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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360화 (3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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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 소유의 삼청동 저택에, 사실상 감금된 상태인 서지현, 백지연 모녀.

두 사람은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모母는 백승렬 회장의 법적 아내였고, 녀女는 딸이었다.

하지만 오늘부터 두 사람은, 백승렬 회장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굳이 따진다면 서지현은 이혼한 전처고, 딸인 백지연은 호적에서 파인 처지랄까?

그래서 백지연은 지금 모친의 성을 따라 서지연이 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혼하고 호적 정리하는 데 수개월, 혹은 몇 년의 시간도 걸리는데, 이들 모녀는 불과 이틀 만에 그게 다 정리가 됐다.

그만큼 삼명그룹의 영향력, 아니 백 회장의 힘이, 이 땅에서 얼마나 강한지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미치겠네. 쇼핑 좀 하겠다는 데 그것도 안 돼?”“사모, 아니 서지연님. 쇼핑은 공항 면세점에서 하시면 됩니다.”

오늘도 서지연이 삼청동 저택을 지키는 경호팀장과 티격태격 거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오늘 미국으로 갔어야 할 모녀였다. 하지만 비자 문제가 꼬이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모친인 서지현은 이럴 바에야, 차라리 미국 가서 하고 싶은 거 맘껏 하고 사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그 딸인 서지연은 달랐다.

막상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미국에 가려니 두렵고 무서웠다. 그녀도 막상 백지연에서 서지연이 되고 나니 깨달은 것이다.

삼명 그룹이란 든든한 울타리와 시원한 그늘이 사라지고 나자, 그 동안 체감하지 못한 각종 차별들과 그 동안 그녀가 당연하게 누려온 각종 혜택들의 부재가 그녀의 삶을 너무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미국은 어떻겠는가? 물론 도전을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힘들지 예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두렵고 무서울 밖에. 그래서 서지연은 마지막 몸부림을 쳐보기로 했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죠?”

“네?”

“그 사람과 만나고 싶은데. 그게 어려우면 통화도 좋고요.”

“잠시만....”

서지연의 요구에 경호팀원이 경호팀장에게 그 사실을 얘기했고, 잠시 뒤 경호팀장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곳에서 경호팀장의 역할은, 두 모녀를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지키는 것뿐이었다. 결국 서지연이 말한 책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경호팀장이 직접 지시를 받은 진짜 책임자인 비서실장에게 연락을 취했고, 서지연은 삼명그룹 비서실장 이동훈과 통화를 할 수 있게 됐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이동훈 실장의 영혼 없는 목소리가 들리고, 서지연이 바로 그에게 물었다.

“제가 한국에서 계속 살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을까요?”

그러가 이동훈 실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회장님이 그걸 받아드리지 않으실 테니까요.

“그 말은 회장님만 설득하면 된다는 건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백승렬 회장은 한 번 아니면 아니었다. 그걸 잘 아는 서지연과 이동훈. 하지만 인간이기에 예외는 있었다.

“아버지, 아니 백 회장님의 고집은 아무도 못 꺾죠. 하지만 준열이라면 가능할 거 같은데?”

-....

서지연이 제대로 그 예외를 찍은 거 같았다. 이동훈이 아무 말 없자, 자신이 제대로 맥을 짚었다고 여긴 서지연이 그에게 부탁을 했다.

“실장님. 저는 한국에 남고 싶어요. 그리고 삼명 호텔을 계속 맡아서 경영하고 싶고. 저를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왜 그래야 할까요?

다소 시니컬(cynical)하게도 들리는 이동훈의 목소리. 하지만 지금 서지연은 철저한 을乙의 입장이었고, 삼명 호텔에 대한 미련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백승렬 회장에게 자신이 대표가 아니어도 좋으니, 삼명 호텔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한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애원은 백승렬 회장이 아니라 백준열에게 해야 할 거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 생각에, 지금의 백승렬 회장의 결정의 되돌릴 수 있는 존재는, 백준열 뿐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일단 이 저택부터 나가야 했다.

“제가 어릴 때 실장님이 그러셨죠? 여자라고 꿀릴 거 없다고요.”

-그, 그걸 기억하고 있었군요.

서지연이 10살 때였던가? 그녀가 위에 두 오빠들에게 치여서 힘들어 할 때, 당시 삼명家 본가 저택을 드나들던 비서 중 한 명이, 그녀에게 특이한 말을 했었다.

다들 여자인 네가 참으라고 했는데, 그 비서만 꿀릴 거 없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서지연은 그 말과 그 말을 한 그 비서 이름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비서 이름은 이동훈, 근데 그 이동훈이 지금의 비서실장이라니....’

서지연의 입장에서는 이건 정말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비록 십 수 년 전의 감성 팔이 이었지만, 이게 또 갑甲의 입장에서 보면 들어 줄 수도 있는 사소한 일이었다. 그러니 먹힐 공산이 크다고 봤는데....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상대로부터 드디어 그녀가 원하는 말이 나왔다.

‘됐다!’

서지연은 속으로 쾌재를 외치며, 이동훈 실장에게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하기 시작했다.

* * *

백승렬 회장이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한 막내아들 백준열.

이동훈은 그런 백준열을 보좌해서, 앞으로 20-30년은 삼명그룹을 이끌어 나가야 했다.

당연히 둘의 합이 중요한데, 이동훈은 최근 많이 바뀌었다는 백준열이 많이 껄끄러웠다.

모자라는 거야 자신이 얼마든지 채워 주면 되는데, 백준열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너무 유능했다. 아마도 그게 문제인 거 같았다.

“이번 주는 어렵겠고. 다음 주 초에는 만나서 제대로 얘기를 해 봐야겠군.”

이동훈은 자신의 스케줄로 이미 빽빽한 일정표를 보며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삼청동 저택의 경호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뭡니까?”

-실장님. 여기 아가씨, 아니 서지연씨가 실장님과 통화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와요? 으음....지금 옆에 있습니까?”

-네.

“그럼 바꿔주세요.”

그렇게 별 생각 없이 서지연과 통화를 시작한 이동훈. 그는 자신이 삼명가 본가를 들락날락 거렸던 젊은 시절, 위에 두 오빠에게 치여서 울고 있던, 당시 백지연에게 멋모르고 한 조언을 그녀가 기억하고 있자, 살짝 감동을 받았다.

거기다 졸지에 서지연이 되어버린 그녀에 대한 연민도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하는 부탁을 들어주고 말았다.

“대신 2시간입니다. 그 시간 안에 백준열 대표를 만나지 못한다면....포기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럴게요. 그때는 저도 깨끗이 포기하고 미국으로 갈게요.

서지연이 순순히 자신의 제안을 받아드리니, 이제 와서 그녀의 부탁을 저버릴 수도 없게 된 이동훈. 그는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그 바쁜 백준열을 서지연이 무슨 수로 만나? 설혹 만난다 치더라도, 평소 사이가 좋지도 않았던 그녀를, 백준열이 도와 줄 이유도 없고....’

이때까지만 해도 이동훈은, 서지연이 무조건 모친을 따라서 미국으로 건너가 살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경호팀장 바꿔 봐요.”

그렇게 서지연과 얘기를 끝낸 뒤, 이동훈은 삼청동 저택의 경호팀장에게 얘기해서, 서지연을 밖으로 나가게 해 주라고 했다.

“네? 하지만....”

-딱 두 시간입니다. 당연히 그녀 주위로 저희쪽 경호팀원이 따라 붙어야겠지요.

경호팀장은 비서실장이 왜 이런 번잡한 짓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삼명그룹의 새로운 실세인, 이동훈 실장이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나?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동훈 비서실장과 얘기를 끝낸 경호팀장이 서지연을 보고 말했다.

“10분 뒤에 나갈 테니까, 그때까지 외출 준비해서 마당으로 나오십시오. 사모, 아니 모친께는 가급적 들키지 않게 조심해 주시고요.”

안 그래도 못 나가서 환장인 모친이었다. 그런데 서지연이 나간다고 해 봐라. 자기도 따라 나가겠다고 생난리를 떨 터였다. 그러면 자칫 서지연 자신도 못 나갈지 몰랐다.

“걱정 마세요. 조심할 테니까.”

그렇게 모친 몰래 외출 준비를 끝낸 서지연. 그녀가 10분 뒤 마당에 나오자, 경호팀장이 그녀를 경호할, 4명의 경호팀원에게 그녀를 소개 시킨 뒤, 그녀의 외출을 비로소 허락했다.

“정확히 두 시간입니다. 두 시간 뒤에, 너희들은 서지연씨를 무조건 여기로 모시고 와야 한다.”

“네. 팀장님.”

말은 안하고 있지만 4명의 경호원들도, 저택 밖에 나가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다들 표정들이 밝은 걸 보면 말이다. 하긴 그들도 두 모녀들처럼 며칠 째 저택 안에만 갇혀 지냈으니....

잠시 후, 서지연과 4명의 경호원들이 삼청동 저택을 나왔다.

* * *

서지연은 이왕 대 놓고 감시 받는 거, 경호원들을 철저히 이용해 먹기로 했다.

“핸드폰 좀 줘보고, JYB엔터로 가줘요.”

팀장이 서지연에게 가급적 협조해 주라는 말을 한 터라, 그녀가 하는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던 경호원들. 그래서 서지연에게 한 경호팀원이 자기 핸드폰을 넘겼고, 또 경호 차량에 그녀를 태우고 JYB엔터 본사로 향했다.

이대로 JYB엔터에 가서 백준열을 만나겠다고 하면, 그녀가 백준열을 만날 수 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백준열이 아예 JYB엔터에 없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JYB엔터의 대표실로 전화를 걸었다.

-네. JYB엔터 대표실입니다.

그러자 백준열의 비서가 그 전화를 받았다.

“나 백지연인데 준열이 거기 있어?”

지금 그녀는 서지연이지만 그걸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지금 이 모양이 꼴이 된 건, 몇몇 사람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백준열의 비서 따위가 그걸 알 리 없으니 예전처럼 굴어도 됐다.

-네. 대표님께서는 대표실에 계십니다. 연결 해 드릴까요?

역시나 그녀 생각대로였다. 하지만 이대로 백준열을 바꿔 달라고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백준열은 그녀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

“아니. 됐어. 생각해 보니 급한 일도 아니네. 이따 집에서 얘기 할게.”

그렇게 말하고 통화를 끝낸 서지연. 이로서 백준열이 JYB엔터에 있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이제 어떻게 백준열을 만날지를 두고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아는 한 이렇게 무작정 회사로 찾아가서 만나달라고 하면, 순순히 만나 줄 백준열이 아니었다.

뭔가 녀석의 귀가 솔깃한 정보나 이슈꺼리를 들고 가지 않는 한, 녀석은 그녀를 절대 만나 주지 않을 거다.

“뭐가 좋을까?”

차 안에서 서지연은 계속 생각을 했다. 머리에 쥐가 다 나도록 말이다.

그때 차가 잠깐 신호에 걸려 섰고 서지연은 차창 밖의 인도로 다정하게 팔짱끼고 지나가는 연인을 봤다.

뭐가 좋은 지 둘 다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쌍의 커플이었다.

“아아. 그래. 여자!”

서지연이 알기로 백준열이 관심 있는 건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돈이고 또 하나는 여자.

녀석이 삼명그룹 회장 자리를 노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돈 때문이었고, 엔터테인먼트社를 차린 건 여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삼명 호텔 대표 자리에서 쫓겨난 서지연이 백준열을 돈으로 설득시키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여자인데....

“녀석이 우리 호텔 광고 모델인 임윤지를 그렇게 좋아했었지.”

그 말을 하며 서지연의 입 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백준열이 솔깃할 만한 걸 드디어 찾은 것 같았다.

* * *

백준열이 좋아한다고 해도, 임윤지는 재벌 3세라고 해서 손 델 수 있는 그런 연예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 아버지가 대법관이고, 그녀 어머니는 화송그룹 강성범 회장의 차녀이자, 화송백화점 대표인 강성희였으니까. 임윤지의 부친 되는 임민욱은 차기 대법원장이 유력한 인물이었다.

소위 말해서 임윤지의 친가와 외가는 권력과 돈을 다 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임윤지는 다이아몬드 수저로 태어 난데다가, 외모까지 완벽하니 그녀와 결혼 하고 싶어 하는, 재벌가의 남자들이 줄을 선 상황.

근데 그 임윤지가 유독 서지연을 잘 따랐다. 외동으로 큰 그녀에게 서지연은 언니 같은 존재랄까?

서지연이 삼명 호텔 광고 모텔로 그녀를 발탁하고 임윤지를 처음 만난 날, 둘은 첫눈에 반해 친해졌고, 그 뒤로 사적으로도 종종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며칠 전 외조부 장례식에도, 임윤지가 직접 와서 조문을 하고 한 시간 가까이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갈 정도로, 둘은 진짜 친했다.

“윤지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그녀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서지연은 임윤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윤지 같은 탑 스타는 자신의 개인폰을 따로 가지고 다녔다. 서지연은 그 개인폰으로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임윤지가 그 전화를 바로 받았다.

-여보세요?

“윤지야. 나야. 백지연.”

-어머. 지연 언니!

임윤지도 당연히 자신이 백지연에서 서지연이 된 사실을 몰랐다.

-장례식은 잘 치렀다고 들었어요.

“와줘서 고마워. 바쁠 텐데.”

-아니에요. 언니가 외할아버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아직 상심이 크죠?

“어어. 뭐 그래도 이겨 내야지.”

-호텔에 출근하셨겠네요?

“당연하지.”

-하긴 언니한테 호텔 빼면 시체니까.

임윤지의 그 말에 서지연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자기에게 호텔 빼면 시체란 소리는 그녀가 자기 입으로 임윤지에게 한 말이었다. 그만큼 그녀에게 있어서 삼명 호텔은 중요했다.

-자아. 이제 말해 봐요. 언니가 이 시간에 내게 전화 건 진짜 용건을....

임윤지가 괜히 서지연과 친한 게 아니었다. 그만큼 서지연이라는 여자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으니 친한 거다. 그건 서지연 역시 마찬가지였고.

서지연은 임윤지가 보기와 달리, 상당히 계산적이고 영악한 여자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녀를 이용해 먹으려는 것도 좀 미안하지, 많이 미안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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