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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453화 (45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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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물론 그 스케줄은 그저 보기만 할 뿐, 내 모든 신경은 온통 귀에 가 있었다.

‘좋군. 좋아.’

백승렬 회장이 말로 두 아들들을 쥐 잡듯 닦달을 해 대고 있었다.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둘은 끽 소리도 못하고, 그 잔소리를 일방적으로 받아내야만 했고.

‘대단하네.’

백승렬 회장의 잔소리 신공은, 멀리서 엿 듣고 있는 나도 짜증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강력했다. 그걸 바로 앞에서 감내해야 하는 두 아들들의 심경은 아마도 최악, 그 자체 일 거다.

‘이쯤에서 말실수 좀 해 주면 딱 인데....’

그런 내 염원을 듣기라도 한 걸까? 둘째 백준호가 그걸 또 해 주네?

“아버지. 왜 저희들에게만 이러시는 겁니까? 막내는요? 막내도....”

하지만 너희들과 달리 나는 백승렬 회장의 눈 밖에 날 일을 전혀 하지 않았거든. 그러자 시작 된 백승렬 회장의 나에 대한 폭풍 칭찬. 근데 그게 또 묘하게 두 아들들을 자극했고, 결국 잘 참고 있던 장남 백준경까지 자극해 버렸다.

“이거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어떻게 막내만 예뻐하시고....”

둘의 어쭙잖은 나에 대한 질투심이 백승렬 회장을 결국 폭발하게 만들었고, 잠시 후 얼굴이 시뻘게진 둘이 씩씩거리며 주방을 나왔다.

그들은 내가 아직 거실에 있음에도, 그것도 모를 정도로 화가 나서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곧장 거실을 가로질러서 현관으로 움직였다. 그리곤 현관에 벗어 둔 최고급 이태리제 수제 화를 신고 휑하니 이 집을 나갔다. 그때 내 귀로 두 아들에 크게 실망해서 개탄하는 백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났군.”

두 아들이 완전히 백 회장에 눈밖에 나버렸다. 나는마저 커피를 마신 뒤 몸을 일으켰다. 그때 김 집사가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도련님. 회장님께서 서재에서 잠깐 뵙자고 하십니다.”

“그래요?”

김 집사는 눈치가 빨라 보였다. 하긴 오늘 아침 같다면 바보라도 알 거다. 백승렬 회장이 누구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지 말이다.

사용인들이야 당연히 그 후계자에게 잘 보이려 들 수밖에. 누가 회장이 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고용이 계속 이어질지, 아니면 해지를 할지 모르니 말이다. 김 집사도 결국 고용인이고 그는 줄을 잘 서는 타입 같아보였다.

“네. 앞서 나가신 두 분 도련님과 달리 도련님을 부르라고 하실 때는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이런 정보가 별거 아닌 거 같아보여도 중요했다. 당장 백 회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으니까.

똑똑똑!

노크를 하자 백 회장의 묵직한 목소리가 그의 서재 문 밖으로 들려왔다.

“들어 와.”

나는 곧장 서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오래 묵은 책 냄새와 함께 익숙한 백 회장의 냄새가 뒤섞여서 났다. 나는 곧바로 백 회장이 앉아 있는 묵직하니 잿빛 도는 마호가니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허리 쭉 펴고 고개 바짝 쳐들고 당당한 걸음으로 말이다.

앞서 욕먹고 이 집을 나간 두 아들과 달리 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런 나를 백 회장이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순식간에 얼굴 표정을 바꿨다.

역시나 노회한 최고 경영인답달 까? 그는 얼굴 표정만으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아들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유지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내년에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에 들어가자. 그리고 이 실장에게 들었겠지만, 오늘 네 앞으로 삼명 전자 주식 10%가 넘어 갈 거다.”

삼명 전자 주식 10%!

사실상 내가 삼명그룹의 후계자임을 공표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항상 신중하게 생각하고, 니 판단에 100만 삼명 식구들의 생계가 달렸음을 잊어선 안 된다.”

“네. 아버지.”

백 회장 같은 스타일에게는 긴 말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반드시 성과를 보여야 했고. 말 보다는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야 했다.

‘왜냐하면 백 회장이 그래 왔으니까.’

호랑이 새끼가 고양이 행세를 해서야 되겠나? 그렇게 봤을 때 오늘 아침 보인 두 아들들은 백 회장의 눈에 고양이로 보여 졌을 거다. 그럼 나는?

‘나야 그냥 호랑이지. 백 회장의 눈에는 새끼 호랑이로 보일지 몰라도....’

백 회장과 길게 얘기 나눌 필요가 없었다. 해서 그의 서재에 들어간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도로 서재 밖으로 나왔다. 서재 밖에 김 집사가 눈에 이채를 띤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간 내가 말했다.

“아버지 신경 좀 써 주세요.”

“당연히 제가 챙겨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나는 살짝 목소리 톤을 낮춘 다음 김 집사만 들리게 말했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그게 설사 사소한 거라도 제게 알려주시고요.”

그러면서 김 집사에게 내 개인폰 번호가 적힌 명함을 건넸다. 김 집사는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내가 내민 명함을 정중히 두 손으로 받았다.

* * *

서울 종로구에 있는 대통령의 관저. 바로 청와대에 아침이 밝았다.

그곳의 안 주인 영부인 김영옥은 남편을 챙기고 나서, 우아하게 오늘 자신의 일정을 살피며 커피를 마시다가,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

“실장님 오늘 바쁜가?”

그러자 눈치 빠른 비서가 살짝 목소리 톤을 낮추며 말했다.

“부를까요?”

“어. 잠깐 들러 주십사 잘 말씀 드려.”

그래도 청와대 2인자다. 그 예의는 갖춰주는 게 맞았다. 김영옥의 말에 그녀의 비서가 바로 움직였고 10여분 뒤, 반백 머리에 딱 봐도 깐깐하게 생긴 장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가 누군지 청와대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바로 청와대 비서실장 김순철.

“영부인님. 찾으셨습니까?”

현 정권에서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그 김순철이, 영부인 김영옥 앞에서는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그럴 것이 김영옥이 그를 존중해 주니, 그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좀 전 김영옥의 비서에게 듣기로, 분명 오늘 영부인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했었다.

‘뭐야?’

한데 지금 김영옥은 누가 봐도 기분 나쁜 얼굴이었다. 김순철의 말을 듣기는 했는지 김영옥이 보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쓰고 있던 돋보기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김순철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바쁘신데 제가 오라고 한 거 아닌가요?”

그래도 김순철을 보고 말할 때 김영옥은 웃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게 어딘가? 그 만큼 영부인이 자기를 신경 써주고 있다는 방증이 아니겠나? 해서 김순철은 최대한 웃는 얼굴로 영부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김영옥이 이렇게 아침부터 그를 불렀을 때는, 뭔가 할 말이 있어서였다. 그걸 알기에 김순철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10분 뒤에 청와대 비서진 회의를 주관해야 하는 그로서는 사실 시간이 없었다.

영부인도 그걸 알기에 길게 얘기하지 않고, 그녀가 김순철을 부른 용건을 말했다.

“서초구에 아크로텔이라는 빌딩이 있어요. 거기 빌딩주가 문제가 좀 많은 거 같던데....”

“아크로텔 빌딩 말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김순철은 정치판에서 굴러먹은 늙은 여우였다. 그런 그가 영부인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더 하실 말씀은....”

“없어요. 바쁘실 텐데 그만 가 보세요.”

“네. 그럼 저는 이만....”

김순철은 곧장 관저를 나와서 춘추관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민정수석인 박재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실장님.

“박 수석. 서초구에 아크로텔이라는 빌딩이 있을 거야. 거기 좀 알아 봐.”

김순철이 알아보란 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은 민정수석 박재범이 대답했다.

-네. 탈탈 털겠습니다.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김순철은 박재범에게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 사이 춘추관에 도착한 김순철은 자신에게 뛰어오고 있는, 대변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쪽바리 새끼들. 하필 이럴 때....”

그저께 일본에서 또 독도에 대해 헛소리를 늘어놨다. 근데 어젯밤에 일본 수상이 전격적으로 야시꾸리 신사를 방문했다.

그에 관한 청와대의 입장을 듣기 위해 아침부터 기자들이 떼거지로 춘추관으로 몰려와 있었다.

“실장님. 뭐라고 합니까?”

청와대 대변인이 김순철의 의견을 물었다. 김순철은 이미 영부인을 보러 가기 전에 대통령을 만났다. 그리고 일본 수상의 야시꾸리 신사 방문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를 정해 놓은 상황.

“뭐 대답이야 정해진 거 아니요? 심히 유감스럽다고 발표해요.”

“아네. 알겠습니다.”

김순철로부터 대답을 듣고 난 청와대 대변인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춘추관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또 춘추관 주변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걸 확인하고 나서, 김순철은 자기가 굳이 여기 더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해서 여기 오면서 30분 뒤로 미뤄 둔, 비서관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돌렸다.

* * *

말은 비서관 회의였지만, 정확히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였다. 비서실장인 김순철이 청와대의 모든 비서관을 다 모아놓고 회의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자아. 회의 시작합시다.”

평소보다 30분 늦은 회의였지만 끝날 때 시간은 평소와 거의 같았다. 그만큼 요즘 청와대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대통령 집권 초기에 청와대 역시 삐꺽거렸다. 그걸 잘 수습하고 지금의 시스템을 갖추는데 누구보다 일조한 게 바로 김순철 비서실장과 이석기 정책실장이었다.

청와대의 두 기둥이라고도 불리는 그 둘이, 대통령을 잘 보좌하면서 청와대도 빠르게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대통령님의 정책들이 임기 내 완수할 수 있도록 다들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랍니다.”

김순철 비서실장의 마지막 당부의 말과 함께 수석 비서관 회의가 끝이 났고, 바쁜 듯 이석기 정책 실장과 경제 수석이 후다닥 회의실을 빠져 나갔다.

하긴 현 정권에서 가장 시급한 게 뭐겠는가? 바로 경제 정책들이었다.

대통령이 선거 때 내 놓은 그 경제 정책들이 실패로 돌아가면, 이번 정권 역시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경제 정책들이 성공한다면 ,차기 정권 역시 현 대통령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대한민국 역사상 청와대 주인들 중 법정에 서지 않은 이가 없었다. 지금의 청와대 주인 역시 자신이 그렇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하지만....

‘경제 정책이 실패하면 그 역시 무사하기 어렵지.’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사람은 없다지만, 정치인은 털면 풀풀 먼지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건 현 집권여당의 총수 격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대통령이 매일 정책실장을 불러서 닦달하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실장님?”

“어? 어어. 왜?”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다가 누가 말을 걸자 그제야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김순철. 그런 그의 눈에 민정수석인 박재범이 보였다.

“아까 말씀하셨던 그 서초구 빌딩 말입니다.”

“어어. 벌써 조사가 끝났나?”

“그게....”

박재범이 갑자기 주위를 의식하며 막상 말을 하지 못하자 김순철이 바로 말했다.

“내 사무실로 가서 차 한 잔 하고 가지.”

“그럴까요?”

두 사람은 곧장 회의실을 나와서 청와대 비서실장실로 향했다.

“나는 국화차. 자네는?”

“저는 대추차로 하겠습니다.”

김순철은 자신의 비서에게 차를 내어오게 시키고, 자신의 옆 자리에 앉은 박재범에게 물었다.

“뭔데 그러나?”

그러자 박재범이 대답을 했다.

“그 서초구 빌딩주가 백준열이었습니다.”

“뭐? 그 서초구 아크로텔 빌딩 주인이 백준열 대표였다고?”

“그렇습니다. 말씀 듣고 바로 중앙지검에 연락 했더니, 거기 부장 검사가 바로 알던데요?”

“그, 그래?”

김순철의 교활한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내 그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상하군. 백준열과 영부인이 무슨 연관이 있다고....”

김순철의 혼잣말에 민정수석 박재범이 반짝 눈빛을 빛냈다. 그도 눈치 깐 거다. 서초구 아크로텔 빌딩주에 대해 조사 시킨 윗선이 영부인이라는 걸 말이다.

달칵!

그때 비서가 김순철과 박재범이 주문한 국화차와 대추차를 내어왔다.

“....”

하지만 차를 받아 놓고도 두 사람은 차를 마시지는 않고,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 때문에 비서실장실에 한 동안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건 바로 이 방 주인인 김순철이었다.

“일단 자네는 이 일에서 손 떼게.”

“네?”

그게 무슨 소리냐며 김순철을 빤히 쳐다보는 박재범.

그런 그의 시선을 외면하면 김순철은 이미 반은 식어 버린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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