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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최 집사는 금도그룹의 함평도 실장을 만나기 전에, 가족에 대한 나름의 조치를 취했다.
바로 여행을 핑계로 가족들을 미국, 즉 하와이로 보내려 한 것이다.
만약 그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들은 미국에 계속 체류할 것이고, 아무 문제가 없다면 보름간의 여행을 즐기고 나서, 국내로 다시 돌아오면 될 일이었다.
실제 최 집사는 이런 식으로, 그가 위험하다 싶을 때 마다 가족을 챙겨 왔었다.
그만의 가족에 대한 최선의 배려라고나 할까?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함 실장과의 만남은 삼명 쪽에 들킬 위험보다는, 금도 쪽에서 기분 나빠할 공산이 더 컸다.
오늘 최 집사는 금도 쪽에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전달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걸 들어주지 않는다면 최 집사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전에 금도 쪽에 유용한 정보 하나를 전달해 주고 나서 말이다.
바로 백 회장이 차기 후계자로, 막내 백준열을 선택했다는 거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고 말았다.
최 집사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계속 머릿속에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까지 본가 사람들 중에, 그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중에는 백승렬 회장도 포함 되고.
‘도대체 누구냐? 누가 내가 첩자란 걸 알아 챈 거야?’
최 집사가 아직도 그걸 두고 머리 복잡해 하고 있을 때였다. 미전실에서 이동훈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
“그래? 잘 됐네. 수고들 했어.”
이동훈의 말대로 미국으로 가려던 최명도의 가족들이,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도로 내렸다고 말이다.
그 말을 이동훈이 최 집사에게 전하자, 그제야 최 집사의 얼굴에 패배감과 함께 절망감이 깃들었다.
최 집사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백승렬 회장이 배신자와 그 가족에 얼마나 가혹한지 말이다.
“백 회장, 아니 회장님을 만나게 해 주시오.”
최 집사가 힘없이 말했다. 하지만 이동훈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 가족은....앞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될 겁니다. 당신 없이.”
최 집사는 특히 이동훈의 끝말에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의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는 소리였으니까.
빵! 빵!
그때였다. 경적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를 듣자 이동훈이 근처 경호원에게 말했다.
“그들을 이리로 데려 와.”
“네.”
딱 봐도 이동훈이 누군가를 부른 듯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최 집사도 바로 눈치를 챘다.
“안, 안 돼. 사, 살려 줘. 나, 난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시키는 건 뭐든 다 할게. 아니. 금도 쪽 정보를 넘길게.”
최 집사는 살기 위해서 발악을 했다. 금도 쪽 정보라.... 사실 솔깃한 소리다.
하지만 이동훈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최 집사 같은 첩자들이 실상 고용자 쪽의 정보를 전혀 모른다는 걸 말이다.
설혹 아는 게 있다고 해도, 그건 고용자가 심어 놓은 역 정보일 공산이 더 컸고.
즉 첩자는 발견 즉시 처리하는 게, 제일 안전하고 뒷문제도 없었다.
잠시 후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건장한 장정 셋이 등장했다.
바로 삼명그룹에서 첩자들을 처리할 때 이용하는, 처리자 에이전시 쪽 사람들이었다. 저들에게 넘어가는 순간 최 집사는 죽은 목숨이었다.
“데려 가시오.”
“안 돼! 살려줘.”
이동훈은 더 두고 볼 것도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고,
최 집사는 두려움에 오줌까지 지리며, 인간도살자들인 저들에게 잡혀가지 않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했다.
퍽! 퍽!
하지만 그런 그의 저항은 처리자들에게 별거 아닌 발버둥에 불과했다.
그들의 폭력 앞에 이내 얌전해진 최 집사. 그런 그를 끌고 처리자들이, 차고 밖에 대기 중인 승합차에 탑승했다.
부우우웅!
승합차가 떠난 뒤, 삼명家 본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경호원들은 다시 산책을 시작했고, 사용인들은 각자 자기 할 일을 했으며, 자기 할 일을 끝낸 이동훈은 다시 삼명그룹 본사로 향했다.
* * *
전날 술에 취해서 고성방가로, 경찰까지 출동 시킨 전지석 삼명그룹 감사실장.
그는 그 뒤 주말을 조용히 보내고, 월요일 평상시처럼 출근을 했다.
그런 그 앞에 나타난 백승렬 회장.
‘늙은이. 대체 무슨 꿍꿍인지....’
월요일 계열사 대표들에게서 주간 보고를 받으면서도, 백승렬 회장은 비어 있는 비서실장 자리에 대한 인선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
감사실장으로서 화상 회의로 치러지는 그 보고에 참여를 하고 있었던 전지석은, 그래도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렇게 계열사 대표들의 주간 보고가 끝나고, 아예 컴퓨터를 꺼버린 전지석이 분통을 터트렸다.
“대체 언제 발표할 생각인 거야?”
전지석은 백 회장이 비서실장으로 누구를 앉힐지 발표를 늦추는 거 보다, 그가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가 더 짜증이 났다.
누가 봐도 비어 있는 비서실장의 자리는 그의 몫이었다.
한데 백 회장이 이런 식으로 길게 고민한다는 건, 그만큼 그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씨발! 내가 어때서?”
그런 그에게 경호팀장 중 한 명이 연락을 해 왔다. 그는 전지석이 그룹 본사에 심어 놓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왜?”
=실장님. 좀 전 미전실에서 경호차와 경호원 차출을 요구해 왔습니다.
“뭐? 누구 지시로?”
=그야 회장님 지시죠.
그걸 물은 자신이 멍청했다. 미전실장이 없는 지금 미전실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백 회장뿐인데 말이다. 전지석은 바로 질문을 바꿨다.
“그 경호차와 경호원을 쓸 대상이 누군데?”
=이동훈 상무요.
“누, 누구?”
=삼명전자 쪽에 이동훈 상무라고 알고 있습니다.
“뭐?”
전지석의 얼굴이 삽시간에 야차처럼 변했다. 이동훈의 컴백.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알, 알았어.”
전지석은 일단 통화부터 끝냈다. 더 얘기하다가는 무슨 말 실수를 할지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기에.
“하아....”
전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방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생각에 생각을 이어나갔다.
백 회장이 이동훈을 본사로 불러들인 건 확실했다. 그리고 이동훈은 전지석도 인정하는 인재.
그가 비서실장 자리를 꿰차거나, 미전실장이 되더라도 이상할 거 하나 없었다. 하지만....
“비서실장 자리는 내 꺼야.”
미전실장이야 이동훈에게 넘긴다고 해도, 비서실장 자리를 놈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백 회장과 담판을 지어야겠어.”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더니,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줄 착각 중인 전지석.
그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결정을 내렸는지 몰랐다.
그 결정에 당장 자신의 명운이 걸린 것도.
* * *
전지석이 백승렬 회장을 만나겠다고 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백 회장이 그를 회장실로 불러들였다.
“할 말이 뭐냐?”
살짝 피곤해 보이는 안색의 백 회장.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전지석에게 물었다. 그러자 전지석이 바로 되물었다.
“이동훈이 부르셨다고요?”
전지석의 입에서 이동훈이란 말이 나왔을 때, 백 회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불렀지. 그게 뭐?”
“이러시는 거 아니죠. 제가 있는데.”
전지석의 그 말에 백 회장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지석아. 너 많이 컸구나?”
“네?”
“개가 주인을 보고 짖으면 주인이 어째야 할까? 몽둥이를 들까? 아니면 개밥을 줄까? 이도저도 아니게 그냥 내버려 둘까?”
그 물음 뒤 입매를 비트는 백 회장. 그 백 회장을 보고나서 전지석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미친....’
그리고 자신이 지금 뭔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털썩!
전지석은 백 회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외쳤다.
“살려주십시오.”
“....”
백 회장은 그런 전지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서 한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하아. 살려는 줄게. 대신 조용히 지내라.”
“네. 네. 쥐 죽은 듯이 숨어 살겠습니다.”
“그래. 가 봐. 아아. 자리는 비우고.”
백 회장에게 따지러 왔다가 되레 감사실장 자리까지 잃은 전지석.
그가 회장실을 나와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갈 때였다.
“어?”
엘리베이터로 가는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좀 전까지 띄엄띄엄 서 있던 경호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불길한 느낌에 전지석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르게 걸어 갈 때였다.
퍽!
복도 중간에 우측 통로 쪽 벽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튀어 나와서, 전지석의 머리를 둔기로 때렸다.
맞는 순간 눈이 돌아간 전지석은 풀썩 쓰러졌고, 그 통로 쪽에 대기 중이던 스트레쳐카에 전지석이 눕혀졌다.
그 스트레쳐카에 그대로 잠든 듯 누운 채, 전지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고, 거기 대기 중인 구급차에 실렸다.
그리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인근 병원으로 실려 갔다.
* * *
삼명그룹 회장실. 그곳 창가에서 뒷짐 지고 서 있던 백승렬 회장.
그런 그의 눈에 앰뷸런스 한 대가 눈에 띠었다. 그때 백 회장이 뒤에 수행 비서에게 물었다.
“병원 측에 얘기 잘 했지?”
“네. 판정 내리는 거야 뭐 어렵겠냐고. 보내기만 하라고....”
백 회장은 자기가 한 말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래서 전지석을 죽이는 대신, 그에게 손을 써서 병원에서 뇌사 판정을 받게 만들기로 했다. 물론 그 일을 시행하는 건....
“이번 일은 어디가 맡았지?”
“전에 말씀하신대로 김훈 대표 쪽 에이전시를 이용했습니다만....”
수행비서의 말에 여전히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백승렬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준열이가 확실히 사람 보는 눈이 있어.”
그러다가 뒷짐을 풀고 몸을 돌린 백승렬 회장. 곧장 자기 자리로 향하면서 수행비서에게 또 물었다.
“이동훈 상무에게 올라 온 보고는 없나?”
“있습니다. 좀 전에 최 집사 처리 끝냈다고....”
최 집사란 말에 움찔하던 백 회장. 그가 길게 한숨을 내 쉬고는, 자기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하아아. 정말 믿을 놈 하나 없네.”
그 뒤 내친김에 서지현과 백지연까지 챙긴 후, 백 회장은 다음 자기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 본사를 나섰다.
재경부 장관에 이어서 금감 원장과의 점심 약속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수행비서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꺼냈다.
“회장님. CH그룹 쪽에서 또 접촉을 해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대번에 눈살을 찌푸리는 백승렬 회장.
“그 양반 아직 병원에 있어?”
“네.”
“내가 CH그룹 쪽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백준열 때문에 백승렬 회장과 CH그룹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그, 그게....실은 금감 원장 쪽에서 얘기 한번 해 달라고....”
“뭐? 가만, 현 금감 원장이....그 양반 사돈 맞나?”
“네. 회장님.”
“쯧쯧쯧....”
백 회장이 한심하다는 듯 자기 수행 비서를 쳐다보다가, 이게 다 비서실장의 부재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싶었던지 그냥 넘어갔다.
“다시 말하는 데, 앞으로 나한테 CH그룹 쪽 얘기는 일절 하지 말도록.”
“네. 회장님.”
남은 아니니 여태 챙겨 줬지만, 형제가 자식보다 우선 일 수는 없었다.
그것도 그냥 자식도 아닌, 자기 뒤를 이을 귀한 자식을 건드렸다.
핏줄만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유아무야 넘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도를 넘는다면 백승렬도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CH그룹 쪽에 얘기 해. 내가 불쾌해 하고 있다고.”
“네.”
수행비서는 백 회장으로부터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CH그룹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CH그룹 총수 백승호 회장. 그는 입원 해 있던 VVIP병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기 아내인 강경심에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답답해서 밖에 산책을 나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게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에게, 자신이 위중하다고 뻥을 쳐 놨기 때문이었다.
“승렬이 그놈 변했어. 큰형이 아프다는데, 위중하다는 데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니....”
백승호 회장은 자신이 이런 식으로, 백승렬 회장을 병실로 불러들인 게 몇 번째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마다 백승호 회장은 동생에게서 뭔가를 뜯어냈고, 백승렬 회장은 군말 없이 형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다 보니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또 이런 식으로 쉽사리 이번 일을 해결하려는 백승호 회장.
하지만 백승호 회장은 동생에 대해 잘 몰랐다.
백승렬 회장이 그동안 백승호 회장의 말을 잘 들어 준 것은, 그런 것들이 자기 형인 백승호 회장보다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초 자기 자식에, 그룹을 물려 줄 녀석과 백승호 회장은 비교 상대도 될 수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백승렬 회장과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해결 될 거라고 믿고 있는 백승호 회장.
그런 그에게 드디어 사돈 댁 상갓집에 간, 아내 강경심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떻게 됐어?”
=텄어요. 텄어.
“뭐?”
=동서. 내일 모레 딸내미 데리고 미국 들어간답니다.
“뭐라고?”
=서방님. 이번에 작정하신 거 같아요. 동서랑 헤어지기로. 하긴 서재국 대통령도 없는데 그 집안에 뭘 더 기대하겠어요?
“그래서. 승렬이 여기로 못 온다고?”
=내가 여기 왔을 때는 이미 서방님과 조카들 조문 하고 떠난 뒤였어요. 내가 여기 더 있는 다고 뾰쪽한 수가 생길 것도 아니고. 이만 철수 해야겠어요.
결국 자기 아내를 보내서 백승렬을 자기가 입원한 병원으로 문병 오게 만들려던, 백승호 회장의 술수는 수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