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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강기석은 그 모습을 멀뚱히 쳐다만 봤다. 그러자 잠시 후 조연출이 강기석에게 쪼르르 뛰어왔다. 그리고 무슨 큰일이라도 터진 것처럼 떠벌렸다.
“아니. 여기 막사를 지으면 어쩝니까?”
하지만 강기석은 여기 PD와 조연출의 짜고 찍는 막장 연기에 넘어가 줄 정도로, 어리바리한 매니저가 아니었다.
“그러면 어디에 막사 짓습니까?”
“네?”
“출연 배우를 길바닥에 방치하더니, 이제 막사 챙겨 와서 쳐도 이 난리니 참....”
“배우는 무슨....조연 배우 주제에.”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아무리 이곳이 현장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좀 전 조연출을 해선 안 될 말을 내 뱉었다. 그걸 그대로 둘 강기석이 아니었다.
“조연 배우 주제에? 아아. 잘 됐네요. 우리 오진주 배우는 주제도 모르니까, 지금이라도 주제 파악하러 가겠습니다.”
“뭐, 뭐라고요?”
“어차피 출연 계약도 안 되어 있으니까, 바로 가도 되죠?”
가면 되기는 개뿔. 가면 좆 되는데? 아마 오늘 촬영 엉망이 될 테지.
“....”
강기석의 그 말에 할 말을 잃은 조연출이, 난감한 얼굴로 도와 달라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여기 PD가 길게 한숨을 내 쉬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
“오진주씨 매니저 입니까?”
“아네. 누구신지?”
강기석은 상대가 여기 PD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그가 누군지 물었다. 그러자 그가 자신을 자기 입으로 소개했다.
“저는 이번 단편드라마 ‘사랑해도 될까요?’의 PD인 남성목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감독님이셨군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말씀하신대로 오진주 배우의 매니저 강기석이라고 합니다.”
강기석은 당연히 명함을 건네야 함에도 명함첩을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대 PD도 그에게 명함을 주지 않는데, 그가 굳이 남성목PD에게 명함을 먼저 줄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막말로 여기서 오진주의 출연이 엎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고.
“저희 조연출이 말실수를 했습니다. 딱히 조연 배우를 비하하려고 한 말은 아니니,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강기석은 남PD가 조연출의 실수를, 이해 운운하면서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자, 바로 그 점을 꼬집었다.
“아니. 그 이해를 못하겠는데요?”
“네?”
보통 이 현장의 왕이나 마찬가지인 PD가 이해해 달라면 대부분 이해를 해 준다. 하지만 오진주의 매니저는 뭘 잘못 먹었는지, 감히 PD가 이해해 달라는 데 그걸 못하겠다고 하니, 이런 일이 처음인 남PD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말실수를 했으면 사과를 해야죠. 그 사과를 왜 PD님이 하시면서, 이해까지 해 달라시는 건지, 저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네요. 그리고 저희 오진주 배우, 단역 배우도 아닌데 왜 대기실도 없습니까? 혹시 조연 배우라서 그런 거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진주씨가 조연 배우라서, 어떤 불이익을 주거나 불편한 상황을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 참 말은 번드르르하게 하시네요.”
“뭐, 뭐라고요?”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 단역 배우 취급해서 계약 못하겠다고 했더니, 현장 오면 배우 출연 계약 해주겠다고 해서, 여기 왔는데 저기 조연출님이 떡하니 어제 그 단역 계약서를 내밀고, 조연 배우 차별하지 않는다면서, 조연 배우 쓸 대기실 하나 없고? 아니 이게 어떤 불이익을 주거나 불편한 상황을 만들 생각이 없으신 PD님이 할 짓입니까?”
“그, 그건....”
강기석 말이 틀린 게 없다보니, 남성목 PD도 조연출처럼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그에게 강기석이 단호하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 막사 치우고 갈까요? 아니면 오진주 배우 계속 출연 대기하고 있을까요?”
“그, 그야 출연 대기하고 있어야....”
“그럼 빨리 배우 출연 계약서 가지고 오시죠? 저희 오진주 배우 경력 10년 찹니다. 그런 배우에게 단역 일당제 계약서라니? 지금 장난칩니까?”
강기석이 오진주를 배우 연차로 밀어붙이자, 남PD도 더는 뭐라고 말 할 수가 없었다.
원래 배우는 등급에 따라 차등해서 출연료를 지급한다. 1에서 18까지 등급이 나뉘며, 등급이 높을수록 출연료도 높다.
참고로 1에서 5등급은 아역 배우 기준이고, 성인 배우의 경우 6등급에서 시작한다.
그런 등급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PD는 단역 배우 기준으로 오진주의 출연료를 지급하려 든 것이다.
보통 단역들은 5만원에서 10만원, 많아야 20만원을 받았다. 계약서에 보니까 남PD는 오진주를 하루 10만원에 쓰려 들었다. 신인 배우도 회당 50만원을 받는데 말이다.
‘완전 도둑놈 심보지.’
강기석이 언성을 높이면서 그들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남PD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배우 출연 계약서 다시 보낼 테니, 사인해서 여기 조연출에게 주세요.”
남PD가 못 이기는 척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강기석의 눈에는, 그런 남PD가 지금의 이 위기만 넘기고 보자는 식의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요. PD님.”
“또 뭐요? 그쪽 말대로 배우 출연 계약 해 준다는데?”
버럭 신경질을 내는 남PD. 자기 말에 꼬박꼬박 토를 달면서 옳은 소리만 해대는 강기석이, 남PD는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강기석도 마찬가지였다.
“말만 그래 놓고 가버리면 그만입니까?”
“뭐, 뭐라고? 그 말은 지금 내가 당신에게 사기라도 치고 있단 거야?”
남PD가 발끈했다. 자기 입으로 분명히 얘기를 했는데 상대가 그 말을 못 믿겠다는 건데, 그게 감히 PD에게 할 소리란 말인가?
“누가 사기 치고 있다고 했습니까? 배우 출연 계약서를 보내겠다는 분이, 정작 그 배우와 출연료 협상도 없이 가시겠다니 하는 말 아닙니까? 계약금 공란으로 보내시면, 거기 우리가 원하는 출연료를 적는 거면 저도 좋습니다만.”
“이이....”
이번에도 강기석의 말이 맞았다. 남PD는 애초에 오진주에게 배우 출연 계약을 해 줄 생각이 없었다. 말만 그래놓고 시간 질질 끌면서 오늘을 넘기고, 또 내일을 넘기고 나면, 마지막 날에 단역 출연료라도 받으려면 계약서 사인하는 거고, 싫으면 말면 그만이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지금 계약서 가져 오지 않으면 우린 갈 겁니다.”
강기석의 그 말에 남PD와 조연출이 같이 피식 거리며 웃었다.
“어디 그래 봐. 오진주가 출연할 수 있는 드라마는 없을 테니까.”
“지금 저희 오진주 배우를 KVS에서 보이콧 하겠다는 겁니까?”
“....”
남PD와 조연출은 대답 대신 강기석을 비웃었다. 그러자 강기석이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도 회사 차원에서, KVS측에 강경하게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강기석의 그 말이 뭐가 그리 웃기는 지 남PD와 조연출이 다 같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다 남PD가 강기석에게 말했다.
“크크크크큭. 아이고 배야. 그래. 마음대로 해 봐. QH엔터 따위가 우리 회사에 뭘 어떻게 할지 두고 보자고.”
그때였다. 강기석이 그런 남PD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와 오진주 배우의 소속사는 QH엔터가 아닙니다.”
“뭐?”
“저희는....”
강기석이 그제야 호주머니 속에서 명함첩을 꺼내서, 그 명함첩 안의 명함 한 장을 빼내서, 남성목PD에게 건네며 말했다.
“JYB엔터테인먼트 소속 매니저와 배우입니다만.”
“뭐, 뭐라고요?”
강기석의 JYB엔터라는 말에, 줄곧 반말을 하던 남PD가 갑자기 말을 높였다.
그러면서 강기석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그가 건네고 있는 명함을 받아서 자세히 살폈다. 그랬더니 명함에, 강기석이 JYB엔터 소속 매니저 파트 3팀장이라고 떡하니 적혀 있었다.
* * *
사실 연예계에서 방송사가 갑甲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예외인 경우가 있었으니, 바로 탑 스타다.
그들은 방송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탑 스타를 다수 보유한 연예기획사는 어떨까? 당연히 방송사에서는 그 연예기획사의 눈치를 봐야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방송사들이 가장 눈치를 보는 연예기획사를 꼽으라면....단연 1위는 JYB엔터다.
거기는 많은 탑 스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엄청난 자금력을 자랑했다.
쉽게 말해 돈지랄로 방송사를 질리게 만들 수 있는 곳이 JYB엔터였다.
그 말은 방송사가 제작비나 출연료 가지고, JYB엔터에 그 어떤 압력도 행사 할 수 없다는 소리다.
반대로 JYB엔터에서는 출연 연예인들을 빼버려서, 그 방송사를 좆 되게 만들어 버릴 수 있었고.
그러니 방송사에서는 절대 JYB엔터는 건드리지 말라는 얘기를, 특히 일선 PD들에게 매번 주지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남성목PD가 그 JYB엔터라는 역린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그것도 JYB엔터 직원과 배우를 동시에.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QH엔터 소속이라며?”
남PD의 분노가 일순간 조연출에게로 옮겨갔다. 그러자 당황한 조연출이 다급히 말했다.
“분, 분명히 QH엔터 소속이라고 했는데? 작, 작가님한테 물어 보십시오.”
“물어보긴 뭘 물어? 그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남성목은 차마 강기석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이걸 어쩌나하고 열심히 잔머리를 굴렸다.
이 일이 비화가 되어서 JYB엔터에서 문제라도 재기하면, 좆 되는 건 자기 뿐이었다.
KVS의 윗분들은 어떡하든 이 일이 확대되는 걸 막기 위해서, 틀림없이 꼬리 자르기를 할 텐데, 그 꼬리가 바로 남성목 자신일 건 뻔했다.
‘C발. 하필 JYB엔터라니....’
진즉 오진주가 JYB엔터 소속 연예인인 줄 알았으면, 단역 배우 계약서 같은 건 보내지도 않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남성목도 지금은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때 촬영 팀의 스태프 하나가 달려와서 그에게 말했다.
“감독님. 씬#15 촬영 준비 끝났습니다.”
“그, 그래?”
“네. 촬영감독님께서 어서 오시랍니다.”
“알았어. 갈게.”
야외 촬영의 첫 씬 촬영이 시작 되려 하고 있었다. 남성목을 그걸 핑계 대며 강기석에게 말했다.
“서로 오해가 좀 있는 거 같은데 그건 차차 풀기로 하고, 오진주 배우는 특별히 4등급에 해당하는 출연료로 책정해서, 계약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촬영하러 가야 해서 이만....”
남성목 PD가 오진주의 배우 출연 계약서에 대해 명확하게 출연료를 확정짓고 가자, 강기석도 더는 남PD를 붙잡지 않았다.
“4등급이라....쩝쩝쩝.”
대신 강기석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럴 것이 연기 10년 차인 오진주를 두고, 남성목 PD도 출연료를 4등급으로 책정한 걸 두고, 자기가 무슨 선심 쓴 거처럼 얘기하지 않던가?
그 만큼 조연 배우에 대한 방송국의 처우는 여전히 박하고 짰다.
“진주야. 한방이다. 한방.”
그 한방만 제대로 터진다면, 오진주도 탑 스타가 되어서 배우 등급 외의 출연료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PD 따위가 아닌 최소 CP, 아니면 드라마 국장과 직접 출연료를 두고 협상을 벌일 수 있는, 그 날이 곧 올 거라고 강기석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KVS 2TV에서 방영 될 예정인 단편드라마 ‘사랑해도 될까요?’는, 시크한 성격의 방송국 PD와 발랄한 리포터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코믹하고도 사랑스럽게 그려낸 로맨틱 코미디였다.
이 작품은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처음 만나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된 두 남녀가 2주 후, 방송국에서 동료로 재회하여 토닥거리다가, 결국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었는데, 주연으로 나선 두 남녀 배우는, 드라마 쪽으로 상당히 인지도가 높은 배우들이었다.
촬영은 그 두 배우가 야외 결혼식장에서 서로 엇갈리는 씬 부터 시작해서, 피로연이 열리는 연회장에 이르기까지 쭉 이어서, 착착 찍어 나갔다.
그래도 주말 드라마를 오래 찍어선지 남PD의 연출능력을 뛰어났고, 금방 오진주가 출연해야 하는 씬의 촬영에 들어갔다.
“이번 씬은 테이크는 여러 번 나눠서 찍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이 대목에서 감정 씬이 중요하거든요.”
그 말 후 남PD가 오진주를 보고 준비가 되었는지 물었고, 오진주가 됐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PD가 카메라 감독과 사운드 담당 붐 마이크 스태프, 조명 담당 스태프와 사인을 주고받은 뒤 조연출에게 말했다.
“스탠바이!”
그러자 조연출이 슬레이트를 들고 앞으로 나섰고 남성목 PD가 외쳤다.
“큐!”
딱!
슬레이트 치는 소리와 동시에, 오진주가 두 눈을 부릅뜬 체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 남자에요. 저 남자가 그랬어요.”
그 말 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오진주의 얼굴 표정을, ENG 카메라가 정면과 좌우에서 찍었다. 그걸 모니터 하던 남PD의 입 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그 뒤 오진주의 대사 연기가 시작 되었고, 주연 여배우와 환상의 케미를 자랑하며 호연을 펼쳤고, 그런 그녀를 보고 촬영 팀 스태프들이 다들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건 뭐....NG 같은 건 내지도 않는 군.”
카메라 감독의 말에 남PD도 동의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만큼 남PD도 오진주의 연기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컷! 여기까지 하고, 점심들 먹고 야외 마지막 씬 #22 찍은 다음, 스튜디오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남PD의 외침에 스태프와 연기자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짝!
오전 촬영을 무사히 끝냈고, 또 즐거운 점심시간이 찾아왔으니까.
“진주야. 수고 했어.”
그때 대기 중이던 강기석과 박 코디가 오진주를 챙겨서, 어딘가로 이동하는 모습을 남PD가 쳐다보다가 조연출을 불러서 물었다.
“계약서는?”
“받았습니다.”
“휴우....”
조연출의 대답에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 쉰 남PD. 그가 호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작가인 양미경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