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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퇴원 후 바로 JYB엔터 경호팀에 복귀한 정민지.
문대식 팀장은 주말까지 쉬라고 했지만, 기어코 출근한 그녀에게 갑자기 전화상으로 물었다.
=정민지씨. 전에 오토바이 잘 탄다고 한 거 맞아요?
“네. 뭐....레이싱 참가 경력도 있으니까요.”
=잘 됐네. 일하나 하세요.
“무슨 일이요?”
=사람 하나 태우고 어디 좀 데려다 주면 됩니다.
진짜 별 일 아니었다. 오토바이에 사람 하나 태우고 어디 데려다 주는 거야, 그녀에게 있어서 식은 죽 먹기였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백준열 대표일 줄이야.
그녀는 백 대표를 태우고 서울CC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었다.
그랬더니 백 대표가 주말 동안이라도 푹 쉬라고 했다.
문 팀장도 그렇고 이놈에 회사는 일은 안 시키고 자꾸 쉬라고만 하니, 정민지는 속으로 뿔이 났다. 왜냐하면 그녀를 제대로 봐 주지 않고 있다고 봤기 때문에.
정민지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타인이 자신을 동정하는 것이었다.
해서 백준열 대표를 내려 주고 나서, 휑하니 서울CC를 빠져 나온 정민지는 오랜만에 바이크의 속도감을 즐겼다.
부아아아앙!
사실 라이딩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요즘은 개성을 넘어 스타일과 섹시함을 입은, 여성 라이더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다.
정민지는 그런 여성 라이더들 중에서도 거의 선구자, 리더 급 존재였다.
바람을 특히 좋아하는 그녀에게, 라이딩 만큼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것도 없었다.
그녀는 서울CC에서 나와서, 서울 외곽을 한 시간 가까이 라이딩하며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리곤 그녀가 자주 가는 단골 음식점으로 갔다.
“민지 왔어?”
“네. 아저씨. 장사 잘 되시죠?”
“뭐 그냥저냥....”
단골 가게 사장의 그냥저냥 이란 말은 장사가 잘 된다는 소리였다.
정민지는 여기 오면 앉는, 자신의 지정석화 된 2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가게 사장이 물었다.
“또 바이크 타고 왔어?”
“네.”
“위험하게쓰리....조심 혀.”
“네. 아저씨. 저 물냉면 곱빼기에 만두 1인분이요.”
“알았어. 가격에 비해 양은 푸짐하게. 맞지?”
“네. 맞아요.”
정민지가 이 가게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곳 사장이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신경 써 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여기 사장만의 상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 오면 누군가가 자신을 챙겨 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적어도 이때만큼은 그녀도 혼자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어서 오세요!”
그때였다. 가게 안으로 단란해 보이는 한 가족이 들어왔다.
중년의 아빠, 엄마에 고딩, 중딩으로 보이는 아들과 딸.
정민지는 딱 봐도 알 거 같았다. 나가기 싫어하는 자식들을 억지로 끌고, 부모님들이 주말 외식 나온 걸 말이다.
* * *
중2병이 시작 된 딸내미와 그걸 거친 후, 자기 세계관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는, 과묵한 고등학생 아들 녀석.
하지만 그 두 자식들이 눈치 보는 유일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이 집의 서열 1위인 아내 되시겠다.
어제 회사에 사표를 내고 또 전 직장 후배와 술 한 잔 마시고 늦게 퇴근한 김효석.
생각이 많아져선지 늦게 잤고, 8시 전에는 꼭 일어났던 그가 9시가 넘어서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의 아내가 그를 깨웠다.
“여보. 일어나요.”
“어? 출근, 출근해야지.”
“주말이잖아요. 왜 또 출근해야 해요?”
사실 요 몇 달 동안 김효석은 주말도 없이 일을 해왔었다. 하지만 사표까지 낸 마당에 주말 근무는 무슨....
“아니. 안 가도 돼.”
“잘 됐네. 빨리 식사부터 해요.”
“어어.”
김효석은 차마 아내에게 어제 회사 그만 뒀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말하는 시기를 좀 늦추기로 했다.
‘그래. 좀 이따가 둘이 있을 때 얘기하자.’
주말이면 꼭 짬을 내서 같이 독서를 하는 아내.
김효석은 그때 가장 차분해진 상태의 아내에게, 자신의 퇴직 사실을 밝히기로 했다.
그렇게 김효석은 아내가 차려 놓은 따뜻한 아침 밥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막 양치질을 할 때였다. 그가 먹은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던 아내가 갑자기 말했다.
“여보. 우리 오늘 점심은 오랜만에 외식해요. 나 오늘 냉면이 당기는데....”
“그래? 그럼 양반면옥 가지 뭐.”
김효석은 생각하고 자실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아내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모두가 냉면을 좋아했고, 그런 만큼 그들이 선호하는 냉면집도 딱 정해져 있었으니까.
다행히 김효석이 정답을 말한 모양이었다. 아내가 신나하며 말했다.
“그래요. 거기 가요.”
물론 그 과정이 험난했다.
“싫어. 나 안 가.”
“....”
중2병 딸의 반항. 이어진 고등학생 아들의 침묵. 하지만 아이들 머리 꼭대기 위에 아내가 있었다.
“주혁이, 혜수. 핸드폰 가져 와.”
아내의 그 말에 절대 안 갈 거 같았던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며 태세 전환을 하더니 가겠다고 했다.
그런 아내가 오늘 따라 위대해 보이는 김효석. 그래서 결국 점심 먹으러 가기 전까지도, 김효석은 그녀에게 회사 관뒀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 * *
“자아. 맛있게 먹어.”
“네. 아저씨.”
정민지는 커다란 그릇에 수북이 담긴 냉면과, 그 옆에 2열로 줄서 있는 만두를 보고 꼴깍 군침을 삼켰다.
이곳 양반면옥의 냉면은 고명으로 듬뿍 올려 진 오이의 상큼함과, 맑은 국물이 심심하지만 깔끔한 게 특징이었다.
또 실타래처럼 얇고 고운 면발도 쫄깃하고 부드러워 호로록 잘도 넘어가는데, 거기에 여기 냉면과 찰떡궁합인 것은, 오동통한 손 만두.
만두피가 얇은 편은 아니지만 만두소가 슬쩍 비쳐지는, 투명한 고기만두로 짭짜름하게 간이 밴 고기, 파 등 깔끔한 냉면과 진짜 잘 어울리는 짝꿍이었다.
정민지는 물냉면의 면을 젓가락으로 잘 저은 뒤, 그 면을 한 젓가락 크게 입으로 가져갔다.
“후루루룩....후룩....후룩....쩝쩝쩝쩝....”
바로 면치기를 시작하는 정민지. 그녀는 면이 끊이지 않게 끝까지 입속으로 빨아 넣은 뒤, 쫄깃한 면을 맛있게 씹어 먹었다.
그러다 입 안의 면이 절반 이상 목으로 넘어 갈 때, 만두 하나를 집어서 입 속에 넣었다.
그리고 그 만두를 씹자마자 터져 나오는 진향 육즙의 향연에, 그녀가 너무 행복해서 눈까지 깜고 흐뭇해 할 때였다.
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난 중년의 남자. 좀 전까지 뭘 먹을지를 두고 티격태격 거렸던 가족끼리 온 손님들의 가장으로 보였던 그 중년 남자가, 왜 그녀 앞에 나타났는지 정민지가 의아해 할 때였다.
“실례합니다. 혹시 연예인이거나 연예인이 될 생각이 있으신가요?”
“네?”
“저는 QH....아니, 어제 엔터 회사를 관뒀지만, 곧 새로운 엔터 회사에 들어갈 예정인 김효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제가 볼 때 외모가 타고 났습니다. 연예인이 되실 수밖에 없는. 그래서 말인데 소속사가 없으시면 저와 함께 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정민지에게 연예인이 되라는 제의는 10년 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연예인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죄송해요. 저는 연예인이 될 생각도 없고, 또 지금 다니는 직장에 만족해요.”
“그, 그러십니까? 그래도 혹시 마음이 바뀌시면....”
중년 남자는 자신의 명함을 정민지에게 건네며, 그만 둔 회사로 말고 자기 핸드폰으로 연락 달라고 했다.
정민지는 그 중년 남자가 준 명함을 받아서, 대충 테이블 위에 두고 먹던 냉면을 마저 먹었다.
근데 작은 소란이 중년 남자, 그러니까 가족끼리 온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당신 회사 관 뒀어?”
“미, 미안. 어제 사표 냈어. 오늘 말하려고....”
한 가정의 가장이 회사를 그만 뒀다는 건, 경제력을 잃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가져 올 후폭풍은 엄청났다. 사람은 돈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니까.
“일단 먹고 집에 가서 얘기 해.”
“그, 그래.”
삽시간에 그 가족의 분위기가 살벌해지는 걸, 그들과 꽤 떨어져 앉아 있던 정민지도 느낄 수 있었다.
* * *
정민지는 양반 면옥의 환상 궁합인, 물냉면과 만두를 맛있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카운터로 갔고 거기 주인아저씨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맛있게 먹었어?”
“네. 잘 먹었어요.”
대답과 동시에 정민지는 카드를 건넸고, 주인아저씨는 그 카드를 받아서 계산을 했다.
그렇게 카드와 영수증을 받아 챙긴 정민지가 막 가게를 나서려는데....
“언니!”
누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고 뒤를 돌아보자, 중딩 여자 아이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자 아이의 정체는 좀 전에 가게 안에서 약간의 소란을 일으켰던, 그 가족 멤버 중 하나였다.
“왜 그러니?”
정민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아이가 자신을 찾을 이유가 없었기에 의아해 하며 일단 물었다. 그랬더니....
“이거 왜 안 가지고 가요?”
아이가 따지듯 정민지에게 물었다. 그 아이의 아빠가 정민지에게 주었던 명함을 한 손에 들고 서 말이다.
“아아....”
정민지는 냉면 먹느라 아이 아빠가 준 명함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걸 깨닫고, 한 손으로 뒷머리를 쓸며 무안해 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미안. 내가 냉면 먹느라 정신이 없었어.”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자요.”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아빠 명함을 다시 정민지에게 내밀었고, 정민지는 그걸 받아서 아예 자기 지갑에 넣었다. 그걸 보고 아이가 말했다.
“역시 언니는 좋은 분이네요. 그래서 말인데....우리 아빠 한번 믿어주세요. 저희 아빠 진짜 좋은 분이시거든요.”
아이의 그 말에 정민지는 오랜 만에 기분 좋게 웃었다.
“호호호호. 그래. 이 언니가 혹시 연예인 될 생각이 들거든, 그때는 꼭 너희 아빠랑 같이 일할게.”
“약속해요.”
아이가 불쑥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정민지는 웃으며 자기 새끼손가락을 아이의 손가락에 걸었다.
“그래. 약속할게.”
당연히 정민지는 눈앞의 아이와 한 약속을 자신이 지킬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왜냐하면 그녀가 연예인이 될 일은, 그녀가 죽었다가 깨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 당장 내일 모레에 아이 아빠와 자신이 다시 만나게 될 줄, 정민지는 꿈에도 몰랐다.
* * *
어떤 특정직업에 종사함으로써, 근로조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질환이 바로 직업병이다.
김효석은 자신에게 그런 직업병이 있다는 걸 오늘 깨달았다.
점심 때 오랜 만에 가족과 냉면 먹으로 간 가게. 그 곳에서 김효석은 빛나는 보석을 발견했다.
“완벽해!”
적어도 외모로 놓고 봤을 때 요즘 가장 핫Hot하다는 여배우 손진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저 여자가 더 나았다. 왜냐하면 손진아는 가꿔서 예쁜데, 저 여자는 하나도 가꾸지 않았는데 손진아 만큼 예뻤다.
그러니까 저 여자를 꾸미면 손진아보다 더 예뻐 질 수밖에 없었다.
김효석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뭐라고 횡설수설하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다행이라면 그 여자가 예의가 발랐고, 또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인성이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점이었다.
결과적으로 김효석의 스카우트 제의는 실패했다.
하긴 연예기획사 실무자도 아닌 그를, 뭘 믿고 저 여자가 같이 하겠다고 나서겠나.
그렇게 살짝 허탈해 하며 가족이 있는 테이블로 돌아갔는데, 도끼눈의 아내가 그를 보고 물었다. 회사 관뒀냐고 말이다.
그제야 김효석은 자신이 횡설수설 할 때 회사 관둔 얘기까지 한 게 생각났다.
결국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아내가 집에서 얘기하자며 그가 변명할 기회마저 앗아가 버렸다.
그 뒤 살벌한 분위기에서 냉면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던 김효석.
근데 그때 자신이 스카우트 제의를 했던 여자가, 식사 후 계산까지 하고 막 가게를 나서는 게 김효석의 눈에 보였다.
“아아....”
그걸 보고 있자니, 김효석은 다 잡은 대어를 놓친 거 같은 기분이 들며, 입에서 절로 아쉬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
근데 그때 그의 눈에 그의 딸이 포착 됐다. 딸이 그 여자를 불러 세우더니, 자신이 그 여자에게 준 명함을 들고 따지는 게 보였다.
“저, 저....”
기겁한 김효석이 막 몸을 일으키는 데, 딸아이의 말에 그는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었다.
그리곤 그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 두 줄기가 주르르 흘렀다.
그런데 정작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고 있었다.
“자아. 눈물 닦아.”
그때 옆에 아내가 그에게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 김효석이 아내가 건넨 휴지를 받아서 눈물을 닦을 때 그의 아내가 말했다.
“잘 했어. 만날 힘들게 일 시켜 먹고, 월급은 쥐꼬리만 하게 주는 그런 회사....더 좋은 회사로 가. 이왕이면 자기 알아주는 그런 회사로.”
“고, 고마워.”
“빨리 취직해. 참고로 월급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어. 애들 학원 좀 보내게.”
“그, 그래.”
그때 과묵하니, 집에서부터 여기 와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던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말했다.
“면 불어요. 빨리 식사하세요.”
“어어. 그래. 주혁아. 너도 어서 먹어.”
그 사이 돌아 온 딸아이와 김효석의 가족은 그제야 웃으며 맛있게 남은 냉면을 먹었다.
그때 가게 주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건 서비스.”
“와아. 고맙습니다.”
가게 주인이 서비스로 가져다 준 만두 한 접시에 김효석 가족의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 그런 김효석의 가족을 카운터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던 가게 주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민지. 그 아가씨, 진짜 착하단 말이지.”
그러니까 가게 주인이 준 서비스는 좀 전 가게를 나간, 정민지가 일부러 전화를 해서 부탁을 한 거였다.
다음에 그녀가 오면, 만두 값을 지불하기로 하고 말이다.
그런 정민지의 마음씀씀이가 마음에 든 가게 주인은, 당연히 다음에 그녀가 오면 만두 값을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