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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작은 연예기획사에는 스타크래프트벤이 없다. 중소형 연예기획사 중에서, 탑스타 급 연예인을 보유한 곳의 경우, 간혹 스타크래프트벤을 쓰긴 하는데, 그 탑 스타가 일이 없을 때는 공용차로 썼다.
그만큼 스타크래프트벤은 차 값도 비싸지만 유지, 운영비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그런 스타크래프트벤을 매니저에게 척척 내 줄 정도로, JYB엔터의 자금력은 대단했고, 그 돈지랄이 곧 JYB엔터가, 국내 최고 연예기획사라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즉 연예계의 그 누구도 JYB엔터 소속 연예인과, 그곳 직원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게끔, 은연 중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던 것.
“쩝쩝쩝....김밥 진짜 맛있다.”
“그렇죠? 김치와 어묵만 넣었는데도 맛있더라고요. 히히.”
오진주는 자신이 싼 김밥을 매니저인 강기석이 맛있게 먹어주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근데 오진주는 손맛이 좋아서 뭘 만들어도 맛이 있었다. 사실 김밥에 김치와 어묵만 넣어서 ,이 맛을 내는 건 쉽지 않았다. 입맛이 까다로운 편인 강기석도, 정말 맛있게 오진주가 싼 김밥 한 줄을 금방 먹어치웠다.
“오빠. 여기 물.”
“어. 고마워.”
이른 아침이라 차도 거의 막히지 않는 가운데, 운전 중인 강기석은 제법 여유 있게 김밥을 먹고 물을 마셨다.
빈속이 채워지자 기분이 좋아진 강기석이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힐끗 백미러를 통해 뒤를 봤는데, 오진주가 대본을 집중해서 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좁아터지고 불편한 승합차 뒷자리와 달리, 스타크래프트벤의 중앙에 연예인 혼자 앉는 스페셜한 자리는 딱 봐도 너무너무 편안해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웃게 되는 강기석.
그렇게 오진주를 태운, 강기석이 모는 스타크래프트벤은 열심히 달려서, 오늘 KVS 단편드라마 촬영이 있는 야외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당연히 주차할 곳이 없어서, 촬영장에서 300미터는 족히 떨어진 유료 주자창에 차를 주차 시킨 강기석.
아무래도 비싼 스타크래프트벤을 길가에 아무렇게나 대 놓을 수는 없었다.
회사에서 매니저에게 스타크래프트벤을 내 주었을 때, 그 차에 대한 책임도 지게 만들었으니까. 차에 스크래치가 나거나 찌그러지면 그 수리에 대한 변상은 매니저 몫이었다.
“진주야. 미안. 촬영장까지 걸어가야겠다.”
“괜찮아요. 촬영 장 바로 저기 있네. 뭐.”
현장 여건상 이보다 더한 경우도 많았다. 차에서 내린 오진주는 바로 촬영 현장으로 가려는 강기석을 보고 말했다.
“오빠. 내 짐은요?”
그 말에 강기석이 ‘아차’하면서도, 정작 짐을 빼러 차 뒤로 움직이지 않고, 오진주를 보고 말했다.
“김밥 먹느라 깜빡했다. 너 앞으로 옷과 화장품 가지고 다닐 필요 없어.”
“네?”
그게 무슨 소리냐며 강기석을 빤히 쳐다보는 오진주.
“너 전속 코디가 곧 올 거야. 네 옷과 화장품 세트 가지고 말이야.”
오진주는 매니저에 이어서 자신에게 전속 코디도 붙을 거라는 강기석의 말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러니 제가 탑 스타가 된 기분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오진주를 보고 강기석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무슨 소리야? 너 곧 탑 스타가 될 건데.”
“오빠도 참....”
강기석의 말에 무안해 하면서도, 기분 좋은 듯 오진주의 상기된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 * *
촬영 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강기석과 오진주의 분위기는 좋았다. 한데 현장에 도착해서 그곳 스태프에게 출연자 대기실을 묻던 강기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냐하면 그 스태프가 가리킨 곳에 지어진 임시 막사는 단 하나.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강기석이 아니었다.
“주연 배우들 대기실만 만든 겁니까?”
“네. 뭐....”
현장 스태프는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며 힐끗 강기석을 째려보고는, 자기 할 일을 하러 가버렸다. 그런 강기석 옆의 오진주가 오히려 매니저인 그를 달래며 말했다.
“야외 촬영에서 흔한 일이잖아. 거기다 여긴 단편드라마 촬영장이고.”
이해하려면 이해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딱 봐도 이곳 현장은 한번 이해해 주면, 더 많은 이해를 요구할 곳이었다.
강기석이 왜 그렇게 생각했냐하면, 자기들 촬영 팀을 위해 임시 막사가 두 개나 지어져 있는 걸 보고서 말이다.
한마디로 KVS방송국 쪽 관계자들은, 자기들이 알아서들 잘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안 되겠다.”
강기석은 갑자기 어딘가로 연락을 했다. 그때 이번 단편드라마 조연출이 오진주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오진주씨죠?”
“네. 그런데요?”
“출연 계약서 아직 작성 안하셨죠? 여기....”
조연출이 대뜸 오진주에게 계약서를 건넸다. 오진주가 그걸 받자 조연출이 자기 할 말을 재빨리 말했다.
“거기 사인하셔서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저에게 주세요.”
그 말 후 바로 뒤돌아서 가려는 조연출을 강기석이 붙잡았다.
“잠시 만요.”
강기석은 오진주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받아서 대충 계약서 내용을 살폈다. 그랬더니 어제 단편드라마 작가에게서 받았던, 그 허술한 계약서와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계약서였다.
“이거 도로 가져가세요.”
“네?”
조연출은 자신이 오진주에게 건넨 계약서를 강기석이 그에게 내밀자, 어이 없어하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 그에게 강기석이 확실하게 얘기했다.
“어제도 얘기했는데, 배우 출연 계약서가 아닌 단역 계약서를 왜 자꾸 주는지 모르겠네요. PD님 어디 있습니까?”
강기석이 대 놓고 PD를 찾자, 조연출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뭘 모르시나 본데. 연기자가 주연급이 아닌 한, 현장에서 PD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촬영 할 때 말고는.”
한마디로 조연급인 너희가 만나자고 한다고 만나 줄 PD가 아니란 소리였다.
“그럼 촬영할 때 만나서 얘기 하죠.”
“뭐 이런 미친....”
조연출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어디, 니 마음대로 해보란 듯 뒤돌아가 버렸다. 강기석이 가져가라고 한 계약서는 챙겨 가지도 않고 말이다.
휙!
그래서 강기석은 그 계약서를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걸 또 조연출이 본 모양이었다.
“이봐. 당신 무슨....”
“가자.”
하지만 강기석은 조연출 따윈 상대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오진주를 데리고 촬영장 한쪽으로 가버렸다.
* * *
KVS방송국의 드라마 제작국 소속 남성목PD는, 드라마국장으로부터 단편드라마 제대로 한편 찍고 나면, 수목 미니시리즈의 연출을 맡기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단편드라마 찍는 거야 쉽지.”
주말드라마 조연출만 5번을 한 그였다. 단편드라마 한편 찍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나름 인맥을 잘 갖추고 있었던 그는, 괜찮은 작가의 대본에다가 출연진까지 다 섭외하며, 이제 촬영만을 눈앞에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런데 촬영 이틀 전에 조연급 배우하나가 사고를 치면서, 그 배역을 다시 구해야만했다. 근데 하필 그 배역이 감정 연기가 제대로 되어야만 소화가 가능했고,
그 때문에 그 배역을 맡길 조연 배우 섭외도, 주연배우 섭외만큼이나 신경을 썼던 남성목PD였다. 그렇다보니 그만한 조연 배우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작가 쪽에서 다행스럽게 그런 배우를 찾아냈다고 했다.
“QH엔터에 오진주? 처음 들어 보는데?”
하지만 오디션 본 영상에 그 배우의 연기를 보,고 남PD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물론 100%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만한 배우를 찾기도 쉽지 않다는 건, 이 바닥의 남PD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바로 OK한 거고. 그런데 그 배우 계약에서 트러블이 생겼다.
“제가 준 계약서 조건으로는 사인할 수 없다고 나온다고요? 아니. 자기가 무슨 유명 배우라도 된 줄 아나?”
무명 배우를 이렇게 써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할 것이지 말이다. 하지만 급한 건 이쪽이었고, 남PD는 꼼수를 부렸다.
“현장에서 계약하자고 하세요.”
남PD도 선배 PD들에게 배운 방식인데, 별거 아닌 배우들에게 PD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려주고, 또 싸게 계약도 하고. 일석이조의 방법이긴 한데 이걸 써 먹고 나면, 그 다음부터 그 배우와는 같이 일을 할 수 없었다.
배우도 인간인데 그런 모욕에다가, 출연료까지 일당으로 받았는데, 그런 PD랑 같이 일을 하고 싶겠나?
“뭐 상관없지. 널린 게 배운데.”
남PD는 오진주라는 배우와 이번 단편드라마만 같이 찍고, 다시는 안 봐도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다. 그의 말처럼 오진주 같은 조연 배우야,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 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 되면서, 정신없이 바빠진 남PD는 오진주란 배우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랬는데 촬영이 곧 시작 되려는 마당에, 조연출이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왜? 뭐가 문젠데?”
“그 오진준가 뭔가 하는 배우 있잖아요?”
“아아. 최영주 역할 말이야? 계약서 받았어?”
“아뇨.”
“뭐?”
“그 배우 옆에 매니저가 글쎄....”
조연출의 얘기를 전부 듣고 난 남PD의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PD를 좆밥으로 보내?”
촬영 현장에서는 PD가 곧 왕이었다. 그런 왕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려 놓았으니 오진주와 그 매니저는 이제 좆 됐다고 보면 됐다.
조연출은 촬영 시작하자마자 남PD가 미쳐 날 뛰는 모습을 보겠구나 생각하면서, 감히 자신이 건넨 계약서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그 오진주의 매니저가 남PD 앞에서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 * *
강기석은 오진주를 데리고 도로 차로 갈까 하다가 말았다. 오늘 만나기로 한 코디가 여기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서 말이다.
“어? 박 코디?”
근데 그 코디가 강기석이 잘 아는 코디였다. 놀란 강기석과 달리 박 코디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강기석에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지?”
“그러게. 근데 너 최유라 전속 아니었어?”
“유라 그년 성질머리 어디 가겠어? 대판 싸우고 나와 버렸지.”
최유라는 주로 영화를 위주로 찍는 여배운데, 탑 스타라고 하기에는 인지도가 좀 부족한, 그래도 영화판에서는 확실한 주연급 배우였다. 술, 담배를 좋아하고 성격도 괄괄해서, 트러블 메이커로 유명했다.
그런 최유라와 5년을 같이 일했으니, 박 코디도 참 대단했다. 물론 실력만큼은 확실했다.
까다로운 최유라를 만족시키는 코디가, 그리 흔치 않은 데 말이다.
지이이이잉!
그때 박 코디 손에 쥐어진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바로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종료버튼을 눌러버렸다.
“누군데?”
궁금해서 묻기보다 갑자기 나타난 박 코디가 어색해서, 강기석이 물었는데 그걸 또 사실대로 대답하는 박 코디.
“최유라.”
“에?”
“돌아오라고. 하지만 이제 진짜 못가.”
“왜?”
“김 실장하고 계약해 버렸거든.”
박 코디의 그 말에 그제야 강기석이 환하게 웃었다. 보아하니 실력 있는 박 코디를 발견한 김효석 실장이, 그녀와 전속 계약을 체결한 모양이었다.
“내가 맡을 배우가 저 애야?”
박 코디가 눈빛을 빛내며 오진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그리곤 강기석에게 물었다.
“대기실은?”
“그게....”
강기석이 대충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이보다 더한 현장에서도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박 코디였다. 강기석의 말을 듣자마자, 상황 파악이 된 듯 두 사람에게 말했다.
“강 매니저 말대로 소속사에서 지원오기 전까지, 일단 메이크업부터 하자고.”
“하지만 메이크업 할 자리가....”
“자리야 만들면 되고.”
박 코디는 주위를 훑어보다가 안 쓰는 간이 의자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걸 챙겨서 한쪽에 놓고 오진주에게 말했다.
“여기 앉아.”
오진주는 박 코디가 시키는 대로 그 간의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박 코디가 들고 온 화장품 세트를 열고, 본격적으로 오진주의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냥 길바닥에서, 누가 보던 말든 상관없이 오진주에게 능숙하게 화장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건 진짜 노련한 코디네이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박 코디가 오진주의 메이크업을 거의 다 끝내 갈 무렵, 강기석이 요청한 소속사 지원팀이 도착했다.
“여기 칠 까요?”
“네.”
강기석은 이왕 박 코디와 오진주가 자리 잡은 곳에, 오진주 전용 막사를 설치하게 했다.
말 그대로 간이 막사다 보니, 소속사 지원팀원들이 달라붙자, 10분도 안 돼서 뚝딱 만들어졌다.
“이제 들어가서 하시죠. 박 코디님.”
그렇게 박 코디와 오진주를 막사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서 강기석은 지원 온 소속사 지원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자 지원팀에서 이게 그들이 하는 일이라며, 가급적 촬영이 끝나기 전에 연락 달라고 했다. 설치도 그들이 했지만 철수 하는 것도 그들 일이라면서.
* * *
잘되는 회사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강기석이 보기에 JYB엔터가 왜 요즘 잘나가는지는, 여기 있는 소속사 지원팀만 봐도 알 거 같았다.
강기석이 알기로 국내 연예기획사들 중에, 특히 대형기획사에서도 지원팀은 두고 있지만, 이런 식의 현장 지원은 하지 않는다. 해 봐야 기존 인력에 손을 거드는 정도지 말이다. 강기석은 이런 좋은 회사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소속사 지원팀을 보내고, 강기석이 막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였다.
“누구 마음대로 여기 막사 지으라고 했어?”
날선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고, 강기석은 몸을 돌려서 그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딱 봐도 PD같아 보이는 30대 중후반의 남자가, 아까 오진주에게 계약서를 건넸던 조연출에게 생 지랄을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