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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뭐 그러던 말든 유혜라는 감독에 이어서 촬영감독을 비롯한, 주요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녀에게 주어진 대기실로 향했다.
그 대기실에서 유혜라는 메이크업을 하고, 오늘 촬영에 입을 블링블링한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 사이 CF 촬영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스태프 측에서 먼저 연락을 해 왔다.
“유혜라님. 촬영 시작 5분 전입니다.”
“네. 나가요.”
유혜라 대신 매니저인 차 팀장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곤 유혜라를 보고 말했다.
“혜라야. 나가자.”
“어.”
유혜라는 CF퀸 답게 시종일관 여유 넘치는 얼굴로, 대기실을 나섰고 촬영장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본격적인 CF 촬영이 시작 됐다.
영상을 촬영하고 있어서, 일체 다른 잡소리가 섞이면 안 되기 때문에, 쥐 죽은 듯 조용히 무척 조심하면서 촬영이 이뤄졌는데, 이때 정민지는 촬영장 주위를 다 훑고, 그곳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생활정보신문을 넣어 두는 박스가 보였다.
그녀는 곧장 그쪽으로 가서 생활정보신문 한부를 빼낸 다음 그걸 둘둘 말았다.
그러자 종이 지압봉이 그녀 손에 쥐어졌다.
그걸 들고 가볍게 휘둘러 본 정민지는, 한창 촬영 중인 회랑 쪽으로 움직였다.
촬영은 원활하게 이뤄져서 디테일한 장면 몇 개 빼고, 오늘 촬영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유혜라가 뛰는 씬 촬영이 시작 됐다.
아무래도 이때 스태프들도 가장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감독과 촬영 감독도 제일 예민해져 있었다.
만족한 촬영이 이뤄지기 위해서, 앞으로 유혜라가 몇 번을 더 회랑을 왔다 갔다 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자아. 레디 큐!”
실제 TV에서 10여 초 정도 나오는 촬영분량을 위해, 계속 같은 연기를 반복하는 유혜라.
“컷! 거기 그렇게 뛰면 어떻게 해? 자아. 다시 갑니다.”
유혜라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왔는지 10여 번까지는 참았다.
하지만 그녀 잘못이 아닌 다른 쪽에서 계속 NG가 나자, 그녀의 얼굴도 점점 차갑게 변해갔다.
이때 복도 끝에서는 모든 스태프들이 계속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는데, 유혜라의 싸늘하게 변해가는 얼굴에 다들 긴장하는 게 역력해 보였다.
그렇게 10번의 촬영이 더 이어지고, 딱 봐도 폭발직전의 유혜라. 그걸 눈치 차린 감독이 외쳤다.
“10분만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그러자 유혜라가 쉬러 대기실로 가는 게 아니라, 모니터링을 하러 모니터링 석으로 오는 게 아닌가?
대개 촬영 중간에 배우가 콘셉트나 연기 부분을 논의 하러, 모니터링 석으로 오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혜라가 모니터링 석으로 오늘 걸 누구도 제지할 방법은 없었다.
“감독님. 저 다리에 알 박을 생각이세요?”
“네?”
“이렇게 뛰다가 다리에 알 박히겠다고요. 저 다음 주에 스타킹 광고 촬영해야 하는데, 다리에 알 박히면 감독님이 책임지실 거죠?”
“....”
아니, 그걸 왜 감독이 책임진단 말인가? 하지만 CF감독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여기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유혜라의 말장난에 또 놀아날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 3번이에요. 그 안에 끝내세요.”
유혜라가 통보하듯 그렇게 감독에게 얘기하고 돌아서서 대기실로 향하는 걸 보고, 이번에는 감독과 스태프들의 얼굴이 굳었다.
말이 3번이지, 그 3번에 만족할 만한 장면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한다면 하는 유혜라의 성격 상, 3번 안에 오늘 촬영은 끝내야 했다. 그러려면....
“너 가서 유혜라에게 30분 뒤에 촬영 한다고 해. 그리고 그 동안 보조 출연자들....빡세게 연습 시켜.”
보조 출연자들로 인해 앞서 10번도 넘게 NG가 났다. 안 그래도 3번 밖에 남지 않은 촬영에, 그들이 또 NG를 내서는 곤란했다. 해서 감독은 30분 동안 보조 출연자들을 연습 시켜서, 적어도 그들이 NG를 내는 일이 없게 촬영에 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잘한 결정이었다.
“컷! 다시 갑시다.”
다시 시작 된 촬영에서, 보조 출연자들로 인해 NG가 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찍는 동안 감독은 예감했다. 지금 찍은 장면이 별로 라는 걸 말이다.
그래서 유혜라가 말한 세 번의 촬영 중 한 번의 기회를 날려 먹은 감독이, 다음 촬영에는 만족스런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스태프들에게 이런저런 많은 요구를 할 때였다.
보조 출연자들 중 두 명이 은밀하게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걸 눈치 차린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다들 촬영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 * *
미의 여신을 쫓는 남자들. 오늘 보조 출연자들은 전원 남성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
그 수가 30명. 그런 그들을 통제하고 실수 없이 촬영에 임하게 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자자. 다들 준비 됐죠? 이제 두 번 남았습니다. 긴장들 하시고.”
그래도 군대 시절 조교 출신이었다는 조감독이, 그나마 보조 출연자들을 잘 통제하고 있었는데, 그는 일당 받고 오늘 촬영장에 온 보조 출연자들에게, 앞으로 딱 세 번만 더 찍고 촬영 종료한다는 말로, 보조 출연자들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보조 출연자들도 무한 반복 되는 촬영 보다, 집중해서 딱 세 번 찍고 일당 챙겨서 집에 가는 게 더 나았으니까, 조감독이 시키는 대로 그 말을 잘 따랐다.
그래서 앞서 와는 달리, 적어도 보조 출연자 때문에 촬영에 NG가 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컷! 다시!”
하지만 두 번째 촬영에서도 제대로 된 씬이 나오지 않았고, 감독의 얼굴은 초조함을 넘어 절실함이 슬슬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든 말든 유혜라는 태연 작약했다. 이미 통보를 했고 이제 한 번 남은 촬영 후, 그녀는 여길 떠날 생각이었다. 나머지는 감독이 알아서 할 일이고.
전에도 이 감독과 같이 일한 적이 있었는데, 가만 두면 밤새도록 촬영을 할 인간이었다.
적당히 란 게 없는 저 감독에게, 배우가 맞추다간 배우의 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유혜라는 어느 정도 촬영에 임해 주다가, 그녀가 봐서 힘들다 싶을 때 감독에게 가서 통보를 했다. 세 번 만에 모든 촬영을 끝내라고 말이다.
감독은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계약을 했으니까.
돈은 좀 적게 받더라도 유혜라는 CF촬영시 배우의 입김이 크게 작용 하게 계약을 체결했다. 광고주 입장에서야 유혜라가 싸게 계약해 준다는 데, 그녀의 그런 조건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광고 찍는 거야 광고업체에서 하는 거고.
때문에 죽어나는 건 광고주에게 수주를 받은 광고업체, 정확히는 현장에서 촬영하는 감독과 스태프였다.
감독의 권한이 약하면 약할수록, 촬영장에 스태프들도 그만큼 더 힘들어지는 법이었으니까.
그래서 인성이 더러운 배우와 CF 촬영을 하는 걸 스태프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유혜라는 그런 스태프들도 혀를 내두르는 인성 더러운 여배우 중 한명이었고.
이번 촬영을 맡은 CF감독 임호식은 계약서를 보고, 자기는 못 찍는다고 광고회사 대표에게 확실히 얘기했다. 하지만 못 찍는 게 어디 있나? 대표가 찍으라면 찍어야지.
“그거 못 찍겠으면 나가.”
“네?”
“임 감독 말고도 우리 회사 들어오고 싶어 하는 감독들 많아.”
불과 작년 까지만 해도 임호식이 나가겠다고 하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던 대표였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요 몇 년 동안 활성화 됐던 광고시장이, 경제가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쪼그라들기 시작한 것. 그러면서 광고 촬영이 확 줄어들었고, 폐업하는 광고업체가 늘어났다.
그 광고업체에서 나온 백수 감독들이, 여기저기 다른 광고회사에 문을 두드리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이제 넘쳐 나는 게 감독이었다.
“하아....찍겠습니다.”
임호식은 별 수 없이 유혜라의 샴푸 CF를 찍게 되었고, 이제 딱 한 번 그녀와 촬영 할 기회만이 남았다.
“자자. 이게 마지막입니다. 다들 집중해 주세요.”
임호식이 촬영 전 주위 분위기를 충분히 환기 시켰다. 그리고 시작 된 촬영....
‘여기 까진 좋아....’
유혜라도 마지막이라 그런지 집중력을 보이고 있었고, 보조 출연자들도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촬영 감독을 비롯한 모든 스태프들도 한 마음으로 촬영에 임하다 보니, 좋은 씬이 계속 찍히고 있었다.
‘이제 제일 중요한 장면....’
달리던 유혜라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남자들을 뒤돌아보고, 그런 그녀를 보고 황홀해진 남자들이 그녀 앞으로 우르르 쓰러지는....
‘됐다.’
유혜라의 돌아보는 연기는 완벽했고, 이제 남자들이 리얼하게 쓰러져 주면....
그때였다. 앞쪽에서 뛰던 남자가 잘 쓰러졌고, 이제 남은 남자들이 뒤엉켜 쓰러져 주면 되는 데, 그때 뒤에 남자 둘이 쓰러지지 않고 되레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 중 한 남자가 바로 유혜라를 덮쳤고.
“아아악!”
그걸 보고 유혜라가 질끈 두 눈을 감고 비명을 내질렀다.
* * *
정민지는 촬영장에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을 끄는 남자 둘을 발견했다.
특수부대에 있으면서 여러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며, 정민지는 사람 보는 눈이 바뀌었다.
물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외모만 보고, 그 사람이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뭔가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 접근해 오는 사람의 경우, 반드시 부자연스런 모습을 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정민지는 사람에게서 바로 그런 부자연스런 모습을 잘 캐치해 냈다.
그러니까 그녀가 생각하는 범주를 벋어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다.
그렇게 봤을 때 이곳 촬영장에서 딱 두 남자만이 그녀 눈에 거슬렸고, 그들은 바로 유혜라의 코디나 매니저를 빼고 나면, 그녀에게서 가장 가까이서 촬영을 하는 보조 출연자들이었다.
“둘이라....”
그런 자가 하나라면 정민지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거다.
그 자가 나쁜 의도로 유혜라에게 수작을 부리면 그녀가 바로 나서서, 그 자를 제압해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둘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녀가 한 명을 처리할 동안, 다른 한 명이 유혜라를 노린다면....
해서 유혜라는 문대식 팀장에게 지원을 요청할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 지원을 요청한다 해도 어느 세월에 지원 팀원이 올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그들이 유혜라를 어떻게 할 수도 있고 말이다.
“별 수 없어. 나 혼자 어떻게 해 볼 수밖에.”
그러면서 정민지는 한 손에 쥐고 있는, 생활정보신문을 둘둘 만 종이 지압봉에 힘을 주면서, 촬영 중인 유혜라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촬영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정민지는 봤다. 두 놈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걸 말이다.
“쳇! 둘이 공범이었구나.”
하지만 다행인 건 촬영 중이라 둘의 손에 흉기 같은 게 쥐어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둘은 얼마든지 정민지 혼자 막아 낼 수 있었다.
“자자. 마지막 촬영갑니다. 라스트 씬, 레디 큐!”
감독의 큐 신호가 떨어지고 유혜라가 회랑을 질주하고, 그 뒤를 보조 출연자들인 남자들이 우르르 뒤쫓았다.
그러다 유혜라가 뒤돌아 볼 때 남자들이 우르르 쓰러졌는데, 그때 그 놈 둘이 튀어 나왔고 그 중 한 놈이 유혜라를 덮쳤다.
“어딜....”
정민지는 놈들이 튀어 나올 때, 이미 유혜라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빠악!
그리곤 사정없이 던진 몸의 체중을 고스란히 실은 무릎으로 유혜라를 막 껴안으려는 녀석의 관자노리를 찍었다.
“켁!”
단말마와 함께 급소를 맞은 녀석이 썩은 고목 쓰러지듯 픽 쓰러졌다. 그때였다.
“죽엇!”
그때였다. 정민지가 먼저 튀어 나온 녀석을 처리할 동안,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간 또 다른 놈이 칼을 꺼내서, 그대로 유혜라의 복부를 찔렀다.
“안 돼!”
순간 정민지가 몸을 날리며 유혜라 앞을 막아섰고, 녀석의 칼은 유혜라가 아닌 정민지의 옆구리를 찔렀다.
푹!
분명 칼이 박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하지만 칼 맞은 사람치고는 멀쩡한 얼굴의 정민지.
퍽!
그녀가 이마로 자신의 옆구리에 칼을 찌른 남자의 안면을 박아버렸다.
“크으윽!”
그러자 고개가 뒤로 휙 젖혀진 그 남자가, 충격에 정민지를 찌른 칼을 놓고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완벽하게 제압 된 건 아니었는데, 바로 그때 정민지가 제자리에서 몸을 솟구치더니, 몸을 홱 돌리면서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퍼억!
제대로 뭐가 터질 때 나는 소리가 일며, 정민지의 발차기에 머리를 맞은 남자가 그 자리에 픽 쓰러졌다.
“후우....”
그걸 보고 정민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 쉴 때, 그녀 뒤 쪽 유혜라가 소리쳤다.
“언니. 피, 피!”
정민지 옆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고 기겁한 유혜라.
“아아....”
털썩!
정작 칼 맞은 건 정민지인데, 기절은 유혜라가 하고 있었다.
* * *
당연히 촬영은 중단 되었다. 그리고 10분 뒤 구급차가, 그 10분 뒤 경찰차가 촬영장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구급차는 필요한 응급조치만 취하고 빈 차로 돌아갔고, 대신 경찰차에서 내린 경찰들이 유혜라를 노린 두 남자들을 긴급 체포해서, 경찰차에 태운 다음 경찰서로 데려갔다.
“언니. 진짜 괜찮아?”
“네. 꿰맬 필요도 없을 정도로 살짝 베였을 뿐입니다.”
유혜라의 물음에 그 대답을 하면서 정민지가 밴드 하나 붙인 자기 오른 손을 내 보였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고 하니, 놈들은 유혜라를 해치기 위해서 치밀하게 작전을 짰다. 한 놈이 혹시나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고 붙잡으면, 다른 놈이 유혜라를 찌르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유혜라를 잡기로 한 녀석이 정민지에게 당하자, 다른 놈이 바로 유혜라를 노리고 칼을 내찔렀고.
바로 그때 정민지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종이 지압봉을 사용해서, 그녀의 옆구리를 찔러 오는 놈의 칼을 받아 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민지의 손바닥이 살짝 베였는데, 그때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고 놀란 유혜라가, 자기 대신 정민지가 칼침 맞은 줄로 오해하고, 기절까지 해 버린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