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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원래 내가 박인호 부대표와 김효석 총괄기획실장을 부른 건, 그들과 차 한 잔 같이 마시며, 김 실장이 얼마나 빨리 업무에 적응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김 실장과 연예계 쪽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김 실장님이 블랙아이의 윤관을 잘 안다고요?”
“네. 이런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블랙아이라는 그룹 이름도 사실 제가 지어 준 겁니다.”
“으음. 제가 듣기로 블랙아이 앨범이 곧 나올 거라던데?”
“네. 한 달 전인가? 제가 요새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옥수역 근처 ‘에프지홀’이라는 악기 위탁매매 점에서 우연히 윤관을 만났을 때, 녀석이 그러더군요. 적어도 다음 달에는 자신의 1집 앨범이 나올 거라고.”
“윤관과 많이 친한가 봐요?”
“여건만 되면 품고 싶었던 녀석이었거든요. 그 녀석이 보컬은 나왕에 비해 떨어지지만 R&B쪽으로 곡 하나는 정말 잘 만들어서....”
“그래요? 실장님이 그렇게 탐낼 인재라면 데려 오세요.”
“네?”
“윤관 저희가 품죠. 아니다. 나왕 보컬 진짜 끝내 주는데....블랙아이를 통째 영입하도록 하죠.”
“....”
갑작스런 내 결정에 어리둥절해 하는 김효석 총괄기획실장.
그에 비해 철저히 사업가인 부대표 박인호는, 내가 좀 전에 말한 걸 들고 온 수첩에 꼼꼼히 적었다. 블랙아이 영입이라고 말이다.
“일단 윤관과 접촉해 보시고, 앨범이 나왔는지부터 확인해 주세요. 다행히 아직 안 나왔으면 저희가 그 앨범을 내주도록 하고요. 참고로 블랙아이 영입과 앨범 발매에 얼마가 들어가도 좋습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죠? 김 실장님?”
돈 걱정 말고 무조건 블랙아이와 그들의 앨범을 나에게 가져 오란 소리다. 나는 내친김에 박인호를 보고 말했다.
“박 부대표님. 오늘 하루 김 실장님 좀 써야겠네요. 괜찮죠?”
“물론입니다.”
어차피 김 실장 없어도 박 부대표 혼자 잘 이끌어 나가던 JYB엔터였다.
어제 일 시켜보고 박인호도 눈치 챘을 것이다. 김효석이 연예계의 실무 쪽으로는, 그보다 훨씬 나은 인재란 걸 말이다.
“김 실장님. 그럼 오늘 중으로 그 일 처리해 주세요. 가능하죠?”
“네. 뭐....”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신이 그토록 영입하고 싶어 했던, 블랙아이를 드디어 그가 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기똥찬 찬스를 놓칠 김효석 실장이 아니라는 내 예상은 적중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내가 그 일을 맡기자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김 실장. 살짝 흥분한 거 같은 그를 보며 내가 웃으며 말했다.
“네. 그만 가 보세요.”
“저도....”
그러자 박인호 부대표도 같이 일어섰다. 김효석이 없으니 그도 그만큼 바빠진 것이다.
김효석의 공백을 메우려면 말이다. 두 사람이 나가고 잠시 후, 김 비서가 들어와서 찻잔을 치우며 내게 말했다.
“중요한 안건 몇 가지가 있는데, 바로 가져 오도록 하겠습니다.”
어째 내가 잠깐 노는 꼴을 못 보는 김 비서였다.
* * *
김효석은 박인호 부대표와 오늘 할 일을 분배하고 있다가, 백준열 대표의 호출을 받고 대표실로 향했다.
거기서 티타임을 가지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백준열 대표가 뜬금없이 꺼낸 블랙아이와 그들 앨범 얘기에, 김효석은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백 대표님이 블랙아이를 어떻게 아시는 거지?’
블랙아이는 김효석이 아는 한, 요즘 젊은 세대의 R&B가수들 중 최고의 재야 고수들이었다.
재야란 초야에 파묻혀 있다는 뜻으로, 비록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효석은 블랙아이가 기회만 잡는다면, 국내 최정상 R&B가수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QH엔터에 있을 때 그들을 영입할 수는 없었다.
그가 대표였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영입 했을 텐데, 홍대복 대표는 당장 눈앞에 돈이 되지 않는 가수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JYB엔터는 달랐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백준열 대표가 바로 말했다. 블랙아이를 데려 오라고.
‘드디어....’
원래 김효석은 독립해서 연예기획사를 차리면 블랙아이를 영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또라도 된다면 또 모를까.
그랬는데 회사를 옮기고 채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자신이 꿈꿔오던 일 하나를 할 수 있게 됐다.
처음에 김효석은 이게 꿈인가 했다. 하지만 아니었고, 그는 자신의 방으로 가자마자 곧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블랙아이의 멤버 윤관의 전화번호를 찾아서 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평소 작업실에 있을 때 윤관은 전화가 걸려 와도 잘 받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운이 좋았다.
-네. 본부장님.
윤관은 당연히 김효석이 QH엔터에서 일하는 줄 알았다.
“지금 어디야?”
-저요? 지금....서초동이요.
“남부터미널 역 거기?”
-네.
남부터미널 역 근처 서초동 골목에는 국내 악기상이 몰려있었다.
윤관은 지금 거기에서 악기를 보고 있거나 아니면 팔려고....순간 불길한 느낌이 든 김효석. 그가 재빨리 윤관에게 물었다.
“너 설마 거기 악기 팔러 갔니?”
-....
그 물음에 대답이 없는 윤관. 윤관이 자기 악기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김효석. 그런데 그런 소중한 악기를 윤관이 지금 팔려 한다는 건....
“혹시 팔았어?”
-아뇨. 아직은....
“팔지 마.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까 기다려. 알았지?”
-네.
김효석은 윤관의 대답을 듣자마자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어 둔 정장 상의를 걸치고, 서류 가방을 챙겨서 자기 방을 나섰다.
그러자 방밖의 여비서가,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휑하니 총괄기획실장실을 나서는 김효석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실장님. 어디 가시는지 말씀해 주셔야....”
“스카우트, 영업 뛰러 가.”
“네?”
총괄기획실장은 직급은 전무고, JYB엔터에서 3인자의 자리다.
그런 임원 중에서도 최고 위치에 있는 그가 스카우트는 뭐고, 또 왜 영업을 뛰러 간단 말인가?
황당한 얼굴의 비서를 뒤로하고 김효석은 곧장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고,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김효석이 자기 방에서 나오기 전 미리 전화 해 둔 터라, 그의 차와 기사가 지하주차장에 대기 중이었다.
“고마워요.”
기사가 열어 준 차 안에 탑승하며 김효석이 말했다.
잠시 뒤 김효석을 태운 차가 JYB엔터 본사 사옥의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서, 곧장 남부터미널 역을 향해 질주했다.
* * *
원래는 저번 주에 나왔어야 할 앨범이었다. 그런데 블랙아이 앨범은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음반은 다 나온 상태. 그런데 앨범 표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표지만 입히면 앨범은 바로 포장 작업만 들어가면 되는 상황.
“아니. 왜 표지가 안 나오는 건데요?”
성격 급한 블랙아이 멤버 나왕이 따지자, 소속사 실장 말이 가관이었다.
-그게....실은 표지 제작 대금이 밀려서....
“네?”
-300만원만 주면 되는데....
“하아....”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고작 300만원이 없어서, 그들 앨범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이번 앨범 내는 데 1억 넘는 돈을 쓴 블랙아이 멤버들. 그들에게 300만원이라는 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제 둘 다 어디서 돈을 빌릴 때도 없었다.
앨범 낸다면서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다보니, 지금와서 막상 더 돈 빌릴 때가 없었던 것.
그렇다고 무명 가수에게 대출을 해 줄 은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사채를 끌어다 써야 하나 했는데, 그것만은 나왕이 결사반대를 했다.
“사채는 절대 안 돼. 차라리 앨범을 접는 한이 있어도....”
하지만 다 만들어 놓은 앨범이었다. 골랑 300만원 때문에 그들의 꿈과 희망을 접을 수는 없는 노릇. 해서 윤관은 자신의 일렉트릭 기타를 팔기로 했다.
선물 받은 건데 꽤 유명한 브랜드 제품이라, 중고로 팔아도 400-500만원은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게, 같이 곡 작업한 세션들의 공통된 의견들이었다.
그래서 윤관은 자신의 일렉트릭 기타를 팔아서 앨범 문제도 매듭짓고, 연습실 밀린 월세도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네? 150만원이요?”
“그래. 그것도 많이 쳐 준 거야.”
한데 악기상에 가 보니 얘기가 달랐다. 적어도 400만원은 받아야 할, 자신의 일렉트릭 기타를 악기상 주인이 후려쳐도 너무 후려쳤다.
“됐습니다. 안 팔아요.”
150만원에 파느니 안 파는 게 나았다. 그래서 악기상에게 꺼내 보여줬던, 자신의 일렉트릭 기타를 도로 챙길 때였다.
“에이. 좋아. 그럼 180만원. 더는 안 돼.”
악기상은 못 이기는 척 30만원을 올려서 부르며, 이 정도면 윤관이 자신의 일렉트릭 기타를 팔 거라고 생각한 거 같았다.
하지만 윤관은 악기상의 그 말에도 끄덕도 하지 않고 일렉트릭 기타를 챙겨서, 그 악기상을 나왔다.
그리고 두 군데 더 근처 악기상을 돌았는데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좀 전 나온 악기상에서는 200만원까지 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200만원 받고 팔아도, 어차피 앨범 표지 제작비에 못 미쳤다.
만약 좀 전 나온 악기상에서 일렉트릭 기타 가격으로 300만원을 불렀다면, 윤관은 자신의 기타를 팔았을지 몰랐다.
근데 아까부터 느낌이 쎄한 것이, 아무래도 이곳 악기상들이 서로 담합을 하고 있는 거 같았다.
아마도 처음 윤관이 일렉트릭 기타를 팔러 간, 악기상에서 다른 악기상에 손을 쓴 게 아닌가 싶었다.
“하아아....”
긴 한숨과 함께 윤관은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악기상을 찾아가야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진동으로 맞춰 둔 윤관의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하니 QH엔터의 김효석 본부장이었다.
작년에 QH엔터 남자 솔로 가수의 R&B곡을 편곡해 주면서, 김효석이 그곳에 있는 줄 알게 된 윤관.
사실 김효석과 윤관은 10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당시 중견 연예기획사의 매니저였던 김효석이, 윤관을 영입하고 싶어 따라 다녔는데, 결국 김효석의 회사에서 윤관 영입을 마다하면서, 김효석의 윤관 영입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 간혹 연락하며 시간 날 때면, 술도 한잔씩 하고 친하게 지냈는데, 김효석이 다니던 회사를 관두면서, 그들의 연락도 끊어지고 말았다.
그랬던 게 작년에 다시 만나면서 연락처를 주고받게 되었고, 지금은 이렇게 서로 안부 정도는 묻고 지내는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윤관은 김효석이 안부를 물으려 그에게 전화 한 줄 알고 그 전화를 받았다.
그랬는데 대뜸 그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래서 어디 있다고 대답하자, 역시나 촉이 좋은 김효석이 뭔가 눈치 차리고 물어왔다. 악기 팔려고 거기 간 거 아니냐고 말이다.
그래도 윤관은 김효석에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일렉트릭 기타를 팔러 악기상을 찾아왔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효석이 귀신 같이 그걸 알아차리고 물어 오는 데,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윤관. 그가 사실대로 말하자 김효석이 당장 윤관이 있는 여기로 오겠단다.
해서 어쩔 수 없이 김효석을 기다리며, 윤관은 한군데 더 이 골목의 악기상을 찾았다. 그랬더니 여기는 더 했다.
“120만원이요?”
“요즘 중저가 일렉 기타도 소리가 좋거든. 그래서 메이커 찾는 사람이 드물어.”
말도 안 되는 소릴 떠들어 대는 악기상 주인을 보고, 윤관은 두말하지 않고 자신의 일렉트릭 기타를 챙겨서 그 곳을 나왔다.
“악기가 무슨 떨이로 파는 물건도 아니고....”
그때였다. 비록 국산이지만 최고급 세단 한 대가, 윤관이 서 있는 곳으로 와서는 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기사가 내려서 차문을 열어주려고 그 차 뒤로 돌아오는 데, 그 세단의 뒷문이 먼저 열렸다. 그리고 그 차에서 내리는 중년의 신사. 근데 그 중년 신사가 대뜸 윤관을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여기 악기상들 담합해서 가격 후려친다는 소문 못 들었어?”
“네? 누구신데....어? 김 본부장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타. 어디 들어가서 얘기하자.”
김효석은 윤관을 자기 차에 태운 후, 악기상 골목을 빠져 나와서 근처 커피 전문점으로 윤관을 데리고 들어갔다.
* * *
각자 마실 음료를 주문하고 김효석이 법카로 계산을 한 후, 주문 벨을 들고서 두 사람은 커피 전문점의 빈자리에 마주보고 앉았다. 차타고 오면서 서로에 대한 안부는 물어 본 터라, 김효석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기타 너희 부모님이 너의 20살 생일날 사 준 거라며? 네 보물 1호를 왜 팔려고 해?”
“그럴 사정이 좀 있어서....”
“그러니까 그 사정을 얘기 해 보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효석은 그 사정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왜냐하면 블랙아이라는 그룹명을 지어 준 게 바로 김효석이었고, 음으로 양으로 그 동안 블랙아이를 위해서 많은 지원을 해 준 그였으니까.
“그게 실은....”
윤관은 김효석에게 자신들의 앨범이 진작 나왔을 텐데, 차일피일 미뤄진 진짜 이유를 먼저 얘기했다.
“아니. 그러니까 앨범비도 너희가 다 냈는데, 이제 와서 앨범 표지비 300만원이 없어서, 앨범을 못 내고 있다고? 그게 말이야 방구야?”
김효석이 윤관의 말을 쭉 듣다가 하도 기가차서 말했다. 그러다 뭐가 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근데 너희 음반 나온 건 확실해? 몇 장 찍었다고 하던데?”
“몇 장 찍었는지는 말하지 않았고, 음반은 저희가 받아서 확인했는데 왜요?”
“음반이야 너희들이 직접 녹음을 했을 테니까, 그거 그대로 카피해 구워서 너희들 준 것일 수 있잖아?”
“네?”
“아무래도....너희들, 지금 소속사에 사기 당한 거 같다.”
“....”
김효석의 직설적인 그 말에 윤관이 꽤나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한 동안 입만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