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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323화 (323/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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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나와 박지수는 5시 40분에 그녀가 사는 한남 타운하우스 근처 행운 마트에 들어섰다.

이때 나는 6시까지 장을 본 다음, 박지수 집에 가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박지수와 저번 주처럼 뜨거운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기대 되는 군.’

박지수의 외모야 더 말 할 것도 없고, 거기도 명기라서 나로서는 벌써부터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특히 저번 주에 그녀와의 빠구리가 주책없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어디 아파요?”

“어?”

“얼굴이 빛이 안 좋은 거 같아서....”

“아냐. 괜찮아. 여기 좀 덥네.”

당연히 대형 마트에다가 마침 또 식품코너에 있어서, 에어컨이 빵빵하게 들어오고 있는 곳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박지수는 내가 괜찮다니 시선을 다시 신선한 생선과 해산물 쪽으로 돌렸다. 그걸 보고 내가 물었다.

“왜? 해물탕이나 생선찌개 같은 거 먹고 싶어?”

내 그 말에 살짝 군침을 삼킨 그녀가, 여전히 그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둘 다 먹고 싶은데....만들어 먹을 수가 없어서....”

“그래?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 줄게.”

사실 해물탕이나 생선찌개 같은 건 손이 많이 간다. 또 해물이나 어패류 쪽은 잘못 끓이면 비려서 아예 못 먹고 버려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고. 한데 내가 뜬금없이 해물탕이나 생선찌개를 끓여 주겠다니, 박지수가 어이없어 하며 날 쳐다봤다.

하지만 백준열은 몰라도 나는 해물탕이나 생선찌개를 잘 끓인다.

왜냐하면 이전 삶의 내 부모님들이 그 두 가지를 특히 잘 끓이셨고, 그 레시피랄까? 잘 끓이는 법을 두 분께 확실히 전수 받았으니까.

실제로 그 두 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여러 번 끓여 봤고. 다들 맛있다고 당장 가게 차려도 되겠다는 극찬을 받았었다.

나는 바로 내친 김에 해물탕 끓일 해산물 재료와 생선찌개 끓일 생선을 구입했다.

해산물이야 많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맛있으니, 마트에 있는 해산물 재료는 다 샀다.

대신 생선찌개에 들어갈 생선은 엄선해서 살 필요가 있었다.

특히 박지수가 무슨 생선을 좋아하는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박지수에게 대 놓고 물었다.

“어떤 생선 좋아해?”

“생선이요? 전 비린 건 별로고....으음....조기나 민어?”

“매운 거 좋아해?”

“환장하죠.”

그래서 바로 결정했다. 국물 잘박하게 매콤한 조기 매운탕을 끓이기로 말이다.

당연히 그 자리에서 조기를 구입했다. 그 다음 해물탕과 매운탕에 들어갈 각종 야채들을 사고 나자, 벌써 양손 가득이었다.

그렇게 신선 코너에서 살 거 다 사고, 우리는 곧장 반찬코너로 향했다.

박지수의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는데, 직접 만들어 채우지는 못해도, 밑반찬 몇 가지는 넣어 두는 게 좋겠다 싶어서, 내가 그쪽으로 움직인 것.

밑반찬만 몇 가지 있어도 당장 즉석 밥 데워서 한 끼 해결이 가능했다.

시켜 먹는 음식이 물릴 때 그렇게 한 끼 해결하는 게 건강에도 좋고, 또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매번 뭘 시켜 먹을지 정하는 게, 상당한 스트레스라는 건 나도 이전 삶에서 그렇게 살아봐서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슨 젓갈 좋아해?”

“명란이랑 어리굴젓, 오징어 젓갈도 좋아해요. 어? 가자미 식혜가 있네?”

막상 반찬코너에 박지수를 데리고 오자 그녀가 더 난리였다.

그래서 이것저것 무려 10여 가지 반찬을 넉넉히 사들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향한 곳은 과자와 라면 코너.

과자와 라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와 달리, 박지수는 작정한 듯 좋아하는 과자와 라면을 많이도 샀다.

그녀가 그것들을 사고 있을 때, 나는 와인 한 병과 소주와 맥주를 좀 샀다.

그렇게 6시 정각까지 살 거 다 구입한 우리가 막 계산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 너 지수지?”

딱 봐도 한 성격하게 생긴 아줌마가 박지수를 알아봤다.

그런데 그 아줌마를 본 박지수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 * *

사람이 화를 내거나 긴장을 하면 얼굴이 홍조를 띠는 데, 그 이유는 교감신경 반작용에 따른 혈액의 울체(鬱滯) 때문이다.

또 얼굴색이 창백해질 때가 있는데, 이 경우는 교감신경이 흥분하면서 동맥까지 압박해, 뇌에 공급되는 혈류를 방해하기 때문이고.

하지만 그 둘의 증상을 동시에 일으키는 원인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극심한 스트레스다.

내가 봤을 때 지금 박지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건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이고, 그 원인 제공자는 내 앞에서 이죽거리며 웃고 있는, 저 메주를 주먹으로 쥐어박아 놓은 거 같은 얼굴의 아줌마 때문이다.

“지수, 아니 올케. 신수가 훤하네. 우리 오빠는 지금 병원에 있는데 말이야.”

역시나 그 아줌마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박지수의 동공을 단박에 흔들리게 만들었다.

올케란 누이가 오라버니(오빠)나 남동생의 아내를 일컫는 친족용어다.

그러니까 내 눈앞에 저 한 성격하게 생긴 아줌마가, 박지수의 전 남편 여동생이란 소리다.

박지수의 전 남편이라면 표준수 감독이다. 그는 영화 촬영 중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결국 병상에서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올해에 죽는다.

아마 지금 쯤 사경을 헤매고 있을 테니, 그 여동생 입장에서 박지수가 웬 잘생긴 남자와 같이, 마트에서 장보고 있는 장면이 보기 좋았을 리는 없겠지.

그래서 내 눈앞에 아줌마가 박지수를 상대로 심통을 부리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한 때 자기 오빠가 사랑했던 여자를, 사람들 많은 마트에서 대 놓고 타박하는 건 옳지 않았다.

보아하니 할 얘기도 없어 보이구만. 정말 할 말이 있다면 박지수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서, 개인적으로 얘기하는 게 맞았다. 그래서 그냥 내가 나서기로 했다.

“송 부 팀장. 박지수씨. 차로 모셔.”

“네. 대표님. 가시죠.”

송명철 부 팀장이 알아서 눈치껏 박지수와 전남편 여동생 사이로 끼어들었다.

우선 두 사람의 시선부터 차단시킨 송 부 팀장은, 박지수를 입구 쪽으로 데리고 나갔다.

“야! 어디가. 거기 서!”

그러자 그걸 보고 발끈한 전남편 여동생이 박지수를 향해 움직였는데, 덮어 놓고 그쪽만 보고 움직이다보니 앞에 누가 있는지도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툭!

“아악!”

살집 많은 아줌마와 부딪치자 내가 휘청거리며 넘어갔는데, 그때 내가 뻗은 손이 그만 그 아줌마 치맛자락을 잡았다.

부욱!

“아아아악!”

그러자 그 아줌마 치마가 찢어지면서 투실투실한 허벅지가 드러났다.

순간 그걸 보고 기함한 아줌마가 소리를 내질렀다. 무슨 돼지 멱따는 지 요란한 그 아줌마의 비명성에, 나는 그때까지 잡고 있던 아줌마 치맛자락을 놓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잠시 후 마트 쪽 보안 팀원들이 왔고, 소란을 피운 아줌마와 나를 보안실로 데리고 가려 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몰라도 내가 거기를 왜 가?

“못 가겠는데?”

“네?”

내 말에 단번에 인상이 사나워지는 행운 마트 보안 팀원들. 특히 보안 팀장이라는 작자가 겁도 없이 내게 지껄였다.

“이러시면 경찰 부르는 수 있습니다.”

“불러. 경찰.”

“뭐, 뭐라고?”

내 말이 계속 짧자 보안 팀장도 말을 놨다. 하지만 그는 그래선 안 됐다.

“행운 마트가 명성그룹으로부터 법적 분리 된, (주)행운을 지주회사로 하는 곳이었던가?”

말이야 명성그룹에서 분리 되어 나왔다지만, 행운 마트는 아직은 명성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로 보는 게 맞았다.

그러니까 원래 명성 마트여야 하는데, 사정상 행운 마트가 된 케이스다.

실제로 (주)행운은 내년에 명성그룹에서 제대로 된 분리 독립에 성공한다.

그러니까 지금 (주)행운은 분리 작업에 돌입해서, 대주주들의 경영권 분할과 지분 정리 등의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하여튼 지금 행운 마트는 명성그룹의 계열사 중에서도, 명성상사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보면 됐다.

근데 내가 그 명성상사의 지분을 12.5%를 가지고 있는 대주주다.

“명성상사 대표가 민병준이었던가? 민병석이었던가?”

내 입에서 명성그룹의 로얄 패밀리 이름이 둘씩이나 거론 되자, 그제야 안색이 노래지는 보안 팀장. 그가 다급히 말했다.

“제, 제가 실언을 한 거 같습니다.”

하지만 한 번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지 못하듯, 한 번 뱉은 말 역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나는 바로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명성상사 민병석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주주인 나를 무시할 정도로 민병석 대표의 명성그룹 내 입지는 탄탄하지 못했다.

그러니 내 전화를 재깍 받을 수밖에.

-아이고. 이게 누구야. 준열이 네가 무슨 일로 내게 전화를 다 하고. 왜? 한 잔 할까?

말하는 꼬락서니 보아하니 민병석이 어떤 인간인지 바로 알 거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백준열의 기억 속에 민병석은 무능하지만, 눈치 하나는 겁나 빠른 기회주의자 재벌 3세였다.

사람들은 이런 유의 인간들을 얕보는 경향이 종종 있는데, 그러다 큰 코 다친다. 이런 놈들이야 말로 진짜 무서운 놈들이다.

앞에서는 살갑게 굴다가 언제 뒤통수를 칠 줄 모르는, 이런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한 놈들은, 애초부터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걸 백준열도 알았던지 올해 처음 민병석과 통화 하는 중이다.

“민 대표님. 이번 분기 상사 실적이 너무 저조하던데. 명성그룹 본사에서 자본 끌어 오는 것도 슬슬 한계가 보이고요. 아무래도 임시주주총회라도 열어서....”

-준, 준열아. 나 좀 살려 주라.

내 입에서 임시주주총회 얘기가 나오자 바로 꼬리를 마는 민병석.

그런 그에게 내가 지금 기분이 더럽다는 말과 함께, 여기가 한남동 행운 마트라고 하자, 그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와 통화를 끝냈다. 내 볼일은 다 봤으니까. 이제 민병석이 어떻게 알아서 할지 지켜보는 것만 남았다.

* * *

잠시 후 이곳 행운마트 점장과 마트 관계자들이 우르르 이쪽으로 몰려왔다.

그리곤 자신을 이곳 점장이라고 먼저 소개한 작자가, 나한테 정중히 물어왔다.

“백준열 대표님 되십니까?”

“그런데요?”

“아이고.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명성상사 대주주님을 여기서 보다니....”

점장이 내 앞에 굽실 거리자 주위 마트 관계자들도 내게 머리를 숙였다.

그걸 보고 두 눈이 동그래진 박지수 전남편의 여동생. 여태 기세 좋게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있었던, 그 아줌마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점장은 자기가 왜 여기 왔는지 명백히 알고 있었다.

딱 봐도 명성상사 민병석이 점장을 달달 볶은 모양이었다.

“장 팀장. 당신 미쳤어?”

“네? 그,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누가 당신 변명 듣겠다고 했어? 당장 저분께 사과 드려.”

“네. 사과는 이미 드렸는데....”

“그럼. 꿇어!”

마트 점장은 내가 이곳 보안 팀장의 사과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지, 극단적인 처방을 내놨다. 하지만 내가 바로 그걸 말렸다.

“어허. 참. 점장님. 지금 나 엿 먹이려는 겁니까?”

“네?”

“주위를 좀 봐요. 지켜보는 사람이 얼만데. 거기다 CCTV도 여기를 찍고 있을 거 아닙니까?”

“아아....”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한 행운 마트 점장. 그의 얼굴이 하얘졌다. 괜히 내게 잘 보이려고 설쳤다가 내 심기만 제대로 긁어 놓았으니....그런 그에게 내가 짧게 말했다.

“확실한 조치. 그거면 됩니다.”

“아아. 네.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조치 취하겠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 듯 행운 마트 점장이 내게 그렇게 대답하고는, 번뜩이는 눈으로 보안 팀장을 쏘아봤다. 딱 봐도 보안 팀장은 오늘 짐 싸야 할 거 같았다. 그러게 왜 사람 봐 가면서 덤벼야지. 쯧쯧.

나는 여기 점장이 내가 원하는 확실한 조치를 취할 거라 믿고, 막 주위를 살폈는데 그 사이 그 아줌마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여기 더 볼 일이 없어진 나도 몸을 돌렸다.

그 동안에 계산이 끝난, 내가 장본 것들은 경호팀원들이 들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경호팀원들과 함께 행운 마트를 빠져 나왔다.

그러자 대기 중이던 차량들이 줄줄이 마트 입구로 와서 섰고, 경호팀원들이 부산히 내가 장 본 것들을 그 차의 트렁크에 실었다.

그걸 잠시 지켜보던 나는, 송 부팀장이 열어 준 차에 탑승했다.

그러자 내 옆 자리에 여전히 굳은 얼굴로 박지수가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내가 어디서 들은 말인데....추억은 손잡이가 아니니까 붙잡지 말고, 미련은 낙서가 아니니 남기지 말며, 그 남자는 분실물이 아니니까, 다시 찾지 말라 더라고.”

내 그 말에 박지수의 두 눈에 핑그르르 눈물이 맺혔다.

* * *

박지수가 아버지뻘을 훌쩍 넘는 나이차이임에도 불구하고, 표준수 감독과 결혼 한 것은 정말 표 감독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을 주위에서는 의심하고 시험하려 들었다.

그 중에서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바로 그녀의 사랑인 표 감독이었다.

그의 어정쩡한 반응이 박지수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박지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사랑이란 건 서로 하는 것이지, 따로 하는 건 집착으로 보여 지기 마련. 그걸 당사자가 알게 되었을 때 비참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결국 그 아픔이 박지수로 하여금 표 감독에 대한 사랑을 점점 식게 만들었고, 주위 달갑지 않은 시선과 냉대들이 그녀의 심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표 감독 딸의 말도 안 되는 언론 제보로, 박지수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표 감독의 부탁으로, 박지수는 제대로 된 해명도 내 놓지 못했다.

전 부인을 잃은 표 감독으로서는, 하나 뿐인 딸자식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박지수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고, 그게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 그는 몰랐다.

탑스타 박지수는 그 일로 인해 몰락했고, 그 충격으로 말을 잃은 그녀가 어느 날, 표 감독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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