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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그 살짝 흥분 된 상태의 내게 찬물을 확 끼얹는 싸늘한 목소리가, 바로 내 앞에서 들려왔다.
“....같은 새끼가....뭘 봐 새끼야?”
지가 내 앞에 나타나 놓고 뭘 보다니? 완전 시비조다.
“왔어?”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 그나마 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최대한 정중한 말로 나는 상대에게 대꾸를 했다.
“왔어? 하아. 이 새끼가 갈수록 말이 짧아지네. 너 좀 처 맞아야겠다. 이리 와.”
백준열의 둘째 형, 백준호가 괜히 오버를 한다.
사람들 많은 데서 나를 밑에 깔고 가겠다는 저열한 수작질이다. 예전에 백준열이라면 또 모를까? 이런 치졸한 짓에 당할 내가 아니다.
툭!
백준호가 내 귀를 잡으려 뻗은 손을 내가 쳐 버렸다. 그러자 눈이 확 돌아간 백준호. 그가 넘어선 안 될 선을 먼저 넘었다.
“이 새끼가 지금 형을 쳐? 죽어!”
대뜸 나를 향해 주먹질을 날리는 백준호. 나로서는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딴 곳도 아닌 외조부의 장례식장이 아닌가? 경건한 마음으로 와도 모자랄 판인데, 오자마자 동생에게 시비를 걸고 이렇게 주먹을 날리다니.
휙!
느려터진 그 주먹에 맞을 내가 아니다. 근데....씩씩거리는 녀석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
‘어쭈?’
그 냄새는 어제 마셔서 나는 묵힌 냄새가 아니었다. 좀 전에 마신 술 향이 그의 입에서 훅 풍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백준호는 외조부를 조문 오면서 술을 쳐드시고 온 거다. 간 크게도.
‘미친 새끼....’
이러면 내가 녀석을 상대하기 더 수월해졌다. 그때 녀석이 연신 걸쭉한 욕설을 내게 퍼부으며, 다시 내게 주먹을 날리려 했다.
“....같은 새끼가 지금 피해? 좋다. 어디 이것도 피해....”
퍽!
나는 백준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녀석의 코에 잽을 먹였다.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워낙 타이밍이 좋다보니, 백준호는 넋 놓고 그 주먹을 자신의 안면에 허용했다.
“....으윽....”
비명과 함께 백준호가 눈을 질끈 감고는 비틀거릴 때, 내 오른 주먹이 녀석의 턱에 제대로 꽂혔다.
빠악!
“켁!”
그리 세게 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워낙 타격점과 타이밍이 좋다보니, 주먹의 데미지가 그대로 백준호의 뇌에 전달 된 모양이었다.
백준호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더니, 이내 다리가 풀리면서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
그때였다. 내 앞에서 다른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준열! 너 이 새끼....지금 준호를 때린 거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당장이라도 날 때려죽일 거 같은 기세를 대놓고 뿌려대며.
바로 백준열의 큰형이자, 삼명가의 장남인 백준경이 내 앞에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 * *
자기가 장남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유독 형제간의 서열을 따졌던 백준경.
그로인해 가장 크게 피해를 본 건 막내인 백준열이었다. 실제 어린 시절 백준열은 두 형들에게 그 서열 때문에 수시로 갈굼을 당했고, 그게 트라우마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다 장성한 뒤에도, 백준열은 두 형 앞에만 서면 위축되고 작아졌다.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백준열은 예전의 그 백준열이 아니었다.
“말은 똑바로 해. 내가 때린 게 아니라 준호형이 날 때리다가 쳐 맞은 거야.”
“뭐, 뭐라고?”
“왜? 큰형도 치게? 자신 있으면 어디 쳐 봐?”
나는 백준경에게 아주 대 놓고 얼굴을 디밀었다. 물론 그가 진짜 때릴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백준경은 백준호와 달리, 자신이 직접 손을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니까.
어릴 적 백준열을 괴롭힐 때도, 꼭 백준호를 이용했었다.
그런 그의 손발 같았던 백준호가 나가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백준경이 할 수 있는 건 저렇게 얼굴만 붉히는 거뿐이었다.
백준호와 다르게 백준경은 술 같은 걸 마시지 않아 멀쩡했고, 지금 주위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지금의 백준경은 백준호처럼 안면몰수하고, 내게 대 놓고 욕도 못한단 거다.
그 사이 백준호 쪽 경호원들이 주저앉은 백준호를 일으켜 세웠다.
“으윽!”
내 주먹에 맞고 쪽팔리게 엉덩방아를 찧은 백준호.
그가 내가 백준경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경호원들을 뿌리치며 외쳤다.
“이거 놔! 새끼들아!”
그리곤 비틀거리며 도끼눈을 뜨고, 내게 삿대질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너, 너 이 개새끼. 오늘 내 손에 죽....”
퍽!
그때 백준호의 뒤에서 등장한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쳤다.
“아악! C발! 누구야?”
백준호가 버럭 화를 내며 뒤를 돌 때였다.
“나다. 어쩔래?”
“헉!”
뒤돌아서 막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친 자의 얼굴에다, 주먹을 먹이려던 백준호.
그랬던 그가 기겁을 하며 쳐들었던 주먹을 잽싸게 내렸다.
왜냐하면 그의 뒤통수를 갈긴 사람이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백승렬 회장이었던 것.
“왜? 동생 치듯 아비도 쳐 보지?”
“아, 아버지....”
“됐고. 큼큼....너 술 마셨니?”
“그, 그게....”
백준호는 어떡하든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백승렬 회장은 아들이라고 사정 봐줄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면 치운다. 그게 백승렬 회장의 경영 모토였고, 그건 지금도 철석같이 지켜졌다.
“쯧쯧. 이 새끼. 치워.”
백승렬 회장의 명령에 뒤에 삼명그룹 경호팀원들이 나섰다.
그러자 백준호 주위의 경호원들이 썰물처럼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그런 경호원들의 반응에 정작 놀란 건 백준호.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 놀란 얼굴 표정을 짓는 것과, 삼명그룹 경호팀원들에게 붙잡혀 장례식장 밖으로, 개처럼 끌려 나가는 것뿐이었다.
“너는 장남이란 놈이....동생들 싸움하나 못 말리고....쯧쯧....못난 놈!”
그 사이 백승렬 회장은 장남인 백준경의 면전에서, 그를 제대로 면박주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백준경은 그런 백승렬 회장에게 납작 엎드렸다.
그 마저 백준호처럼 장례식장 밖으로 개처럼 끌려 나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 *
명실 공히 삼명그룹의 2인자 오규동 비서실장.
그는 자신의 후임으로 대두되던 미전실장이, 백 회장 심기를 건드려서 낙마해 버리면서, 사실상 2인자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미전실장의 인사에게 관여할 수 있게 되면서, 그룹 내에 비서실을 견제 할 수 있었던 두 곳 중 한 곳인, 미전실에도 추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게 되었다.
“미전실장으로 누가 좋을까?”
출근 후 그렇게 행복한 고민 중이던 오규동 비서실장. 그런 그에게 급보가 전해져 왔다.
바로 백승렬 회장의 장인이자, 전 대통령이었던 서재국의 타계.
오규동은 즉시 그 사실을 삼명家에 알렸다.
한데 백승렬 회장의 반응이 어째 뜨뜻미지근했다. 장인이 죽어서 슬픈 건지, 아니면 기쁜 건지 도통 그의 기분을 유추해 낼 수 없었던 것.
해서 삼명家 본가에서만큼은 2인자로 불리는, 최 집사에게 도움도 청해 봤는데 그 역시 모르겠다는 대답만 내놨다.
한데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백승렬 회장이 오늘 창원 출장이후, 아들들과 같이 문상을 가겠다고 하면서 제일 먼저 챙긴 아들이, 바로 막내 백준열이었다는 것.
그게 뭘 뜻하겠는가? 백승렬 회장의 후계구도가 사실상 막내에게 많이 기울었다는 걸 뜻했다.
“C발. 줄 잘못 섰네.”
하지만 오규동이 손을 잡은 쪽은 장남인 백준경이었다. 그 사실은 이미 그룹 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었기에, 지금 노선을 갈아타는 건 자칫 제 이익만을 따져, 주견과 지조가 없이 보일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백준경을 최대한 밀어주는 게 맞았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면 그때는 시세의 흐름에 따라, 백준열에게로 넘어가면 됐다.
어째든 누가 뭐래도 삼명그룹의 2인자는 자신이니까. 그 2인자 자리만 굳건히 한다면....
오규동은 백승렬 회장의 지시에 따라 회장의 세 아들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근데 백준열에게만 오전에 연락을 해서 미리 힌트를 줬다.
왜냐하면 지금부터라도 알려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백준열에게 자신이 그의 적이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그 뒤 백승렬 회장은 창원으로 내려갔고, 그곳 현지공장 순시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문상에 대한 정확한 약속 시간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을 오규동 비서실장은 느긋하니 점심을 챙겨 먹고 나서 백 회장의 세 아들들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서재국 전 대통령을 문상하러 서진 병원으로 갈 수 없었다.
백 회장이 급하게 시킨 일이 있어서 말이다. 해서 그는 내일 오전에 등산 가기 전 잠깐 서재국 전 대통령의 영정이 있는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하기로 했다.
“실장님. 차량 준비 됐습니다.”
그때 오규동의 비서실 직원 중 한 명인 윤 과장이 말했다.
“나 가고 나면 좀 이따가 다들 퇴근 해.”
“네. 실장님.”
오규동의 퇴근이란 말에 비서실 안 직원들이 전부 기뻐하며 대답했다.
이곳 비서실 안에는 오규동의 지금이 있게 만들어 준 핵심인재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떠 받쳐 주고 있기에, 오규동은 삼명그룹 2인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걸 알기에 오규동은 자신의 비서실 직원들을 알뜰히 잘 챙겼다.
그래서 비서실의 직원들의 연봉 수준도 미전실과 거의 같게 만들어 놓았다.
대신 주말에도 나와 일해야 하는 게 태반인 미전실과 달리, 오규동은 비서실 직원들에게 만큼은 주말을, 내내 쉬게 하거나 주말 중 하루만 일을 하게 하는, 탄력근무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이러니 비서실 직원들이 진심으로 오규동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거고.
그로인해 삼명그룹에서 비서실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져 나가고 있었다.
오규동은 경호실에서 보낸 경호원 십여 명에게 둘러싸인 채, 삼명그룹 본사 1층 로비를 지나갔다.
그런 그를 향해 삼명그룹 직원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그걸 보고 흡족해 하며 오규동은 자신이 마치 회장이라도 된 듯 뻐기며 본사 입구를 나섰다. 그러자 대기 중인 3대의 차량.
삼명그룹 본사도 임원에게는 차량과 기사 한 명밖에 제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규동 비서실장은 차량 3대에 경호원 10명을 늘 달고 다녔다.
누가 봐도 비서실장이 아니라, 그룹 회장에 걸 맞는 의전이었다.
이런 식의 거창한 의전을 과연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이 허락했을까?
하지만 그걸 두고 뭐라고 하는, 삼명그룹 내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로서는 그 사실을 백승렬 회장에게 알릴 길이 없었으니까.
직보를 한다고 해도, 결국 최종적으로 비서실장의 허락이 있어야만 백승렬 회장에게 전달되는 데, 그 당사자인 비서실장이 그걸 걸러 버리면 직보한 사람만 좆 됐다.
그런 시스템을 알게 된 후, 누구도 감히 오규동 비서실장이 하는 일에 대해 이의를 재기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바로 다음날, 짐 싸서 여기를 떠나야 했으니 말이다. 그게 일개 직원이 아닌 임원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오규동 비서실장이 미전실과 감사실을 동원해 털면 잘리지 않을 직원, 임원이 없었으니까.
설혹 털어도 나오는 게 없다고 해도,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오규동은, 그 직원이나 임원을 삼명그룹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가진 오규동 비서실장.
그가 달리 삼명그룹 2인자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 * *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편히 쉬자, 빠르게 회복이 되어가는 중이던 강지영.
오전에도 내내 자던 그녀는 점심을 먹고 나자, 완전 정상 컨디션을 되찾았다.
해서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 키다리 아저씨나 마찬가지인, 백준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대표님. 저 강지영이에요.”
=아. 네. 지영씨. 몸은 좀 어떠세요?
“치료 받고 많이 좋아졌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네. 막 먹었습니다.
“저돈 데.”
=그러시군요. 한데 무슨 일로....
“어제 일이 고마워서요. 대표님 때문에 살았어요. 저의 생명의 은인이세요.”
=제가 지영씨에게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요.
“죄송해요. 직접 뵙고 인사드리는 게 도리에 맞는 건데. 제가 지금 상태가 안 좋다보니....”
=괜찮습니다. 시간 나면 제가 한 번 병문안 가도록 하겠습니다. 따로 드릴 말씀도 있고.
“저....혹시 오시려거든 월요일 이후에 오세요. 여기 돌아가신 전직 대통령님 장례식장이 있어서 차 댈 때도 없고, 무지 혼잡스럽다고 하네요. 다들.”
=네? 아아. 혹시 서진병원에 계십니까?
“네. 맞아요.”
=으음. 그럼 이따 4-5시 사이에 거기 한 번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네?”
=오늘 4시에, 제가 말씀 하신 그 전직 대통령님 조문 하러 가야 하거든요. 문상하고 나서 지영씨 있는 병실에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래요. 그럼.”
그렇게 백준열과 통화를 끝내고 나서, 갑자기 백준열 대표가 오겠다니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하는 강지영.
그녀는 마침 그녀의 링거를 갈아 주러 온 간호사를 보고 수줍게 부탁을 했다.
“저, 저기....간호사 언니. 파운데이션 어떤 거 쓰세요?”
“네?”
“루즈도 좀....”
“아아....”
같은 여자인 간호사는 지금 강지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곤 그녀가 쓰는 화장품의 종류를 쭉 나열했고, 강지영은 그 중에 몇 가지를 이따 점심 먹고 나서 빌려 달라고 했다.
“그래요. 근데 누가 오기에 우리 지영씨가 화장까지 하려는 걸까? 정말 궁금하네요.”
“....”
간호사의 그 말에 강지영은 단지 고개만 푹 숙인 채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호호’ 웃으며 간호사는, 링거를 바꿔 달고 강지영의 병실을 나서며 말했다.
“어디 얼마나 잘생긴 왕자님이 올지 두고 볼게요.”
“....”
그 말하고 병실을 나간 간호사.
강지영은 별로 덥지도 않는 데 빨개진 얼굴로, 한 동안 그 출입구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애먼 창밖만 계속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