 그 연예인과 매니저 둘 다 좋지 못한 험한 꼴을 봐야했다.
다행인지 히로시의 경우 안도 사장으로부터 그런 험한 경험을 당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안도 사장은 히로시가 말한, 한일합작드라마에 나나미가 출연하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말을 믿었다.
그래서 나나미를 데리고 그 한일합작드라마의 제작자를 찾아, 한국의 서울에 갈 거라는 히로시에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해주었다. 히로시 말대로 나나미가 탑 스타가 된다면, 안도 사장도 돈 방석에 앉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안도 사장과 통화 후 잠시 고민하던 히로시. 그는 국제 전화를 걸었다. 바로 한국에 백준열 대표에게 말이다. 하지만....
띠띠띠띠띠띠....
“통화 중이네.”
히로시는 나나미가 맘 편히 쇼핑을 할 수 있게 면세점 코너에서 나와서 푸드 코너로 가서 커피를 한 잔 사 마셨다. 그러며 다시 백준열 대표에게 전화했는데, 그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그렇게 쇼핑을 끝내고 돌아 온 히로시는, 나나미와 같이 비행기 탑승을 하러 줄 섰을 때, 또 백준열에게 전화를 해봤다.
“와아....”
백준열은 그때도 통화 중이었다. 한국에 있는 지인을 히로시가 통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 JYB엔터는 요즘 거기 연예기획사 중 단연 최고라고 했다.
근데 그 말이 맞긴 한 거 같았다. 그 대표인 백준열이 전화통화 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렇게 바쁜 걸 보니 말이다.
“히로시상?”
“어어?”
“빨리 오세요”
“아아....그, 그래.”
백준열 생각하느라 앞에 줄이 줄어 든 것도 몰랐던 히로시. 그는 나나미가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쭉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