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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취임 첫날이 지나고 박대순 경찰청장은, 자신이 구상해 둔대로 인사 명령을 내렸다.
비록 첫 번째 인사 명령이 좀 께름칙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후속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 박대순은 제주경찰청의 경찰차장이자 후배인 배도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청장님.
이미 어제 취임 축하 인사를 배도철에게 받은 박대순. 하지만 배도철이 제주도에서 백준열에게 밉보인 탓에, 그를 대하는 박대순의 태도도 예전만 못한 게 사실.
“원래는 그곳 청장과 함께 자네도 한직으로 보내버리려 했어.”
-죄, 죄송합니다.
“자네 앞으로 사람 보는 눈을 더 키워야겠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백준열의 눈밖에 완전히 나 버린 배도철 경찰차장을 계속 안고 가는 게, 사실 박대순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정재욱을 갈구는 데 있어서, 사실 배도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어제 슬쩍 백준열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더니, 백준열이 그랬다.
정재욱이 먼저라고 말이다. 배도철은 그때까지 제주경찰청에 뒀다가, 다음 정기 인사 때 경찰복 벗게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더불어 배도철이 제 역할을 하려면, 윗선인 제주경찰청장의 인선에 신경을 좀 쓰셔야 할 거라고 했다.
즉 제주경찰청장이 혹시 정재욱 편이라면, 배도철이 어떻게 제대로 정재욱을 갈구겠나?
그러니까 제주경찰청장을 정재욱과 사이가 나쁘거나, 철저히 박대순의 말을 따르는 인사로 내정해야 한다는 얘긴데.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박대순은 그곳 경찰차장인 배도철을 승진시켜, 제주경찰청장으로 삼으려 한 것이고.
근데 멍청한 배도철이 백준열을 건드리는 바람에....
“별 수 없군. 현 청장을 그대로 두는 수밖에.”
그래서 박대순은 어쩔 수 없이, 현 제주경찰청장을 그 자리에 유임하는 선택을 했다.
그 인사 명령을 내린 직후, 박대순은 배도철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원래는 자네 자린데, 유만식이를 그대로 제주경찰청장 자리에 유임시키기로 했네.”
-그, 그런....
배도철은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박대순이 바로 그런 그의 기대를 묵살해 버리며 말했다.
“다 자업자득이야. 자네, 그나마 그 자리라도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꼭 해줘야 할 일이 있어.”
-그, 그게 뭡니까?
“정재욱이 알지?”
-네. 정세현 전 청장님 아들이잖습니까. 오늘 저희 청 형사과장으로 발령 받아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만.
“그 새끼. 갈궈.”
-네?
“정재욱이 못살게 굴라고. 최선은 스스로 옷 벗기는 건데. 그게 아니고 자를 수 있으면 잘라버리는 것도 괜찮고.”
한마디로 정재욱의 경찰 커리어를 제주경찰청에서 끝내게 만들란 소리였다.
-청, 청장님?
“왜? 싫어? 싫으면 어디 우도로 보내 줄까?”
-아, 아닙니다. 싫기는요. 그 새끼 한 달 내 옷 벗기겠습니다.
“좋아. 그래야지. 자네가 그 일만 잘해 내면, 내 서울로 자네를 불러 올려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아직 감사하기 이르지. 잘 해 봐.”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냥 상대하는 것도 까다로운 경찰차장 배도철이다. 그런 그가 작정하고 갈궈 대기 시작하면 그걸 버텨 낼 경찰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살짝 정재욱이 안 됐다 싶은 박대순. 하지만 그때 백준열이 생각났고, 박대순은 바로 각오를 다졌다.
‘정신 차려. 박대순. 넌 이제 시작이야.’
그 시작을 잘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내일 있을 국회 인사청문회부터 잘 넘겨야 했고.
그 키를 잡고 있는 게 바로 백준열이었다, 지금 그로서는 어떡하는 백준열에게 잘 보여야 했다.
박대순은 그렇게 제주경찰청의 배도철 경찰차장과 통화 후, 백준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어. 백 대표. 날세. 잠깐 통화해도 될까? 그렇군. 그렇다면 전화건 용건만 빨리 얘기하도록 하지. 제주도에서 말이야. 그래. 정재욱이. 그 녀석 갈구라고....”
박대순의 설명이 쭉 이어졌고,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백준열이 말했다.
-좋네요.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내일 국회 인사청문회 말인데, 걱정 전혀 하실 거 없습니다. 본사 비서실에 얘기하니까 이미 여, 야 의원 모두 포섭해 놓았다고 하니까요.
“여, 야 의원 다? 하하하하. 고맙네. 고마워.”
-뭘요. 청장님께서 제부탁을 이렇게 잘 들어주셨는데, 저도 해드릴 거 다 해드려야죠.
그렇게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백준열과 통화를 끝낸 박대순. 그는 남은 지방청의 경찰 인사를 마저 단행하고, 일찌감치 경찰청을 나와서 모처로 향했다.
그 모처에는 새로운 경찰청장을 뵙기 위해서, 바리바리 돈을 싸들고 온 사업가와 로비스트가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정세현 전 청장은 너무 티 나게 해 먹어서 잘렸지만, 박대순은 티 내지 않고 잘 챙겨 먹을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뒷배로 삼명그룹이 버티고 있었다.
그 삼명그룹이 있는 한 정세현과 달리 청와대에서도 그를 함부로 경질할 수 없었다.
그런 삼명그룹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박대순은 백준열이란 카드를 계속 손에 꽉 쥐고 있을 생각이었다.
* * *
박대순 경찰청장과 통화 후, 배도철의 얼굴이 한 동안 계속해서 일그러져 있었다.
“C발 새끼.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서는....”
배도철은 대 놓고 박대순을 욕했다. 그럴 것이 제주경찰청장 시켜 준다고 해서, 그 동안 그에게 열과 성의를 다해서 충성해 왔는데 말이다.
한데 실수 한 번 했다고 자신을 이런 식으로 팽 시키다니....
배도철로서는 박대순의 지금 행태가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자기 경찰 커리어를 끝낼 생각이 전혀 없는 배도철.
“그래. 어떡하든 살아남아야지. 그래서 내 반드시 지방청의 청장은 꼭하고 옷 벗어도 벗는다.”
회사에서도 꼭 일 잘하고, 일 열심히 하는 놈이 오래 다니는 건 아니다.
왜 강한 놈이 살아남는 거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배도철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금 이 자리를 지켰다가 다음 인사 철에 반드시 지방경찰청의 청장 자리에 오르고 말리라 다짐했다.
물론 그게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것일 수 있지만, 그래도 배도철은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재욱이 그 새끼만 잘 조지면 된다는 거지?”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할 일 치고는 별 시답잖은 일이었다.
사람 갈구는 거 하나만큼은, 배도철도 자신이 대한민국 경찰 중에 최고라고 자부하고 있었으니까.
그 동안 그가 싫어서 경찰 옷 벗은 경찰만 해도 100명은 될 거다.
이제 한 달 뒤 그 숫자가 하나 더 늘게 생겼다. 배도철은 곧장 경찰차장실로 갔고, 그곳에서 바로 형사과장을 호출했다.
“차장님이?”
경찰차장의 호출을 받은 정재욱은 내일 같이 점심 먹기로 한, 그래도 이곳 제주경찰청에서 유일하게 그에게 호의적인 배도철을 만나러 경찰차장실을 찾았다. 그랬는데....
“너 뭐하는 새끼야?”
“네?”
“서울에서 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배운 거야? 형사과 실적을 좀 봐. 여기가 무슨 지구대나 일선 파출소도 아니고. 실적이 이게 뭐냐고?”
“차, 차장님. 저는 오늘 부임해 왔는....”
“시끄러워. 당장 실적 올릴 대책 수립해서 오늘 나 퇴근하기 전까지 가져 와.”
“네?”
아니 자기 때문에 생긴 실적 저조도 아닌데 대책을 왜 자기보고 수립하란 말인가? 거기다가 퇴근하기 전까지 무슨 스로 그 대책을 세우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왜? 못하겠어? 그럼 관둘래?”
실실 웃으면서 말하는 경찰차장. 근데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그 대책을 수립해서 그가 퇴근 전에 보고하지 못한다면 정재욱은 경찰차장에게 무조건 찍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경찰차장의 청내에 괴롭힘이 시작 될 테고. 그러니까 정재욱은 무조건 경찰차장이 시킨 그 대책을 수립해서, 그가 퇴근 전에 보고해야 했다.
“아,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가 봐.”
“네.”
정재욱은 혼란스러웠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 이름을 언급하면서, 잘 챙겨 줄 거처럼 친절하게 굴었던 경찰차장이, 왜 갑자기 돌변해서 자신을 갈구는 지 말이다.
“가, 가만....혹시....”
정재욱은 불과 30분 전에, 제주경찰청 인근 설렁탕 집에서 있었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 * *
수사과장이 되자마자 제주도내에 암약하던 중국 조폭 조직을 일망 소탕해 버린 최철호.
그로인해 그는 일약 제주경찰청의 에이스로 급부상했다. 그 덕분에 일이 3-4배는 더 많아진 제주경찰청 수사과장.
그는 점심 먹을 시간에도 일을 했는데, 그런 그를 그의 수하 형사들이 보고, 잠복 나갔다가 막 들어와서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한 형사들과 같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과장님. 저희랑 식사하시러 가시죠.”
“먼저들 가세요.”
“과장님. 점심시간 20분 남았습니다. 빨리 요 앞 설렁탕 집에 가셔서 한 그릇 뚝딱 하고 오시죠?”
일에 푹 빠져 있었던 최철호. 그도 점심시간이 20분 남았다는 말에 시계를 쳐다봤다.
그런 그를 향해 먼저 점심 먹고 와서 일하던 수사과 형사들이 나서서 말했다.
“과장님. 식사 하고 오십시오. 먹는 거 시원찮으면 이일 못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래요. 일도 고된데 먹는 거라도 제대로 먹어야 견디죠.”
“과장님 두고 먼저 식사한 저희 부끄럽게 만들지 마시고. 어서 가셔서 한 술 뜨시고 오십시오.”
그렇게 수사과 형사들에게 떠밀려서 최철호는 어쩔 수 없이, 제주경찰청 입구 맞은편에 위치한 설렁탕 집에 갔다.
수사과 형사들이 전화로 미리 주문을 해 둔 덕에, 최철호와 잠복 나갔다 복귀한 형사 셋은, 설렁탕 집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안자마자 바로 설렁탕을 받았다.
네 사람은 시간 관계상 바로 설렁탕에 밥을 말았고, 후루룩 거리며 설렁탕을 먹었다. 바로 그때 중년에 남자손님 한 명이 들어와서, 그들 맞은편에 앉더니 불쑥 물었다.
“설렁탕 먹을 만 해?”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은 그 남자손님의 반말에, 밤새 잠복 나갔다가 복귀해서 신경이 예민해 져 있던 형사 하나가 욱해서 말했다.
“그거야 직접 시켜 드셔 보시면 아실 거 아닙니까?”
“뭐야? 너 지금 나한테 신경질 낸 거야?”
“아니. 저 양반이....당신 우리 알아요? 왜 자꾸 반말을 하실까?”
“반말 할 말하니까 하지. 너 관등성명 말해 봐.”
“허어....”
거만한 얼굴의 남자손님의 지나친 언사에, 이제 제대로 화가 난 형사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비록 잠복 나간 형사들 중 그의 나이가 제일 어렸지만 그는 경찰대 출신이었다. 그러니 계급에서 굴릴 게 없었다.
“저는 제주경찰청 수사과 장수현 경위입니다.”
“경위? 경찰대 출신인가?”
“그런데요?”
“나는 오늘부로 새로 온 형사과장이다.”
“네?”
놀란 장수현 경위와 나머지 두 형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중년 남자 손님을 향해 경례를 했다.
“충성!”
“밥 먹다가 무슨 충성. 앉아. 근데 너는 왜 경례 안 해?”
중년 남자손님이 턱 짓으로, 세 형사들과 달리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설렁탕 먹고 있는, 자기 동년배로 보이는 중년 형사를 보고 말했다.
그러자 장수현 경위가 뭐라고 하려는 데, 그걸 설렁탕 먹고 있던 중년 형사, 그러니까 최철호가 손짓으로 말렸다. 그리곤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중년 남자손님을 보고 말했다.
“형사과장이라면서요?”
“그런데?”
“나도 직위가 과장이라서.”
“뭐?”
그때 장수현 경위가 재빨리 정재욱에게 말했다.
“저희 수사과장님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제주경찰청 수사과장 최철호입니다.”
“아네....형사과장, 정재욱입니다.”
여기서 자신과 같은 직위의 경찰 고위 간부를 만날 줄 몰랐던 정재욱. 그가 당황해 할 때 최철호가 말했다.
“뭣들 해? 빨리 먹지 않고. 점심시간 10분도 안 남았는데.”
“네.”
수사과 형사들이 최철호의 말에 바로 앉아서 자기들 먹든 설렁탕을 퍼 먹기 시작했다. 그때 정재욱이 슬그머니 최철호의 시선을 피해서 설렁탕 집 직원에게 주문을 했다.
“설렁탕 하나요.”
“네.”
그렇게 정재욱이 먹을 설렁탕이 나왔을 때, 최철호와 수사과 형사들은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 대표로 최철호가 정재욱에게 말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아네.”
최철호가 맛있게 먹으라고 했지만, 같은 직위의 최철호 앞에서 실례되는 짓을 한 정재욱의 입장에서, 설렁탕이 맛있을 리 없었다.
결국 두 세 숟가락 떠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난 정재욱. 그가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하려 할 때였다.
“동료분이 내셨는데요?”
“네?”
보아하니 최철호가 정재욱의 밥값을 대신 내 준 모양이었다. 오늘 첫 출근한 동료를 위해서 밥 한 끼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C발....이거 영 찜찜한데?”
그걸 최철호의 호의로 받아드리기에, 정재욱은 자신의 한 짓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정재욱이 살아 온 세상에서 누가 내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내어주라는 말 만큼 어리석은 소리도 없었다.
‘뺨 맞으면 바로 맞받아쳐야지.’
그런 사고를 가진 정재욱에게 최철호가 밥값을 내 준 것은, 일종의 페이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재욱에게 맞은 뺨을 최철호가 되받아치기 전에 그를 살짝 방심시키게 만들기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