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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269화 (269/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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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운 나는, 그만 피식 웃었다. 그럴 것이 내일 오전, 나는 블랙머니에 출근 할 거다.

그때 박 비서에게 구두로 지시를 내려도 될 일이었다. 근데 문자 메시지로 굳이 답장을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더블 더블유(WW)엔터테이먼트 추진호 대표와 추명진 상무의 지분 현황도 궁금해졌다.

“에이....”

결국 그걸 보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 없을 거 같아서,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박 비서가 보낸 압축 파일을 풀어서, 기어코 더블 더블유(WW)엔터테이먼트 추진호 대표와 추명진 상무의 지분 현황을 보고야 말았다.

“으음....”

한데 그 둘이 제법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추진호 대표가 일단 안정적으로 45%를, 그 아들인 추명진 상무가 12%의 지분을 가지고 있어서, 더블 더블유(WW)엔터테이먼트는 사실상 그 두 사람의 회사라고 보면 됐다.

아마 두 사람을 따르는 회사 임원들도 꽤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을 테니, 지분으로 더블 더블유(WW)엔터테이먼트를 흔드는 건 힘들지 싶었다.

그래도 종내는 지분 싸움으로 더블 더블유(WW)엔터테이먼트를 JYB엔터가 인수 합병하는 게 그림이 제일 좋았다.

“이러면 안팎으로 흔들고, 거기다 강력한 한방은 따로 준비해야겠네.”

아무래도 더블 더블유(WW)엔터테이먼트와의 전쟁은 진흙탕 싸움이 될 공산이 커 보였다. 물론 그 싸움에서 내가 질 거란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뭐 어차피 꽃길만 걸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려면 감수 할 것은 해야지. 채설아의 원한을 풀어주고, 또 그녀가 남긴 재능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내가 원혼 채설아의 의뢰를 들어주게 되면, 챙길 수 있는 재능은 엔젤릭 보이스.

나는 그 재능으로 가수가 되어 볼까하는 욕심도 냈었다. 물론 진짜로 그럴 생각은 없지만.

그런데 요즘 바빠서 그런지 원혼을 보지 않고 있었다.

하긴 원혼을 시도 때도 없이 보는 게 더 이상할 일이지만.

“아아....”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 생각을 한 게 발단이 된 거 같았다. 갑자기 온몸이 오싹해져왔다.

마치 내 주위만 냉기가 흐른다고 할까? 이건 뭐 더 생각하고 자실 것도 없었다.

내 눈앞에 희끄무레한 게 보였으니까. 나는 견신 시스템의 「개눈깔」아이템을 사용했다.

그러자 내 눈앞의 희끄무레한 게, 확실히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중년 아저씨네.”

창백한 얼굴에 안경까지 낀,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자네. 내가 보이나 보군?

그나마 진중한 성향의 원귀인 거 같았다. 일단 채설아처럼 시끄럽고 요란하진 않았다.

“네. 뭐, 보입니다만.”

-그렇군. 나는 역시 운이 좋아. 이 억울함을 풀고, 미련 없이 여길 뜰 수 있게 될 테니까.

중년 아저씨는 마치 내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 줄 것을 확신하는 듯 했다.

-우선 내 소개를 하지. 나는 윤범식이라고 하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는 게 부끄럽지만 사실이니 어쩌겠나? 사람들은 나를 명의라고 불렀네. 실제로 내가 살린 사람만 수천 명도 넘었고. 당시에는 최고의 외과의(外科醫, Surgeon)이었지.

중년 아저씨, 아니 윤범식이 말한 당시가 언젠지 모르지만 자기 입으로 명의니, 최고의 서어전이라고 하는 게 영 신뢰가 안 가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부끄럽다고 말했고, 또 진중한 어조가 그가 딱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 같지도 않았다.

-....라고 하는데 나는 급성 심장마비로 죽은 게 아니네. 정확히 말해서 놈들에게 살해당한 거지.

당연히 억울하게 죽었으니 원귀가 된 거겠지. 윤범식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내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아. 자야 되는 데....’

나는 속으로 괜히 채설아 생각을 해서, 원귀를 불러들였다 자책하면서도, 막상 윤범식의 얘기에 빠르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 * *

윤범식은 한마디로 독불장군이었다. 그가 뛰어난 의사인 건 맞았지만, 너무 혼자 독야청청하니 주위에 시기질시를 받은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랬나 싶기도 해. 나 혼자 의료계를 개혁하려 들었으니까. 그것도 급진적으로....

정답은 윤범식도 알고 있었다. 의료계 개혁은 이전 삶의 내가 죽기 전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즉 10년 뒤에도 지금과 다를 게 없단 거다. 그런 의료계의 개혁을 윤범식 혼자서 무슨 수로 한단 말인가?

-점진적으로 내가 아닌 우리가....이뤄 나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윤범식을 죽음으로 내 몬, 아니 윤범식을 죽인 자들은 그냥 둘 수 없었다.

윤범식이 원귀가 된 것도 그들 때문이고.

“서진의료재단의 이사장 김명수와 서진병원장 박학기, 외과과장 이태곤, 그리고 이태곤의 똘마니들을 처단해 주면 되는 겁니까?”

-처단이란 말은 좀 살벌하군요. 그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처벌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도 윤범식은 착했다. 이런 선량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죽이다니. 그리고 쓰레기들이 병원을 차지하고 있는 서진병원.

거기를 손보려면 서진그룹과 척을 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서진의료재단의 이사장 하나와, 그 밑에 의료기관인 서진병원 외과의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손대면 가만있을 서진그룹이 아니다.

하긴 내가 서진그룹 회장이라도, 타 그룹 회장 아들놈이 자기 계열사 대표를 건드리면 기분 나쁠 거다.

“이거 싸움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 거 같은데....”

더블 더블유(WW)엔터테이먼트에 이어서 서진그룹이라....

서진그룹은 제약사를 시작으로 점점 덩치를 불려 나가던 중견 기업이었는데, IMF이후 덩치를 키워 지금은 재계 서열 25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서진그룹 김명진 회장은 지금도 안팎으로 공격적 경영 전략을 통해, 회사를 성장시켜 나가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런 적극적인 성향을 가진 김명진 회장이, 투자의 신으로 꼽히는 백준열을 찾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김명진 회장과 백준열은, 그냥 안면 있는 사이가 아니라 제법 친한 사이였다.

김명진 회장이 백준열보다 30살이 많았지만, 백준열은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업적일 때 얘기고, 개인적으로 보면 김명진 회장은 백준열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백준열이 김명진 회장의 장녀와 혼사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여자관계도 복잡하고 성질도 워낙 지랄 맞다보니 말이다.

그래서 김명진 회장과 백준열은 딱 비즈니스 적으로만 만났고, 일 얘기 말고는 일절 다른 말은 하지 않는, 사실상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즉 백준열이 김명진 회장의 동생인, 서진의료재단의 이사장 김명수에게 손대는 그 즉시, 서진그룹과 백준열의 관계 또한 적대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김명진 회장이라....”

백준열의 기억을 통해 분석 된 김명진 회장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백준열에 대해 너무 잘 안다는 게 부담이 됐다. 하지만....

“내가 백준열이면서도 아닌 게 최대 변수가 되겠군.”

김명진 회장이 내가 백준열인 줄 알고 나와 싸우려 든다면, 그는 큰 코 다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나는 백준열은 아니니까.

“아이구야....”

원혼 윤범식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복수 대상자에 대해 잠깐 생각했는데, 벌써 시간이 한 시간이나 흘렀다.

나도 이제 자야 내일 일을 할 수 있었다. 해서 나는 일단 원혼 윤범식의 부탁을 들어 주기로 했다.

-원혼 윤범식의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이를 받아드리게 된다면, 의료계의 이단아, 하지만 단 한 번도 수술에 실패한 적이 없는 명의, 윤범식의 재능 ‘투시 안’을 당신은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받아드리겠습니까?[Y/N]

“투시 안?”

말 그대로 인체에 한해서, 몸 안의 내부 장기나 혈관, 근육, 관절 등을 투시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원혼 윤범식의 의뢰를 들어 주면 얻게 된다는 얘기다.

“의사도 아닌데 그걸 어디다 써?”

뭐 쓰려면 쓸데야 없겠냐만은 내게 딱히 유용한 재능은 아닌 거 같았다.

그때 살짝 머리가 지끈 거리더니, 견신 시스템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울려왔다.

-「개눈깔」아이템의 사용시간이 종료 됩니다.

그 소리 후 내 눈앞에 있던 윤범식의 원혼이 연기처럼 사라졌는데, 희미하게나마 그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내 부탁을 들어 줘서 고맙네.

묵직한 그의 말이 오히려 더 내 가슴에 와 닿으면서, 그의 부탁을 꼭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유독 들게 만들었다.

“이제 진짜 자야지.”

원혼 때문에 방안 온도가 뚝 떨어져, 나는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충분히 피곤한 하루였던지라, 나는 이내 깊은 수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 * *

현現삼명전자 이동훈 상무. 그는 한 때 백승렬 회장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인재였다.

그래서 그가 차기 미전실장이 될 거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재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백 회장의 눈 밖에 났고, 본사에서 쫓겨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 그를 대신해서 대외 업무협력 팀장이었던, 강규석이 미전실장 자리를 꿰찼고 말이다.

당시에도 말들이 많았는데, 사람들은 그때 이동훈과 비서실장 오규동의 사이가 틀어진 것을 두고, 둘의 싸움에 백 회장이 오규동의 손을 들어 준 것으로 봤다.

어째든 이동훈을 그렇게 삼명그룹 본사에서 나갔고, 그 뒤 계열사를 전전하다가 지금은 삼명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의 부문장으로 있었다. 직급은 상무고 말이다.

이동훈은 토요일에, 고故 서재국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조문을 갔었고, 이어서 일요일인 오늘은 그가 본사에 있을 때 그를 이끌어 줬던 직장 상사, 오규동 비서실장의 위패 앞에 문상을 하고 있었다.

“오 실장님이 이렇게 가실 줄이야.”

“그러게. 비서실 난리가 났다며?”

“비서실뿐인가? 본사가 들썩거리고 있어.”

“뭐 그래봐야 내일 바로 정리가 될 테지만. 회장님이 건재하신데 뭐가 문제야.”

“그건 또 그렇군.”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뭐가?”

“오 실장 뒤 인선 말이야. 지금쯤 윤곽이 드러나거나, 아예 회장님이 공표를 하셨을 만도 한데 말이야.”

“그러네. 비서실장 자리를 비워 두실 분이 아니신데....”

조문 온 삼명그룹 쪽 사람들이 상갓집에서 술 한 잔 걸치고, 뜨끈한 육개장으로 입가심을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들려오는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이동훈.

그가 이내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하아아....”

그때 그 맞은편에 누가 와서 앉으며 말했다.

“그래가지고 바닥이 꺼지겠나?”

귀에 익은 목소리에 이동훈이 고개를 들자 현 삼명그룹 감사실장인 전지석이었다.

아까부터 전지석은 이곳 상갓집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다.

문상 온 사람들이 죽은 오규동 비서실장은 뒷전이고, 다들 전지석 감사실장 눈치 보기 급급했으니까.

분위기 상 이곳을 찾은 삼명그룹 쪽 사람들은, 전지석이 차기 비서실장이 유력하다고 보는 듯 했다.

“규석이가 안 보이네?”

이동훈은 전지석의 말에 동문서답하며, 강규석 미전실장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전지석의 미간에 빠르게 주름이 잡혔다가 사라지는 걸, 이동훈은 놓치지 않았다.

10년 전에도 그랬지만, 전지석은 상대의 말이 기분 나쁘면 지금처럼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글쎄? 나도 이번 주에 강규석 미전실장을 본적이 없어서.”

미전실장의 실종. 그리고 이어진 비서실장의 죽음. 그 두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게 과연 우연일까?

그 두 사람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들은 무려 삼명그룹의 2인자, 3인자 들이었다.

그런데 그 둘의 실종과 죽음을 두고 삼명그룹이 너무 조용했다. 마

치 내부적으로 그 둘에 대한 숙청작업이 은밀하게 진행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조용한 숙청작업이 이뤄 질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백승렬 회장이 너무 조용했다. 마치 그가 그 숙청작업을 주도했다는 걸, 인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축하해.”

강규석 미전실장과 전지석 감사실장, 그리고 이동훈은 입사 동기였다.

그 셋이 연수원 성적 1, 2, 3등이었고, 입사 5년 뒤 나란히 미전실에 입성하면서, 백승렬 회장의 눈에 들어서 승승장구 했었다.

하지만 그 셋 중 이동훈은 중간에 나가리 됐고, 나머지 둘 만 본사에서 여전히 잘나가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실종 됐고, 다른 한 명은 드디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고맙다.”

전지석은 이동훈이 얼마나 유능한 인재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그가 비서실장이 돼도 이동훈을 본사로 불러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본사에서 잘난 놈을 그 하나로 충분했으니까.

* * *

할 일 없는 이동훈과 달리 전지석은 바빴다. 그래서 이동훈과 잠깐 얘기를 나눈 뒤, 전지석은 곧장 상갓집을 나섰다.

그러자 전지석 보러 온 삼명그룹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면서 상갓집 안이 한산해졌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정승 집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도록 문상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또 ‘정승 집, 말이 죽었다면 먹던 밥을 밀쳐놓고 뛰어가지만, 정승이 죽었다면 먹던 밥 다 먹고 간다.’라는 말도 있는데, 이 모두 정승이 죽은 후에는, 그에게 더는 잘 보일 필요가 없는 까닭에 조문할 이유가 없고, 정승이 살아 있고, 개나 말이 죽으면 정승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조문한다는 뜻이다.

즉, 권력이 있을 때는 갖은 아첨을 다 하지만, 권력이 없어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야박하고 삭막한 세상인심을 풍자한 말들이다.

“여기서 격세지감을 또 느끼네.”

이동훈은 그 말을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종이 잔에 채워진 소주를 쭈욱 기울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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