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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고지영은 부부동반 만남에서, 시종일관 저자세를 유지 중인 남편이 안 됐다는 생각과 함께 눈앞의 재벌가 여식이라는, 상대 부부 중 그 아내의 당당함이 너무 부러웠다.
그러면서 그 아내에게서 백지연의 느낌이 팍팍 풍기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재벌가 여식의 오만함의 여유를 고지영도 느낀 것이다.
그것은 동양家의 본가에서 동서들에게 느꼈던 무시와 모멸감과는 확실히 달랐다.
“고지영씨. 생각보다 사람이 좋네요.”
백지연 때문인지 몰라도 고지영이 상대 아내를 편안하게 대하자, 그쪽에서 고지영에게 바로 호감을 보였다.
아마 상대도 고지영이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자신을 대해 주고 있다는 걸 느낀 것 같았다.
그렇다보니 부부동반 만남의 분위기가 한결 좋아졌다.
왜냐하면 상대 부부의 주도권은, 알고 보니 그 남편이 아닌 아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
그걸 남편 윤지승도 눈치 채고 나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영이를 데려 오기 잘했구나.’
그러면서 개똥도 약에 쓸데가 있구나 싶었다. 그때 부부끼리 대화가 워낙 화기애애하게 흐르자, 상대 부부의 아내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칵테일 말고 우리 와인 마시러 갈래요? 근처에 괜찮은 와인 바가 있는데?”
어떻게 그 제의를 거절하겠나? 이 자리를 마련하려고 윤지승이 그 동안 들인 공이 얼만데 말이다.
“그, 그럼요. 갑시다. 가요.”
아내인 고지영에게는 물어 보지도 않고 자기 혼자 결정해서, 흔쾌히 그 제의를 승낙해 버리는 윤지승.
동양 시멘트가 국내 내수 시장 점유률 10%를 차지하고 있다면, 대양 시멘트는 40% 가까이를 점유하고 있었다.
체급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기술면에서도 대양 시멘트가 동양 시멘트보다 많이 앞서 있는 상황.
그 격차를 줄여야 만, 동양 시멘트가 국내 내수 시장을 더 잠식해 나갈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 윤지승은 대양 시멘트으로부터 ‘친환경 시멘트 공법’의 기술 이전을 받길 원했다. 하지만 그걸 쉽게 내 줄 대양 시멘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윤지승도 아니었고.
해서 그는 대양 시멘트를 곧 물려받을 것이 유력한, 차명수 상무와의 만남을 계속 추진해 왔다.
그러다 오늘 그쪽에서 부부동반 만남이라면, 만나주겠다는 연락을 보내왔고 드디어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어렵게 마련 된 자리 인 만큼, 윤지승으로서는 반드시 좋은 성과를 거둬야 했다.
그래서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지금도 열심히 마시고 있었다.
그렇게 칵테일 바에서의 1차 만남을 끝내고, 2차로 와인 바에 가기 위해 두 부부가 백제 호텔 라운지를 나서려는 데, 거기서 윤지승은 아까 아내가 만났던 그 싼 티 나는 여자와 또 마주쳤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슬그머니 그들 부부를 피해 가는 그 여자를, 이번에는 상대 부부의 아내가 붙잡았다.
‘맙소사!’
그리고 그 상대 부부의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윤지승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저 여자가 삼명家의 여식이었다고?’
오늘 만난 상대 부부의 아내도 재벌가의 여식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와 삼명家의 여식은 비교 불가다.
국내 굴지의 대 재벌. 누구도 감히 그 아성에 도전하지 못하는 철옹성이 삼명그룹이었다.
거기다가 삼명家의 여식은 계열사 대표이기도 했다. 바로 삼명 호텔 대표 말이다.
‘좆 됐다.’
그러면서 윤지승은 힐끗 자기 아내 고지영을 원망스런 눈으로 쳐다봤다.
왜냐하면 진작 말했으면, 이 자리가 이렇게 불편한 자리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 사이 상대 부부의 아내와 삼명 호텔 대표끼리 대화가 쭉 이어졌다.
그러다 상대 부부의 아내가 삼명 호텔 대표에게 제의를 했다.
“우리 와인 바 갈 건데 같이 갈래?”
그 제의를 받은 삼명 호텔 대표이자 삼명家의 여식인 백지연이 갑자기, 빤히 윤지승을 쳐다봤다.
그러자 윤지승은 자기도 모르게 쫄아서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그때 백지연이 말했다.
“됐어. 난 피곤해서 쉬려고. 아참. 지영 언니. 우리 할 얘기 있지 않아요? 나랑 같이 내 방으로 가요. 괜찮죠?”
누구 말인데 안 괜찮겠는가? 남편인 윤지승은 가만있는데 상대 부부가 더 호들갑이었다.
“어머. 너 피곤했구나? 그럼 어서 들어가서 쉬어.”
“그럼 되죠. 우리야 또 만나면 되니까. 그렇지요? 윤 대표?”
“네? 네. 뭐....얼마든지 말씀 나누십시오.”
상대 부부도 벌벌 기는 백지연이었다. 윤지승이 무슨 똥배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자리에서 그걸 거절할 입장이 못 됐다.
“가요. 언니.”
백지연은 좀 더 적극적으로 고지영에게 다가가서 그녀 손을 잡았다.
고지영은 잠시 남편인 윤지승을 쳐다보다 ,이내 굳은 얼굴로 백지연을 따라 움직였다.
그런 고지영을 윤지승이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상대부부의 아내가 싸늘하게 말했다.
“도도한 건 여전하네. 아이 재수 없어. 여보. 나 와인 마실 기분 아냐.”
“그, 그래? 알았어. 윤 대표. 우리 여기서 이만 헤어집시다.”
“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아직 시작도 못한 윤지승. 그런데 이렇게 헤어진다고?
“그 문제는 차차 얘기하도록 하고. 어차피 실무진 협상까지 가야 할 일 아닙니까?”
대양 시멘트의 차명수 상무. 그는 왜 윤지승이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지 훤히 다 알고 있었다.
그 말은 호락호락하게 윤지승이 원하는 걸 내 줄 생각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때 그의 아내가 그딴 소리는 왜 하냐며 팔꿈치로 차명수의 옆구리를 찌르며 야려봤다.
그걸 보고 윤지승도 눈치 챘다. 그 동안 저 부부가 자기 머리 위에 앉아 있었다는 걸 말이다.
“빨리 가.”
차명수 상무가 그 아내에게 끌려 그 자리를 떠나고 혼자 남은 윤지승.
그는 잠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결국 아내인 고지영을 여기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에게는 아내인 고지영보다, 내일 출근해서 일하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 * *
침통한 얼굴의 고지영.
“앉으세요. 언니.”
그런 그녀에게 백지연이 먼저 자리를 권했다. 칵테일 바에서 칵테일을 반잔 정도 마신 고지영은 두 볼이, 볼 터치라도 한 듯 복숭아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백지연이 혹시나 해서 물었다.
“언니 혹시 저녁 먹었어요?”
그 물음에 고지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그러니까 고지영은 남편인 윤지승이 저녁 식사 시간에 불러내기에, 같이 저녁 먹을 줄 알고 저녁 식사를 건너뛰고 여기 온 것이다. 하지만 와 보니 미팅 장소는 칵테일 바였고.
상대 부부는 어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먼저 식사를 하고 여기 온 거 같았다.
윤지승도 술자리인걸 알았기에 식사를 한 상태였고.
고지영 혼자 빈속에 칵테일을 반잔 정도 마신 것이다.
일부러 도수 낮은 칵테일을 마셨지만, 그렇다고 빈속에 들어간 술이 물은 아니잖은가?
“잠깐만요.”
백지연은 고지영이 먹을 간단한 식사를 호텔 프런트에 주문했다.
그걸 보고 고지영은 생각했다.
남인 백지연이 남편인 윤지승보다 낫다고 말이다. 그 생각이후 고지영의 뇌리에 그 동안 쌓여 온, 시댁과 남편에 대한 불만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 불만은 울분이 되었고 이내 폭발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언, 언니!”
백지연은 갑자기 우는 고지영을 보고 어찌할 줄 몰라 허둥지둥 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되레 울고 있던 백지연이 뭐라고 말을 해야 했다.
“흑흑....난 괜찮아....흑흑흑....그냥 가만 내버려 두면 돼.”
“알았어.”
백지연은 고지영이 말에 바로 수긍하며 그녀가 울 수 있게 내버려 뒀다.
그러면서 백지연은 고지영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왜냐하면 좀 전 백지연이 그녀에게 반말을 쓴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고지영이 백지연에게 마음의 문을 연 것이었다.
백지연은 오늘 자신의 전부를 잃었다. 그녀에게 일이 그녀의 전부였는데, 그 일자리를 잃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 잘하면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언니 한 명이 생길 거 같았다.
전에 밤에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게 고지영에게 호감이 가는 백지연.
그래서 다음 주에는 반드시 시간을 내서 그녀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꼬여 버렸고, 당장 외국으로 나가 살아야 할 처지에 처한 백지연으로서는, 사실 고지영에 대해 생각하고 자실 틈이 없었다.
한데 인연이 되려니 오늘 이렇게 고지영을 만났고, 자기 앞에서 울고 있는 고지영을 보고 있자니,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다행인지 고지영의 눈물이 멈췄을 때, 백지연이 호텔 프런트에 주문한 룸서비스 음식이 도착했다.
* * *
예전 잡지에서 고지영이 여러 좋아하는 음식 중에, 볶음 쌀국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 고지영.
그녀는 백제 호텔의 중식당 메뉴 중에 볶음 쌀국수가 있는 걸 보고 그걸 주문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게살 볶음밥도 추가했고. 그 사이 고지영의 입맛이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건....”
“볶음 쌀국수에요. 전에 언니가 좋아한다기에....혹시 싫으시면 여기 게살 볶음밥도 있는데....”
“좋아요.”
“네?”
“볶음 쌀국수 좋아한다고요. 결혼 후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그 말 후 고지영은 진짜 맛있게 볶음 쌀국수를 먹었다. 그리고 아깝다며 게살 볶음밥도 같이 먹었고.
“한잔 하실래요?”
그 사이 백지연이 냉장고에서 맥주 캔 두 개를 꺼내 오자, 고지영이 그걸 보고 시원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지연은 맥주 캔을 따서 고지영에게 건넸고, 둘은 건배를 하고 시원스럽게 맥주를 마셨다. 그 뒤 백지연이 고지영에게 말했다.
“언니. 우리 이제 말 놓죠?”
“그럴까?”
이심전심이랄까? 서로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마치 자매처럼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며, 서로 얘기를 시작했다.
처음은 좋아하는 음식과 술 얘기를 시작으로, 이야기가 점점 개인적인 분야로 넘어갔고, 둘은 이내 다른 사람에게 털어 놓지 못하던 자신의 본심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백지연도 자신의 치부까지 고지영에게 말한 건 아니었다. 그건 고지영 역시 마찬가지였고.
단지 그녀들이 지금 힘든 걸 얘기했고, 그것이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됐다. 그렇게 여자들의 수다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머! 벌써 12시네?”
그나마 유부녀고 아이까지 있는 고지영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런 그녀에게 백지연이 말했다.
“좀 늦게 들어가면 어때? 내 핑계 대고 더 있다가 가. 언니. 해진이 깨기 전에 들어가면 되잖아?”
해진이는 고지영의 딸이었다. 바로 윤지승과 고지영을 결혼 시켜 준 복덩이, 사랑의 결실이었다.
이미 백지연에게 딸 자랑을 한 고지영. 그 과정에서 딸이 유독 아침에 늦잠을 잔다고 말 한 걸, 백지연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는 한데....”
잠시 고민하던 고지영. 하지만 그녀의 결정은 빨랐다.
“그래. 언제 또 나한테 이런 날이 오겠어. 이럴 때 즐겨야지. 좋아. 우리 뭐할까?”
“음....여기서 싱거운 맥주로 배 불리지 말고 우리 라운지로 가서 제대로 한잔 하는 게 어때?”
“좋지. 나도 잘 말린 폭탄주가 그리웠어.”
“폭탄주?”
“어어. 내가 영화 찍을 때 처음 마시고 반해서 결혼 전에 친구들이랑 종종 말아 먹곤 했거든. 근데 결혼 하고는 한 번도 못 마셔 봤네.”
“왜? 친구들하고 한잔 하면 되지?”
“친구들이라....너도 아까 당해 봤잖아? 그 사람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데 어떻게 만나?”
처연하게 말하는 고지영. 한데 그런 고지영의 얼굴에서, 백지연은 왠지 복잡한 그녀의 심경을 읽을 수 있었다.
“언니. 마음껏 마셔. 내가 책임지고 해진이 깨기 전에 언니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둘은 몸을 일으켜서 이번에는 호텔 스카이라운지로 갔고, 거기 루프탑 바에서 나름 분위기를 잡고 양주를 시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 * *
QH엔터 홍대복 대표가 빚을 핑계로 그 동안 성상납을 강요 해온, 여배우들에게 연락해서 그녀들의 협조를 구하던 황치열.
“어?”
그런 그의 눈에 익숙한 이름의 여배우의 전화번호가 보였다.
“민수아라....”
민수아 역시 홍대복 대표 때문에 제대로 연기 활동을 하지 못하고, 성상납 현장에 단골로 불려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다른 여배우들과 차이점은, 바로 그녀가 홍대복 대표의 측근 조폭인 김민식과 가까운 사이란 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민식이 민수아를 마음에 두고 그녀를 자기 여자로 만들려고 작업 중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요즘 민수아가 그런 김민식이 자기를 챙겨 주는 데 감동을 받았던지, 둘이 은밀하게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성 상납하는 다른 여배우들에게 들어 온 황치열.
황치열은 먼저 나재석 검사에게 연락해서 홍대복의 최 측근 김민식이 잡혔는지부터 물었다.
“김민식을 못 잡았다고요?”
=왜 그래?
“홍대복은 김민식이 잡히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와 접촉을 할 겁니다.”
=그래서?
황치열은 살짝 부아가 치밀었다. 이 정도 얘기했으면 검사라는 양반이 알아들어 쳐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흡사 황치열이 다 알아 챙겨서 검사 입에 넣어 주란 식이었다.
그냥 날로 쳐드시려는 나재석 검사의 행태가, 황치열로서는 받아드리기 쉽지 않았지만, 그걸 또 티 낼 그가 아니었다.
“제가 김민식을 먼저 포섭하겠습니다. 그 다음....”
황치열의 설명을 쭉 듣던 나재석 검사. 그가 흥분해서 말했다.
=네 말 대로면 내일 안에 홍대복이를 잡겠군?
“그렇지요. 그리고 저도 여기서 나가는 거고요.”
=홍대복만 잡으면 내가 책임지고 너 여기서 내 보내 준다.
나재석 검사로부터 확실히 훈방조치를 확답 받은 상태에서, 황치열은 김민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같이 성 상납 장을 관리해 온 두 사람 사이에는, 긴급할 때 서로 연락이 가능한 비밀 폰 전화번호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