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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영화진흥위원회, 약칭 영진위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주로 하는 일은 영상제작 관련 시설과 규정에 따른 영화발전기금의 관리, 운용하는 곳인데, 여기서 영화발전기금이라는 애매모호한 돈 때문에, 추후 문제가 될 곳이었다.
그 돈은 아마 지금도 영진위의 고위인사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유흥업소와 대형마트 등에서 개인적으로 흥청망청 사용하고 있을 건데, 그 사실이 추후 알려지면서 공금 유용 및 횡령 의혹으로 여럿 잘려 나갈 곳이기도 했다.
‘한 번 살려 줘?’
지금이라도 이에 대처하면, 영진위의 얼굴에 똥칠하는 일까지는 안 생길지 몰랐다. 하지만....
‘내가 왜?’
거기다 영화진흥위원장이라는 작자가 내게 대놓고,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고 있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에게 내가 주는 사과 박스를 자기도 받고 싶다는 거지. 뭐 못 줄 건 없다. 하지만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는 법. 거기다 그랬다가는 영화진흥공사 사장이 기분 나빠할 수 있었다.
그걸 만회하려면 사과 박스가 하나 더 늘어나야 할 거고. 그건 내가 쓰고 공기업에 쓰고 있는 약 치는데, 변화를 줘야 한다는 건데....
‘딱히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
해서 나는 영화진흥위원장에게는 사과 박스를 건네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걸 대 놓고 기분 나쁘게 말하는 건 하수나 하는 짓. 굳이 영화진흥위원장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님이 그러시던데요. 이제 영화발전기금을 집행을 본인이 직접하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영진위 직원들 역시도 직접적으로 지휘 통솔하시고요.”
“뭐, 뭐요? 홍 사장이 진짜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
내 말에 영화진흥위원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 말대로라면 영화진흥공사 사장이 앞으로 자기 마음대로 다 해 먹겠다고 천명한 거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즉 모든 불똥이 영화진흥공사 사장에게로 튀면서, 영화진흥위원장이 더 이상 나한테 돈 뜯을 생각도 싹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 뒤로 모든 게 형식적이었다. 영화진흥위원장은 내가 빨리 가 주길 바라는 눈치였고, 나는 10분쯤 그와 더 환담을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벌써요? 저는 한국 영화를 사랑하시는 백 대표님과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바쁘시다니 더 붙잡을 수도 없고....”
그 뒤 나는 거의 떠밀리듯 영화진흥위원회를 나와야했다. 그래서 그 다음 스케줄인 국민연금 이사장과의 점심 약속 장소까지 가는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물론 그렇다고 나까지 여유로운 건 아니었고. 왜냐하면 딱 그때 서진그룹 김명진 회장에게서 연락이 온 거다.
하긴 홍익태도 알게 된 일을, 서진그룹 김명진 회장이 모를 리 있겠나? 내가 서진그룹의 지주사인 서진제약의 주식을 빠르게 선점하면서 먼저 선빵을 날린 상황. 사실 긴 얘기도 필요 없었다.
-....데 좀 뼈아프네.
“저도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스럽습니다.”
-잘 받았으니 곧 돌려주도록 하지.
“뭐 그러시던지.”
해서 날선 대화 끝에 통화 시간은 3분을 넘기지 않았다. 대신 입맛이 썼다.
아무래도 이 몸의 주인인 백준열은 김 회장과 싸우는 게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싸워야 할 땐 싸운다. 그래야 내가 하고 싶은 걸 내 마음대로 하고 살 수 있으니까. 백준열은 그걸 못 했기에 끌려 다니는 인생을 살았다. 그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내가 지향하는 삶을 방해하는 자와, 그 세력은 모두 내 적이고, 그 적에 대한 나의 조치는 앞으로도 한결 같을 것이다.
‘치우고 없애 버린다.’
* * *
서진그룹 김명진 회장과 통화 후 찜찜한 기분을 억지로 털어 낸 나는, 국민연금 이사장과 점심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일식집으로 예약하지 않으면 이용하기 어렵다는 곳인데....
‘나는 예외지.’
백준열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는 호텔만큼이나 맛집에도 많은 돈을 썼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가는 일식집 역시 그런 곳 중 한 곳이었다.
“여기로군.”
‘예향’이란 간판이 멋스럽게 보이는 일식집은 이미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이 집에 VIP룸은 항상 나를 위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여기 사장이 사기를 당해서. 더 이상 여기서 영업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 걸. 내가 도와 준 적이 있었고, 그 이후 나는 여기 VVIP고객이 됐다.
“어서 오십시오. 백 대표님.”
내가 가게 안에 들어가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50대의 중후한 인상의 남자가 나를 반겼다.
“여전히 장사가 잘 되네요.”
“하하하하. 덕분입니다. 가시죠.”
일식집 주인이 직접 나를 VIP룸으로 안내했고. 따로 주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오마카세, 즉 주방특선으로 상차림이 나올 테니까.
그날의 재료로 요리한 이곳 최고의 음식들이 곧 나올 예정이었다. 그리고 5분쯤 기다렸을까? 기다리던 손님이 왔다.
“백 대표!”
“아이고. 이사장님!”
오늘 오전에 통화를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얼굴로 보는 건 오랜만이라서, 나는 국민연금 이사장과 반갑게 악수를 했다.
“으음....역시....”
그리고 이곳 일식집의 음식들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여기 명성만큼이나 음식들이 훌륭하군.”
국민연금 이사장도 여기 음식에 만족감을 드러내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나눠야 할 얘기는 뒷전이고 음식 먹기에 집중했다.
“잘 먹었네.”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곤 후식을 즐기면서 서로 할 말을 했는데 국민연금 이사장은 챙길 거 챙겼고, 나도 원하는 것에 대한 확답을 들었다.
“언제 골프 한 번 칩시다. 백 대표.”
“좋죠. 조만간 시간 한 번 잡겠습니다.”
서로 윈윈(Win-Win) 한 체 기분 좋게 일식집을 나섰고, 연배가 높은 국민연금 이사장을 먼저 보낸 뒤, 나도 대기 중인 차를 타고 JYB엔터로 향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또 무슨 일로 누가 내게 전화를 걸었나 핸드폰을 살폈다.
“어?”
그랬는데 너무 뜻밖의 사람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 여자가 왜?”
바로 한국항공 경영본부장인 조은아였다. 그녀와 나 사이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나 생각하자, 백준열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조은아가....일방적으로 나를 좋아했었군.”
당연히 주위에 널린 게 예쁘고 쭉쭉빵빵인 여자들인데, 백준열이 조은아에게 관심이 있었을리 없었다. 백준열의 기억에 조은아는 치근덕거리는 귀찮은 재벌 3세 여자일 뿐이었다.
“여보세요?”
일단 무슨 일 때문에 조은아가 내게 전화를 했는지 궁금해서 전화부터 받았다.
-오빠. 나야 은아.
아주 대 놓고 친근하게 구는 조은아. 하지만 백준열의 기억에 따르면 우리는 오빠, 동생 할 정도로 친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조은아 본부장님. 장난 그만 치시고 전화하신 용건이나 밝히시죠?”
내가 살짝 정색하며 말하자, 조은아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백준열 대표님은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인간미가 없어요. 이쪽에서 먼저 문을 열면 그래도 호응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 문, 도로 닫아 버리기 전에 빨리 할 말 하시죠. 저 바쁩니다.”
-흥칫! 나도 바쁘거든요. 어제 우리 항공사 이용해 주셨더군요. 조종실에도 들어가셨고. 유혜라라는 연예인을 앞세워서 말이죠.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아뇨. 문제 될 건 없죠. 표면적으로는 요. 근데 투자사 대표가 모처에서 평소 안하던 짓을 하면, 거기 사람들은 긴장을 하게 되죠.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나 해서요.
그러니까 조은아의 말은 내가 한국항공에 무슨 짓을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지금 표명하고 있었다.
“그런 일 없습니다.”
내가 딱 끊어서 얘기하자, 조은아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그럼 제 생각이 기우에 불과하다고 봐도 좋단 말이죠?
“네. 기웁니다. 기우.”
-오빠가 거짓말 할 사람이 아닌 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근데 우리 언제 같이 저녁 먹어요?
누가 들으면 내가 자기한테 저녁 사기로 한 줄 알겠다. 거기다 또 호칭을 오빠라고 부른다.
“나 그쪽 오빠 아니고, 우리가 같이 저녁 먹을 일은 비즈니스 때문인데, 그렇게 해 줄까요?”
-아, 아뇨. 비즈니스적인 만남은 제 쪽에서 거절하도록 할게요. 백 대표님.
“더 할 말 없으면 끊습니다.”
정말 내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전화 통화였다. 조은아는 내게 더 할 말이 있는 거 같았지만 나는 아니었다. 해서 끊는다고 하고나서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 * *
조은아와 짜증나는 통화를 하는 사이 JYB엔터 사옥 건물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를 태운 차가 JYB엔터 본사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려고, 본사 건물 정문에서 막 방향을 틀 때였다.
“응?”
내 눈에 점심 먹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중인 차은석 부문장이 보였다. 그녀와 같이 식사를 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명의 사원들과 같이 말이다. 근데....내 예민한 눈에 거슬리는 게 포착 됐다.
“차 세워.”
내 그 말에 운전석의 경호팀원이 즉시 차를 멈춰 세웠다. 그러자 내 옆의 문 팀장이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나는 대답 대신 차창을 내렸다. 그리고 그 사이 차은석이 들어가 버린 본사 건물 입구를 차창 밖으로 내다보며 문 팀장에게 말했다.
“저기 검은 재킷에 청바지 입은 남자 보이지?”
“네.”
“잡아 와.”
내가 괜히 그런 지시를 내릴 리 없다는 걸아는 문대식. 그가 타고 있던 내 차에서 내리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전기를 꺼내서, 어딘가와 송신을 하는 걸 보고 나는 앞쪽 운전석에 말했다.
“이만 가지.”
“네.”
나를 태운 차는 이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고, 나는 경호팀원들에게 들러 싸인 체 대표실로 올라갔다.
대표실에 들어가기 전 김 비서를 힐끗 봤는데, 그래도 장거리 비행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지,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살짝 보였다.
‘오늘 좀 일찍 퇴근 시켜 줘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대표실로 들어간 나는 징징거리는 내 핸드폰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좀 전에 조은아도 그렇고, 별로 쓰잘때기 없는 전화가 또 걸려왔다. 안 그래도 오늘 바빠 죽겠는데 말이다.
“모시모시(もしもし)?”
그래도 조은아처럼 그 사람이 왜 나한테 전화를 걸었는지 궁금해서 나는 그 전화를 받았다. 그 상대가 일본인이라서 일본 말로 말이다.
-백 대표님. 저 히로시입니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게 전화한 히로시는 요즘 일본에서 떠오르고 있다는, 신인 여배우 하시모토 나나미의 매니저였다. 백준열과는 자주 통화한 인물로, 요 근래 내가 전화가 없자 그게 이상했던지 먼저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백준열이 기억하는 히로시는 진짜 영악한 작자였다.
일본 사람들이 겉과 속이 다른 거야 백준열도 알았다. 하지만 히로시는 그런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었다. 반면 백준열은 성질이 급한 편이었고. 얘기 할 때 감정이 잘 묻어 나왔다. 그래서 매번 백준열은 자신의 의중을 히로시에게 다 들켰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백준열이 히로시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연락이 뜸하셔서....
이 정도만 얘기해도 평소의 백준열이었다면, 자신이 왜 히로시에게 연락을 안 했는지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댔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다.
“바빠서요. 근데 무슨 일로 전화 했습니까?”
히로시가 찔러 본 물음은 얼렁뚱땅 넘어가고, 그가 내게 건 용건을 내가 바로 묻자, 그가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게....저번에 말씀하셨던 한일합작드라마에 대해서 궁금해서요.
“뭐가요?”
-저희 나나미를 그 한일합작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하실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죠.”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저희 나나미가 얼마 전 닛본TV의 드라마 ‘마녀의 손길’을 끝내지 않았습니까?
“네. 저도 잘 봤습니다.”
안 봤지만 봤다고 해야지. 뭐 내용은 대충 아니까. 봤다고 해도 찔리진 않았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차기작을 고르고 있는 중이라....
이쯤 말하면 평소 백준열이라면 히로시의 미끼를 덥석 물었을 거다. 하시모토 나나미의 차기작으로 한일합작드라마인 ‘내 스타와 100일’에 출연하는 어떻겠냐고 말이다.
그러면서 또 쓸데없는 소리를 다 늘어 놨겠지. 그걸 듣고 히로시는 하시모토 나나미에게 유리하게 판을 짤 것이고.
‘당시 하시모토 나나미에게 준 개런티도 상당했었지.’
이전 삶의 내가 기억하기로, 아직 신인 연기자인 하시모토 나나미에게 백준열은 한국의 탑 스타인 유혜라와 비슷한 출연료를 책정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