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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아직 점심시간까지는 2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한 홀 더 돌고 점심 먹고 나서, 오후에도 칠지는 그때 정하자.”
“좋아.”
그렇게 민혜주와 나는 한 홀을 더 돌았다. 홀인원에 이글까지 한 터라 골프 치는 게 신이 났다. 하지만 흥분한 탓인지 일곱 번째 홀에서는 그만 보기를 범하고 말았다.
민혜주는 프로답게 간단히 -1타를 줄였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응. 안 그래도 나도 배고팠어.”
채를 들고 전동 카트로 가는데 민혜주가 말했다.
“내가 운전할게.”
“그럴래?”
나는 운전석을 민혜주에게 내주고, 대신 그녀의 채를 받아서 카트에 실린, 그녀의 캐디백에 넣어주었다. 그리곤 운전석 옆에 와서 앉자 카트가 출발했다. 가는 동안 민혜주와 나는 주로 먹는 얘기를 나눴다.
“여기가 딴 건 몰라도 떡볶이와 비빔밥은 잘하는 거 같아.”
“그래?”
“응. 특히 궁중떡볶이랑 전주비빔밥은 내가 먹어 본 어떤 클럽 식당보다 좋았어.”
“그럼 그 두 개 먹어야겠네?”
“근데 또 가서 봐야 알아. 새로 생긴 메뉴가 있을 수 있거든.”
역시 프로 선수답게 각 골프장에 대해 잘 알았다. 특히 골프장 내 옥내 시설에 대해서도 민혜주는 생각보다 아는 게 많았다.
“서울CC는 깨끗하긴 한데 시설이 너무 노후 됐어. 매번 리 모델링 할 거라는데, 아마도 엄두가 안 나겠지. 손댔다가는 골치 아플 테니까.”
“그런가?”
“그냥 밀어버리고 다시 짓는 게 답인데 말이야. 그런데 그걸 여기 오너도 안다는 거지. 단지 이걸 내 놔도 안 팔리니까 문제지.”
“뭐? 서울CC가 지금 매물로 나왔다고?”
“어. 근데 여기 생각보다 덩어리가 크잖아. 거기다가 오너도 헐값에는 팔지 않으려 하고.”
“여기 오너면....김 전 대통령 아들인 김형철?”
“어?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알 수밖에. 원래 여기 우리 집안 거였잖아.”
“뭐? 서울CC가 삼명그룹 거였다고?”
“어. 군사정부 때 뺏겼다가, 문민정부 때 되찾으려 했는데....글쎄 그놈들이 더 하더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러니까 김 전 대통령시절에 소통령으로 불렸던 김형철이 여길 자기가 챙긴 거네?”
“그런 거지. 그 뒤 알다시피 여기가 노후화 되었고 아버지는 여길 별로 좋아하시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 둔 거고.”
“지금이라도 되찾으면 되지 않아?”
지금은 충분히 가능했다. 소송으로 가던, 힘으로 빼앗든지 말이다.
내가 봤을 때, 법적으로 내 외조부가 되시는 서재국 전 대통령의 죽음 뒤에는, 아마 백승렬 회장이 있을 거다.
이렇게 전 대통령도 없애 버릴 수 있는 백승렬 회장이, 이미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반 푼이 아들 녀석 하나 못 없앨까?
단지 백승렬 회장은 선대 회장과 백준열과는 달리 골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백승렬 회장은 골프뿐만 아니라 야구, 축구, 농구, 배구, 탁구 등등의 구기 종목은 대체로 싫어했다.
대신 복싱과 레슬링, 유도 등 몸 쓰는 운동을 좋아했고 승마도 즐겼다. 그렇다보니 재벌가 치고 백승렬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골프 클럽은 달랑 2개 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는 제주도에 있었고.
그러니까 제주도 빼고 전국에서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 소유의 골프장이 달랑 하나란 소리였다. 그것도 서울에서 먼 대전에 있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백승렬 회장은 골프 칠 일이 없단 소리였다.
* * *
서울CC는 건물은 노후화 되었지만 그 외 옥외 시설들, 그 중에 골프장 관리는 정말 잘 되어 있었다.
딱하나 옥내 시설이 너무 낡아서 그것만 어떻게 현대화 한다면, 서울에서 손꼽히는 골프 명소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단지 이곳 오너가 생각보다 세게 가격을 불러서, 골프 사업가들이 언감생심 욕심을 못 내고 있었지만.
“얼마나 불렀기에 그래?”
“그야 나도 모르지. 내가 골프 선수지 골프장 관리자는 아니잖아?”
“그렇다는 소리는 여기 관리자는 알 거란 얘기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민혜주가 운전을 잘한 건지 몰라도 금방 옥내 시설에 도착한 우리는 카트를 주차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한 홀을 더 도는 동안, 경찰 쪽 사람들은 다들 여길 뜬 모양이었다. 건물 안에서 그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민혜주의 말처럼 신 메뉴가 출시되었다.
“어머. 쌈밥에 가마솥 밥을 준다네?”
그래서 민혜주는 쌈밥을, 나는 민혜주의 추천을 받아드려서 궁중떡볶이와 전주비빔밥을 시켰다.
“양 많은데. 오빠. 다 먹을 수 있겠어?”
“애는. 그걸 내가 왜 다 먹어. 반반씩 먹고 반반은 남기면 되지.”
“아아. 맞다. 오빠 재벌 3세였지?”
“민혜주씨. 나보고 자꾸 재벌 3세 운운하시는데, 당신 소속사 대표가 누구죠?”
“어어. 그러네. 오빠는 그냥 재벌 3세가 아니었네. 어떻게 오빠 말고, 대표님으로 불러 드려요?”
“아니. 혜주한테는 오빠로 불리고 싶지. 단지 내가 재벌 3세라서 부자가 아니란 걸 어필하고 싶었어.”
“뭐 따지고 보면 오빠야 자수성가형 재벌 3세긴 해. 나야 자세한 거까지는 모르지만, 재벌 3세 중에서 오빠만큼 성공한 사람은 본적이 없거든.”
골프를 대중화 하려는 움직임은 많지만, 그래도 골프는 여전히 부자들의 전유물이다. 그 부자들 중에는 재벌도 있었고.
민혜주 정도 되는 미모의 프로 골프 선수라면 재벌들이 가만 둘리 없었다.
그래서 민혜주도 재벌들과 꽤나 골프를 쳐 봤다.
그랬기에 아까 청와대 쪽 사람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 그녀가 재벌들 하는 얘기를 듣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래서 민혜주는 자신이 한국 최상류층에 대해 나름 많이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알았어. 밥은 내가 살 테니까 그만 칭찬해.”
“고마워. 잘 먹을게.”
주문하고 민혜주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잠깐 나눴는데, 생각보다 음식이 빨리 나왔다. 근데 빨리 나온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전주비빔밥....”
아무래도 빨리 나올 수밖에 없는 메뉴다 보니 전주비빔밥이 먼저 나왔고, 나는 그걸 비벼서 민혜주가 나눠먹었다. 그러자 뒤이어서 궁중떡볶이가 나왔고, 그걸 보고 못 참겠는지 민혜주의 젓가락이 침입해 왔다.
“하나만 먹을게.”
그래놓고 정작 꽤 많이 먹은 민혜주. 그 덕분에 그녀가 시킨 쌈밥의 가마솥 밥이 나왔을 때, 그녀는 배가 제법 불러 있었다.
그래도 자기가 시킨 거라고 꾸역꾸역 쌈밥을 먹는 그녀를 보고 나도 좀 거들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둘이서 3인분의 식사를 하고 말았다.
나야 남자니 상관없는데. 민혜주는 과식을 한 듯 속이 더부룩하다고 했다.
해서 이곳 프런트로 가서 구급약품 중 소화제도 하나 얻고, 마침 그곳에서 이곳 골프장의 잔디 관리를 20년째 하고 있다는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커피 한 잔 사드리겠다며 얘기 좀 나누자고 한 것이다.
직함은 시설관리본부장이라는데, 자신은 별 권한이 없다는 그분에게 내가 은근히 물었다.
“여기 오너가 골프장 팔겠다고 내놨다던데, 혹시 얼마에 내 놓았는지 아십니까?”
“그럼요. 하도 얼토당토않은 금액이라 여기 직원이라면 다 압니다.”
“그래서 얼만데요?”
“2천억이요.”
“네?”
백준열의 기억에 따르면 현재 골프장의 홀 당 매매가격은 30억 정도였다.
실제 홀 당 매매가격이 최고치를 기록한 곳은, 자산운용사인 센트로이드가 올해 초에 인수한 남광CC(18홀)로 홀 당 35억, 즉 총 매매가격 630억이었다.
그런데 그곳보다 시설 면에서 더 열악한 서울CC를, 1천억도 아닌 2천억에 팔겠다는 건 안 팔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걸 알기에 내 눈앞에 시설관리본부장이란 분이나, 나머지 여기 서울CC 직원들도 이곳이 팔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눈치였다.
뭐 그들 입장에서야 매달 월급만 꼬박꼬박 받으면 되니까.
사실 말해서 시설을 새로 갖추고, 손님이 많아지면 그들만 바빠지지.
여기 오너가 그들에게 월급 더 줄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내 눈에는 여기 직원들이 다들 설렁설렁 일하는 거처럼 느껴졌다.
‘서울CC....으음....’
백준열의 의념이랄까? 그의 몸이 여기를 소유하고 싶다는 티를 팍팍 냈다.
하지만 이곳을 인수하려고 2천억이란 돈을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형철이라....’
문민정권의 초대 대통령인 김영오 대통령의 차남으로, 소통령으로 불리며 아버지 집권 때 참 많이도 설쳤던 인물이었다. 그게 아버지 얼굴에 똥칠하는 건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 그가 얌전히 지내고 있다 싶었더니, 이제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괜히 설쳤다가 여기 서울CC처럼, 당시 녀석의 아버지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자기 앞으로 돌려놓은 부동산들을 뺏길까 싶어서 말이다.
권력에 의해 빼앗은 거니, 새로운 권력자가 도로 뺏어간다고 해도 문제 될 게 없지 않은가?
물론 자기 명의인 서울CC를, 김형철이 순순히 뺏기지는 않을 테지만.
‘발악하면....실종처리 시켜버리지 뭐.’
김형철 하나 없어졌다고 해서, 어차피 대한민국에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실종자 명단에 실종자가 한 명 더 늘어날 뿐.
* * *
내 몸이 흥분해서 난리다. 백준열이 이토록 가지고 싶다니, 서울CC를 내 걸로 만들기로 했다.
뭐 생각해 보고 따져 봐도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게 소송을 통해서가 됐던, 아니면 권력을 동원하던, 아니면 힘으로 빼앗은, 어떤 식으로 내 걸로 만들지에 대해서는, 추후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자 흥분했던 몸이 빠르게 진정 되었다.
보아하니 이곳 서울CC와 관련해 백준열에게 뭔가 사연이 있는 거 같았다.
하지만 당장 그 이유가 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시간이 좀 더 걸릴 모양이었다.
“천천히 밝혀도 돼.”
아무래도 내가 서울CC를 인수하려고 본격적으로 움직여야만 백준열의 기억도, 그때 그 이유를 내게 밝힐 거 같았다.
“오빠?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식사를 끝내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민혜주.
그녀가 내가 한 혼잣말을 얼핏 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뭐.
“이제 어쩔 거야? 1시부터 라운딩 다시 돌 거야?”
18홀 도는데 4시간 30분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 우리에게는 2시간 30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1시부터 시작해서 둘이서 빠르게 돌면 3시 30분까지 18홀은, 시간상 다 돌 수 있었는데, 역시 변수는 백승렬 회장이었다.
그가 언제 자신의 장인인 서재국 전 대통령의 문상을 갈지 아직 알 수가 없으니....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하니, 오규동 삼명그룹 비서실장이었다. 나는 바로 그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막내 도련님. 제가 아까 아침에 말씀 들렸죠? 오후에 문상 가시는 거 말입니다.
“네. 근데 정확히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아서....”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오후 4시까지 서진병원 장례식장으로 오십시오. 늦으시면 안 됩니다. 다른 두 분 도련님들도, 그때 다 같이 조문하기로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원래는 문자 메시지로 알려 주기로 해 놓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내게 직접 전화를 해 온 오규동 비서실장.
그의 말에 따르면 아무래도 백승렬 회장이, 아들들 데리고 한 번에 우르르 장례식장에 가서, 문상하고 바로 나올 모양이었다.
아마 그 뒤로는 그쪽과는 발 딱 끊어 버리겠지.
이제 그쪽에 바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오 비서실장과 통화 후, 내가 민혜주를 보고 말했다.
“딱 3시까지만 골프 치자. 4시에 외조부님 문상 가야 해서.”
“3시라....빨리 치면 가능한 시간이긴 한데. 오빠. 그럼 지금 바로 치러가요. 우리.”
“지금?”
“네. 1시까지 기다릴 거 있어요? 우리 캐디 필요 없잖아요?”
그 말을 하면서 유독 눈빛을 빛내는 민혜주.
하긴 캐디는 우리끼리 뭘 하는 데 방해나 되는 존재 일뿐.
해서 우리는 캐디 서비스를 배제한 채, 둘 만 전동 골프 카트를 타고 8번 홀로 향했다.
* * *
8번 홀은 파4로 민혜주가 먼저 티샷을 위해 티잉 그라운드(Teeing ground)에 섰다.
볼을 티업해 제1타를 치는 장소인 티잉그라운드는 블랙(풀백 티), 블루(백 티), 화이트(프론트 티), 옐로우(시니어 티), 레드(레이디 티)로 분류 되어 있었다.
골프장 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블랙 티는 챔피언, 즉 프로 골퍼들이 티샷 하는 곳이고, 블루 티 역시 챔피언, 잘 치는 아마추어 골퍼가 티샷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화이트 티는 레귤러로, 일반 아마추어 골퍼가 티샷 하는 곳, 또는 여성 프로 골퍼가 티샷 하는 곳으로, 그 외에도 골드 티로 시니어 분들, 정확한 나이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60세 이상 골퍼 분들이 티샷 하는 곳과 레드 티로 레이디 즉, 여성 아마추어 골퍼가 티샷 하는 곳이 있는데, 우리는 그냥 화이트 티에서 티샷을 시작했다.
확실히 골프장의 정경은 좋았다. 시야가 딱 트인 것이 바람만 시원한 게 아니라 눈도 시원하달까?
“오빠. 해방감 같은 거 느껴지지 않아요?”
티샷하기 전 뒤로 물러나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민혜주가 내게 불쑥 물어왔다.
“어어. 뭐....”
“주로 사업하시는 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골프 치러 오면 뭔가 시원하고 해방감 같은 걸 느낀다고. 그리고 꼭 백구백상(白球百想) 얘기를 해요.”
“백구백상?”
“어느 돌아가신 정치인이 한 말인데 ‘티 위의 흰 공을 보면 백 가지 생각이 든다.’며 한 말인데, 신기하게 정작 정치인들은 골프 치러 오면 그 말을 하지 않는데, 유독 사업하는 사람들이 그 말을 자주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민혜주는 그들이 첫 티샷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먼저 치기 싫어서 그런 식의 얘기를 하며 시간을 끄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을 덧붙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