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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지금 내 앞의 윤재구 회장은 백준열이 알던, 그 오만하면서도 그 어떤 순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던, 그 윤재구 회장이 아니었다.
흡사 아픈 아이를 든 부모가, 의사 선생님에게 아이의 안위를 잘 부탁하는, 그런 경건한 모습이랄까? 아무튼 나는 윤재구 회장이 내게 하고 싶다는 그 부탁이 뭔지 궁금해졌다.
“뭔데요? 제게 하겠다는 부탁이?”
그래서 물었다. 그랬더니 윤재구 회장이 눈빛을 반짝이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게 말일세. 사실은....”
“그러니까 회장님 애견이 곧 죽는데, 그걸 직감이라도 한 듯 오늘 아침에 그 애견이, 한 암캐와 최후의 교배를 해서 자신의 씨를 남겼고, 그 암캐가 바로 제 애견 엘베란 말이로군요?”
윤재구 회장이 몇 분에 걸쳐서 길게 얘기한 걸, 내가 간략히 줄여서 요점만 얘기하자, 윤재구 회장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걸 사실대로 얘기했다. 그것 역시 몇 분에 걸려서. 해서 내가 다시 확인 차, 그 말을 줄여서 요점만 윤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님 애견이 남긴 그 씨로 내 애견 엘베가 임신이 된다면, 그 새끼 중 한 마리를 회장님에게 양도해 줄 수 없냐는 말이네요?”
“맞네. 그래 줄 수 있겠나?”
너무도 애절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윤재구 회장. 하지만 안타깝게도 엘베 역시 노견이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엘베가 윤 회장의 애견의 씨를 받았다 한들 ,임신이 되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하지만 지금 굳이 그런 얘기를 꺼내서, 윤 회장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엘베가 임신이 안 됐다는 사실만, 며칠 뒤 윤 회장에게 알려 주면 그걸로 끝날 일이었으니까.
“그러죠. 회장님 말씀대로 애견 키우는 입장에서, 그 정도는 해드려야겠지요.”
그때였다. 윤재구 회장이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내 말을 듣고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면서, 내 손을 잡고 정말 고마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흐흐흑....고맙네. 고마워.”
‘이 사람이 진짜 내가 알던 그 피도 눈물도 없는 그 윤재구 회장 맞아?’
윤재구는 사채꾼이었다. 그것도 성공한.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하면, 윤재구가 그 동안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이 불법 고리 사채로 돈을 벌었다는 얘기다.
그런 윤재구가 개 한 마리 때문에, 지금 내게 이렇게 애원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울기까지 하고 있었다.
마치 그 애견이 윤재구에게 있어 피붙이, 그러니까 진짜 자식 같았다.
‘윤재구 회장에 대해 좀 알아 봐야겠군.’
내가 그렇게 생각할 때, 윤 회장이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으며 말했다.
“이런.,..내가 추한 꼴을 보였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도 제 애견이 곧 하늘나라로 떠난다면, 회장님과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마치 윤 회장의 심정을 다 이해한다는 듯 말했고 그게 윤 회장의 심금을 울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고맙네. 그리고....예전의 일은 다 내 욕심에서 비롯된 것. 사과하지.”
윤재구 회장이 주식 투자를 두고, 나와 충돌 했었던 옛일까지 끄집어내서 사과를 해 왔다.
나로서는 지금의 좋은 분위기에 먹칠을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서, 그 사과 역시 바로 받아드렸다.
“아닙니다. 싸움을 어디 혼자 합니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저 역시 욕심이 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허허허허. 백 대표도 그 사이 현명해졌군. 좋은 일이야.”
윤재구 회장이 곧 사람 좋은 얼굴로 나를 칭찬했고, 나는 아직 멀었다며 겸손을 떨었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군. 연락 주게.”
“네.”
내가 막 윤 회장을 배웅할 때였다. 내 머릿속에 견신 시스템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 * *
-윤재구 회장의 애견의 최후를 같이 지켜보세요. 완수 시 개지수 10포인트를 지급합니다.
견신 시스템이 너무도 간략하게 미션을 내놨다. 한마디로 지금 윤재구 회장을 따라 나서라는 얘긴데....애매한 게 그 애견이 언제 죽을 줄 알고....그때였다.
-노견 윤정식은 앞으로 30분 뒤에 죽습니다. 그리고 이 미션 역시 견신이 직접 내신 미션입니다.
‘견신이?’
그렇다면 또 얘기는 다르지. 나는 비통한 얼굴로 윤재구 회장에게 말했다.
“저어....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회장님의 애견을 제가 좀 볼 수 있을까요?”
“자네가?”
윤 회장은 역시 보통 늙은이가 아니었다. 갑자기 내가 자기 애견을 보겠다고 하니 의심스런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때 내가 말했다.
“당연히 제 애견도 데리고 갈 겁니다. 만약 제 애견이 새끼를 뱄다면, 남편의 마지막은 같이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보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 순전히 내 애견 엘베가 윤 회장의 애견의 최후를 지켜보게 해 주기 위해서 가는 거란 얘기였다. 이러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그, 그래 주겠나? 그렇다면 언제든 환영이지. 가세나.”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내가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자, 바로 경계심을 가지고 숨기고 있던 가시를 드러내는 윤재구 회장. 그렇지만 그에게 유리한 쪽으로 내가 얘기를 하자, 금세 드러낸 가시를 숨기는 거 좀 보라.
윤재구 회장이 다시 사람 좋은 얼굴로, 내 손까지 잡고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려 했다.
나는 그런 윤 회장의 손을 정중히 빼고 그에게 말했다.
“저는 제 애견 엘베를 데리고 가겠으니 먼저 가십시오.”
“아아. 맞다. 허허허허. 내 정신이 좀 없어서....그러시게. 가자.”
윤 회장은 자신의 경호원들과 같이 옆집으로 갔고, 나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정원을 산책 중이었던 유혜라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누군데요?”
“옆집 주인.”
유혜라에게 굳이 윤 회장에 대해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또 개 얘기 역시 마찬가지고.
“건물 뒤로 돌아 가 봤어?”
“아뇨. 아직....”
“가 봐. 거기 그네도 있어.”
“어머! 진짜요?”
“어. 그쪽에 화원도 있으니 천천히 둘러보고 와. 너 꽃 좋아하잖아.”
“같이 가요.”
“미안. 너도 봤지만 난 옆집에 좀 가봐야 해서....”
“아아. 뭐 어쩔 수 없죠. 그럼 그래요.”
눈치는 있는 유혜라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한 그녀가 곧장 건물 뒤쪽 정원으로 걸어갔고, 나도 별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옆집 주인이 뭐라던가요?”
들어가서 쉬라고 했는데, 더럽게 말을 안 듣는 어르신.
“옆집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내가 등까지 떠밀자 그제야 절뚝이며 자기가 쓰는 방으로 들어가는 어르신. 그런 그를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내 젓던 나는, 이내 엘베 방으로 향했다.
* * *
내가 엘베 방의 문을 열자마자 녀석이 짖었다. 물론 그 개 짖는 소리가 내게는 엘베가 말하는 사람 목소리로 들렸지만.
“그 늙은이지? 왜? 또 나를 사겠다고 온 거야? 이번에는 얼마 주겠데?”
“그런 얘기는 안 했어. 자기 애견 얘기를 하더라고.”
그러면서 나는 윤재구 회장에게 들은 얘기를 엘베에게 전부 말했다. 물론 윤재구 회장처럼 몇 분에 걸쳐서 길게 얘기한 건 아니고.
“그 놈이 곧 뒈진다고?”
“어. 그리고 그 늙은이, 내가 아는 사람이더라.”
“그래? 뭐 돈은 많아 보이더라.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한테 그 얘기를 하는 건데?”
눈치 9단인 엘베. 녀석은 내 속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너 좀 데리고 옆집에 갈까 해서.”
“그리곤?”
“뭐 가 봐야 알겠지만, 챙길 거 있으면 챙겨야지.”
내 그 말이 그럼 그렇지 하고, 엘베가 노구를 일으키며 말했다.
“보아하니 내가 따로 할 건 없어 보이고. 가만있기만 하면 되지?”
“그럼. 넌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으면 돼.”
그 말 후 나는 엘베를 안아들었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엘베의 무게감이 갈수록 작아지고 있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엘베를 안은 채 녀석의 방을 나섰다. 그리곤 별장 건물을 나왔고 정원에 대기 중이던 경호팀원들에 둘러싸인 채, 별장 밖으로 나간 나는 곧장 옆집으로 향했다.
옆집 대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고, 거기 대기 중인 윤 회장의 경호원이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내가 좀 전에 나온 별장과는 사뭇 다른 현대적 감각이 돋보이는 건물 내부로 들어선 나는, 대충 안을 훑어보고 경호원을 따라 내부로 쭉 들어갔다.
“저 방입니다.”
경호원은 윤 회장이 있는 방까지 나를 데려갔고, 그 방에 노크까지 해주었다.
“누구야?”
바로 방안에서 윤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경호원이 나 대신 대답을 했다.
“손님 오셨습니다.”
“들어와.”
윤 회장의 대답이 있자, 그 경호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아마도 내가 엘베를 안고 있다 보니 저러는 거 같은 데, 뭐 나야 편해서 좋았다. 내가 방 안에 들어서자, 윤 회장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어서 오게. 그 갠가? 자네 애견이. 이름이 엘베라고 했었지?”
늙은 생강이 괜히 맵겠나? 윤 회장은 늙어도 여전히 총명했다. 내가 흘리듯 말한 내 애견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니.
“네. 아침에 그 일 때문에 충격이 컸는지, 애가 영 힘이 없네요.”
엘베는 힘없이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윤 회장 입장에서야 자기 애견과 교배지, 내 입장에서 엘베는 윤 회장 애견에게 강간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크음. 면목 없네.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말이야. 하지만 보다 시피 녀석이 저러고 있으니, 나무랄 수도 없다네.”
윤 회장은 그 방 침대에 누워서 곧 죽을 듯 헐떡거리고 있는, 자신의 애견을 애처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내 머릿속에 또 견신 시스템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 * *
-추가 미션입니다. 노견 윤정식이 주인 윤재구에게 마지막 유언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완수 시 개지수 30포인트와 역 아이템과 역 스킬 각각 1회 이용권을 지급합니다.
‘뭐?’
이건 나보고 윤 회장의 애견에게 내 역 스킬 1회 이용권을 쓰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 대신 역 아이템 1회 이용권과 개지수 30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거고. 나로서는 무조건 이익인 추가 미션이었다.
견신 시스템도 내가 이 미션을 받아 드릴 거라 확신하는지, 할 건지 말건지 여부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애절한 눈으로 자신의 다 죽어 가는 애견을 쳐다보고 있는, 노구의 윤 회장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예전에 그에게 백준열이 당한 걸, 이번에 제대로 되갚아 줄 수 있을 거 같았다.
백준열이 알기로 윤 회장은 국내 대기업은 물론, 중견 기업에 꽤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TVM과 문성일보, 서진제약이 포함 되어 있었고. 그들 주식이 지금 내게는 꼭 필요했다.
‘일거양득!’
나는 한 가지 일을 해서, 두 가지 이익을 얻기 위해 윤재구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님. 만약에 회장님 애견과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회장님은 뭘 내 놓을 수 있습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 윤재구 회장. 그런 그에게 내가 다시 말을 이어했다.
“세상에는 기적 같은 일이 종종 일어나죠. 그 기적 같은 일이 회장님과 회장님 애견 사이에도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겠죠. 보아하니 회장님의 애견은 마지막 먼 길 떠나기 전에, 회장님과 할 얘기가 많아 보이는데, 회장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눈치라면 누구보다 빠른 양반이다. 내 말을 이해 못했을 리 없었다.
“만, 만약에 정식이와 얘기를 할 수 있다면....내가 가진 거 전부를 내 놓겠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윤재구 회장에게 있어서 저 애견은, 그의 자식보다 더 소중했다.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고, 또 100% 다 믿는 게 아니었다.
“놀랍군요. 회장님께 애견이 그렇게 소중한 존재였다니.”
“나를 이해해 준 유일한 존재니까. 그래서 자네가 한 말의 진의가 뭔가?”
“믿으실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허허허허. 자네 지금 나보고....그 특별한 능력이란 게, 개와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게 만들어 주는 거라고,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
“딩동댕! 맞습니다.”
“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윤재구 회장. 그런 그를 보고 내가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을 위해서 그 특별한 능력을 써 볼까 하는데....”
“물론 공짜는 아니겠지?”
“당연한 말씀을....”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자신의 애견 정식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급한 건 윤재구 회장이었고, 총명한 그는 그걸 알고 있었다.
“원, 원하는 게 뭔가?”
“회장님께서 보유하고 계신 주식 중, 4곳의 지분을 전부 저에게 전부 양도해 주십시오.”
“으음....”
내 말에 바로 표정이 살벌하게 변하는 윤재구 회장. 그런 그에게 내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이런....좀 전 저에게 하신 말씀은 다 농담이었나 봅니다? 애견을 위해서 가진 거 전부를 내 놓을 수 있다고 하더니. 제가 원한 건 회장님이 가지신 것에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만.”
“끄응....그 4곳이 어딘지 말해 보게.”
내 말을 끝까지 듣고 결정하겠다는 얘기였다.
‘역시 사람 얘기는 끝까지 들어봐야 해. 그리고 믿을 게 못 되고. 소중한 존재는 개뿔....’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윤재구 회장에게 내가 넘겨받았으면 하는 지분의 회사 이름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