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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1층에서 내린 강기석은 곧장 녹화 현장으로 향했다.
“이봐!”
그런 그의 팔을 유석재가 억지로 붙잡아서 멈춰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유 PD님?”
“똑바로 말해? 편성본부장님께 무슨 소리 했지?”
“....”
강기석은 이번에도 그의 물음에 대답은 않고 웃으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걸 보고 유석재가 한 소리 하려는데. 그때였다. 유석재의 핸드폰이 울렸고 누구 전화인지 바로 확인한 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필 이럴 때....”
“전 애들이 기다려서 이만....”
그 말 후 강기석이 가던 길을 마저 갔고 그런 그를 향해 유석재가 외쳤다.
“너 편성본부장님께 허튼 소리 했단 봐. 내가 가만 안 둬.”
강기석을 향해 경고성 멘트를 날린 뒤, 유석재는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네. 국장님. 지금 녹화장인데요. 네? 지금 바로 오라고요? 하지만 이제 리허설 끝나고 본 녹화에 들어가야 하는데....네? 아아. 알겠습니다.”
유석재는 통화하는 내내 표정이 계속 굳어 있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난 뒤, 그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강기석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아....”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유석재는 일단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방송국 로비 쪽으로 향한 그는, 그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예능국장실로 향했다.
예능국장이 갑자기 왜 자신을 찾는지 몰라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통화 할 때 예능국장이 틈틈이 이를 갈았는데, 그건 그가 화가 나 있을 때면 나오는 버릇 같은 거였다.
그 이 가는 게 핸드폰에도 들릴 정도면, 예능국장이 제대로 화가 나 있다는 것이고....
“C발. 별 일 아니어야 할 텐데....”
안 그래도 아까 강기석을 쫓아 로비를 가로 질러 뛰다가, 강기석이 탄 엘리베이터 안에 편성본부장인 하일석이 타고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계단을 쉬지 않고 뛰어 올라 6층까지 간 거고. 다행히 강기석이 편성본부장과 같이 내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석재는 강기석이 편성본부장에게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봤다.
그랬다면 그 개또라이 하일석이 강기석을 6층에서 내리게 그냥 두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강기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예능국장실이 있는 7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국장실 앞 비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유석재 PD인데요.”
“아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들어가세요.”
비서의 말에 유석재는 국장실 문을 노크 했다.
똑똑!
“들어 와.”
예능국장의 굵직하면서 힘이 넘치는 목소리가 문 밖으로 들려오고, 그 소리를 들은 유석재는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그의 눈에 예능국장이 앉아 있는 게 보이고, 바로 그 옆에 누가 한 사람 더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안으로 더 걸어 들어가자 곧 알 수 있었다.
‘뭐, 뭐야? 편성본부장이 왜 여기에....’
유석재는 불길한 느낌과 함께, 머릿속에 갑자기 그의 물음에 계속 대답 대신 웃기만 하던 강기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 * *
SVS 편성국장 하일석. 그는 외부 초청 강의를 끝마치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원래는 강의가 끝나고 바로 퇴근해도 되는데, 내일 SVS사장에게 따로 보고 할 게 있어서, 보고서를 작성하러 일부러 방송국의 자기 사무실로 가고 있었다.
하일석처럼 외부 초청 강의가 있을 때면 SVS에서는 차량과 기사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지하 주차장에 들어갈 필요 없이, 방송국 건물 앞에서 내린 하일석은 곧장 본관 건물로 들어갔고, 이내 로비를 가로질러서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그때 그와 함께 탄 젊은 남자는 방문 패스를 목에 걸고 있었는데, 하일석이 7층을 누르자 바로 이어 그 밑 6층을 눌렀다. 보아하니 6층 보도국에 볼 일이 있는 거 같았다.
그렇게 그 젊은 남자가 6층에서 막 내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였다.
툭!
“응?”
하일석의 발치로 뭔가 떨어졌고 그는 한 눈에 그게 사진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야?”
그런데 그냥 사진이 아니었다. 지저분하고 난잡한 퇴폐, 변태 사진이었다. 하일석은 일단 그 사진을 주워서 봤다.
-딩동! 7층입니다.
촤르르르!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하일석은 일단 그 사진을 품속에 넣었다. 혹시 누가 볼까 싶어서 말이다.
다행히 열린 엘리베이터 밖에는 아무도 없었고, 하일석은 도로 닫히려는 문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활짝 열렸고, 그제야 하일석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는 곧장 자기 방으로 향했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품속에서 그 사진을 꺼내서 자세히 봤다. 그런데 그런 더러운 짓을 하고 있는 두 사람 중 하나가 하일석의 눈에 익었다.
“이 새끼 이거....예능국에 유석재 아냐?”
하일석이 보도국도 아닌 예능국의 PD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유석재가 뇌물을 쳐 받아먹은 PD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벌 위원회에서 하일석은 그런 놈은 바로 잘라야 한다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었다.
하지만 프리 선언을 하며 빠져 나간 PD들이 하도 많다보니, 한 명의 PD라도 아쉬운 상황에 처한 SVS 방송국 입장에서, 유석재 같은 10년 넘는 경력 PD를 자르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단단히 경고를 주고 다시 일을 시켰는데....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 또 이런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닌 거 보면 말이다.
“이번에는 내 반드시 네놈을 여기서 쫓아내 주마.”
단단히 화가 난 하일석이 그 사진을 다시 품속에 넣고는 자기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와 같은 층에서 이웃하고 있는 예능국장실로 향했다.
“방 국장 있지?”
“네.”
비서는 대답과 동시에 인터폰으로 편성본부장이 왔다고 알렸다. 그러자 본부장이 국장보다 직급이 더 위인 터라, 예능국장이 자기 방에서 나왔다.
“본부장님이 어쩐 일로?”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하일석은 방 국장이 나오며 열어 놓은 예능국장실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런 그를 쫓아서 방 국장이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다.
하일석은 알아서 방국장의 자리 옆에 앉았고, 방 국장이 자기 자리에 앉자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내가 알기로 방 국장 밑에, 유석재라는 PD가 있는 걸로 아는데?”
“네. 있습니다. 주로 쇼프로그램을 맡고 이쓴 고참 PD입니다만....”
방 국장이 불안한 눈으로 하일석을 쳐다봤다. 하일석이 갑자기 자기 방으로 쳐들어와서 유석재를 거론한 건, 유석재가 또 무슨 사고를 쳤다는 소리였다.
“이것 좀 보시오.”
그때 하일석이 품속에서 난잡한 그 사진을 꺼내서 방 국장에게 건넸다. 방 국장은 한 눈에 사진을 찍은 곳이 어딘지 알아봤다.
왜냐하면 그도 접대 받으러 거기 간 적이 있었으니까. 근데 그 사진의 배경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사진에 찍힌 빠구리하며 좋다고 웃고 있는 놈이 문제지.
“유석재 맞지요?”
“네....”
이건 빼박이었다. 사진 속에 테이블 위의 여자의 보지에 좆 박고 있는 놈은 누가 봐도 유석재였으니까.
“이 사진 어디서 나신 겁니까?”
방 국장이 묻자 하일석이 바로 대답했다.
“엘리베이터에 떨어져 있는 걸 내가 주웠소.”
“네?”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며 방 국장이 하일석을 쳐다봤는데, 그런 그에게 하일석이 당당하게 말했다.
“엘리베이터에 CCTV있으니 확인해 보던가? 아무튼 나는 이번 일 그냥 못 넘어갑니다.”
하일석의 그 말에 드디어 올게 왔다는 듯 방 국장이 질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뜻대로 하십시오.”
예능 국장으로 자기 밑에 PD를 커버해 줘야 하지만, 이런 짓을 해대는 놈까지 책임 져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PD 지금 여기로 불러 주세요.”
“네?”
“회사에서 자를 필요 있습니까? 스스로 사표 내게 하는 게 낫지.”
하일석의 그 말에 방 국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살벌하고 세게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하일석은 SVS 직원인 유석재에게 나름의 배려를 해주고 있었다. 최대한 불이익을 받지 않게 퇴사 처리 당하는 않고, 제 발로 나갈 수 있게끔 말이다.
잠시 후, 방 국장이 유석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10여분 뒤, 유석재가 방 국장의 방에 나타났다.
“이리 와서 앉아.”
방 국장의 말에 유석재가 주뼛거리며 방 국장이 앉아 있는 근처로 다가왔고, 곧 거기 있던 하일석과 눈이 마주쳤다.
“안, 안녕하세요?”
“....”
유석재가 먼저 인사를 했는데 하일석은 못 본 척, 그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머쓱해진 유석재가 방 국장이 턱 짓한 소파에 앉자, 방 국장이 바로 말했다.
“너....오늘 사직서 써라.”
“네?”
유석재는 진심으로 놀란 듯 두 눈이 동그래진 채 방 국장을 쳐다봤다. 그때 하일석이 유석재 앞에 사진 한 장을 내 놨다.
“헉!”
그 사진을 본 유석재는 기겁했고, 그런 그를 보고 방 국장이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 * *
유석재가 예능국장실에서 사직서를 쓰고 있을 때, ‘인기차트 100’의 녹화 현장에서는 방송에 내 보내기 위한, 본 촬영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커트! 좋아요. 무대 바꿀게요. 다음은....해피걸스! 스탠바이 해 주세요.”
가요 순위프로그램에서 무대에 설 수 있는 가수나 그룹의 수는 한정적이었다. 그런데 인기 가수와 그룹의 경우는 두 세곡을 불렀다. 때문에 신인들이나 1. 2년차 가수나 그룹이 무대에 오를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런 무대에 해피걸스가 오른다는 것만으로도, 요즘 해피걸스의 인기가 그만큼 가파르게 상승중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인가가 당장 최근 멤버 간 불화설로 인해 먼지처럼 날아가 버릴 위기에 처했지만.
‘수빈이를 버리고 JYB엔터로 넘어간 다음, 거기서 새로운 걸그룹으로 데뷔 시킨다면....’
해피걸스의 팬덤은 그대로 유지한 채 데뷔하는 걸그룹이면, 시작부터 충분히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거라는 게 강기석의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QH엔터를 나오기 전, 지금 해피걸스라는 그룹명으로 서는 이 마지막 무대가 중요했다.
“자아. 다들 즐기자. 알지? 너희들 최고라는 거?”
강기석은 해피걸스 멤버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항상 이런 식의 무한 칭찬으로 그녀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당연하지. 우리보다 잘하는 걸그룹 없다.”
그룹의 행동대장 격인 제이나가 멤버들에게 한 번 더 확신을 심어주고.
“자아. 나가서 무대 부셔 버리고 와라. 출격 준비!”
강기석이 손을 내 뻗으며 말하자, 해피 걸스 멤버들이 하나씩 강기석 손위로 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포개진 다섯 손이 밑으로 내려가며 동시에 외쳤다.
“해피걸스! Let's do our best!”
최선을 다하자고 외친 해피 걸스 멤버들은, 비장한 얼굴로 무대로 올라갔고, 잠시 뒤 무대에 음악이 흐르자 ,그녀들은 일사분란하게 한 몸처럼 움직이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무대 장악력도 이전의 다섯일 때보다 더 좋았고, 박자를 완벽하게 타면서 무대를 제대로 부셔 놓고 있었다.
“아아....”
리허설 때에 없었지만 강기석은 느낄 수 있었다. 해피걸스 멤버들이 그때보다 지금 더 멋진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걸 보고 있으면서 강기석은 감격해서 할 말을 잊었다.
저 아이들에게 이 무대가 해피걸스로 서는 마지막 무대였다. 근데 그 무대를 아이들이 이렇게 완벽하게 장식하다니....감동이 넘쳐 그만 울컥해지면서, 눈가가 촉촉해 지고 만 강기석.
“짝짝짝짝....”
강기석은 해피걸스의 무대가 끝나자 누구보다 크고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멤버들이 무대에서 내려 올 때,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 명씩 따뜻하게 안아 주며 말했다. 잘했다고 말이다.
평소와는 완전 다른 그런 강기석의 모습을 해피 걸스 멤버들도 이상하게 봤다.
하지만 쭉 헤어져 있다고 오늘 다시 그녀들에게 돌아 온 강기석인 만큼, 그녀들의 무대에 선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그냥 넘어갔다.
* * *
모두 8개의 화면에 등장한 해피걸스 멤버들의 춤동작과 그녀들의 생생한 표정, 그리고 완벽한 노래까지.
방송실에서 실시간 모니터로 그 화면들을 살펴보고 있던 SVS 가요 순위프로그램 ‘인기차트 100’의 나재희 PD.
“해피걸스. 잘하네.”
그녀 입에서 웬일인지 칭찬의 말이 튀어 나왔다. 그래선지 몰라도 방송실 안의 엔지니어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주위를 휘 둘러보며 말했다.
“뭘 봐요? 빨리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오늘 야근 할 생각이면 늦장 부려도 좋고요.”
나재희의 야근이란 말에 방송실 안, 엔지니어들이 정색하며 지금하고 있는 촬영과 녹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재희는 촬영하면서 어떤 식으로 편집할지 다 정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촬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재촬영도 서슴지 않았는데, 해피걸스의 경우 보자마자 어떻게 편집할지 그 가닥이 나왔다.
바로 시작과 끝, 그리고 랩 할 때를 제외하고 나서 정면 샷을 원테이크(one take)로 그대로 밀고 가 버려도 될 거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촬영 때 일부러 정면 샷을 원근감 있게 찍게 했고 말이다.
편집 시간을 30분은 단축 할 수 있게 된 나재희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뒤로 이어진 촬영이 엉망진창이었다.
“아니 저것들은 안무 연습도 안하고 온 거야? 왜 무대에서 연습을 하고 지랄이야. 지랄이.”
발끈한 나재희가 드디어 방송실을 박차고 무대로 뛰어나갔다.
“또 시작이야?”
“쟤네들 좆 됐네.”
그리고 그녀에게 찍힌 한 보이그룹이 개또라이 나재희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