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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하동훈은 서지현이 내게 아무리 부탁해도, 결코 살려 둘 수 없는 자였다.
무엇보다도 그 새끼가 위험한 것은, 내가 누군지 알면서 처리자들을 시켜 나를 죽이려 한 것이다.
그런 자를 살려 두는 건, 여태 내가 죽여 온 다른 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 자들은 멋모르고 나를 해하려 하다가, 다들 실종 처리가 됐다.
그들이 지옥에서, 내가 하동훈 같은 놈을 살려 준 걸 알면 얼마나 원통해 하겠나?
=준열아. 내 마지막 부탁이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너에게 전화하는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내 부탁을 들어 주면 안 될까?
뭐 이제는 애원조로 나오시겠다! 그 고고하던 삼명그룹 사모님 서지현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게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천륜, 즉 자기 딸의 생물학적 아비를 살리고자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째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내가 아니더라도....그 양반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 모든 걸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이, 죄다 보고 받고 있을 거라 확신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그 양반이 어떻게 나올까?
무엇보다 서지현 사모님이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한 자를 살리려고, 나에게 이렇게 전화하고 있는 걸아는 순간, 하동훈은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
그 사실을 모르는 서지현 사모님은 내가 말이 없자, 자신의 애원이 내게 먹혀들고 있다 싶었던지 참 말도 많이 했다.
‘뭐 굳이 내가 사모님 가슴에, 대 못을 박을 필요는 없겠지.’
예전의 백준열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서지현 사모님께 참 모질게 대했을 거다.
그 동안 그가 본가에서 서지현 사모님에게 당한, 온갖 설움들이 생각났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러니 그녀를 용서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진짜 그녀를 용서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럴 이유도 까닭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서지현 사모님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사실 따지고 보면 없었다.
“하아. 알았어요. 사람들 철수 시킬게요.”
나는 그녀의 애원에, 순진하게 넘어가 주는 척 연기를 좀 했다.
=정, 정말? 준열아. 고맙다. 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마.
‘뭐 그러던지 말든지.’
거기에 또 속아 넘어가는 서지현 사모님.
그 뒤 고맙다며 날 급구 칭찬해 대는 서지현 사모님에게, 그냥 ‘네네’ 거리던 나는 서둘러 통화를 끝내고 싶어 하는, 그녀의 심중을 간파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됐으니 이제 전화 끊으셔도 돼요.”
=그, 그래. 내일 모레 본가에서 보자.
뚜뚜뚜뚜뚜뚜....
내가 말하기 무섭게 전화를 끊어 버리는 서지현 사모님.
아마도 이 기쁜 소식을 하동훈에게 전하고 싶은 모양인데....
“아마 그게 하동훈을 죽음으로 내 모는 일이 될지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마 백승렬 회장 쪽에서도 하동훈을 쫓고 있을 거 같아서였다.
* * *
원래 나는 서지현 사모님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냥 시끄럽게 쫑알대는 그녀 입을 막고, 빨리 그녀와 통화를 끝내고 싶어서 연기를 한 거였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와 한 약속을 지키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백승렬 회장 쪽에서, 아무래도 나보다 더 하동훈을 없애고 싶어 할 거 같아서 말이다.
해서 나는 김훈 대표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혹시 남해로 간 대표님 직원들과 연락이 됩니까?”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에게 연락해서, 하동훈이 그냥 두고 철수하라고 하세요.”
=네?
김훈 대표로서는 내 말이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나도 굳이 길게 그에게 전후사정을 얘기하기 귀찮았다. 해서 최대한 간단히 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삼명그룹 쪽에서 움직인 거 같아요. 괜히 그들과 부딪쳐서 좋을 거 없잖아요?”
다행히 김훈 대표는 내가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렇긴 하죠. 알겠습니다. 녀석들이 좋아하겠네요. 안 그래도 하동훈이 처리하는 대로 밤낚시 할 거라던데. 지금부터 바로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에 나도 그들이 부럽다는 듯 김훈 대표에게 말했다.
“대표들은 이렇게 바쁜데 직원들은 한가롭게 낚시라....”
동변상련이라고 내 말에 김훈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내일부터 주말인데 대표님도 이참에 바다 보러 가시든 지요.
“그러고 싶은데 내일 골프 약속이 잡혀 있네요.”
=그거 참 안 됐네요. 뭐 저도 내일부터 이틀 동안 해외 출장 가지만요.
“해외 출장이요?”
=장비 좀 구입할까 해서요. 요즘은 이 바닥도 경쟁이 심해서....첨단기술이 곧 경쟁력이라서 말입니다.
“그렇겠군요. 그럼 주말 동안은 연락하면 안 되겠네요?”
=아뇨. 하셔도 됩니다. 아시겠지만 일은 제가 하는 게 아니니까요.
하긴 서비스 직종의 경우 대표가 직접 일을 하면, 그 회사는 얼마 못가서 문을 닫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즉 대표가 일감을 구해 와야지, 회사 일이나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김훈 대표와 통화를 끝낸 나는, 이미 도착해 있는 호텔 입구 앞에 정차하고 있던 내 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호텔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문대식과 경호팀원들을 다 퇴근 시켰다.
“그만들 가보셔도 됩니다.”
그랬더니 그 말 떨어지기 무섭게, 내 빼 버리는 문대식과 경호팀원들.
그래도 내 안전을 책임지는 작자들이, 대표가 호텔 방에 들어갈 때까지는 경호를 해 줘야지 말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내가 싸움을 잘 한다는 걸 알게 되자, 이것들이 저러는 거 같았다.
나는 속으로 괜히 저들 앞에서 이제동의 싸움 능력을 시험했다 싶었다.
하지만 그 능력이 너무 궁금해서 바로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오늘 밤에 제대로 잠이 오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랬는데, 아무래도 내 발등을 내가 찍은 거 같았다.
“에이.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잘 해 주면 안 된다는 거야.”
나는 저들 빨리 퇴근하라고 일부러 근처 호텔에 와 줬건만. 그뿐인가? 그들 수련장에 세탁기며 냉장고, 전자레인지까지 싹 새 걸로 바꿔 줬는데, 이런 찬밥 신세라니.
나는 호텔 프런트로 쭉 걸어가면서, 날 버린 거나 마찬가지인 문대식과 내 경호팀원들에 대해 투덜거렸다.
그때 누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웬 젊은 놈이 늘씬한 아가씨 하나 끼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지?’
내가 그 젊은 놈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 하자, 백준열의 기억이 기어코 그 놈이 누군지 내게 알려주었다.
‘미래 산업 강창욱 대표?’
작년에 청와대에서 주최한 21세기를 주도해 나갈, 젊은 CEO모임이 있었다.
그때 안면을 튼 녀석인데, 백준열과 달리 녀석은 선친으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아서, 그냥 운 좋게 CEO가 된 케이스였다.
그때도 그랬다. 회사는 그가 없어도 잘 굴러간다. 미래 산업은 대기업까지는 아니지만, 중견기업 중에서도 선두권을 유지 중인 건실한 기업이었다.
석유화학과 플랜트, 건설 쪽으로 제법 명망이 있어서, 그 회사들을 다 합치면 얼추 시가총액이 1조대에 육박했다.
내가 그를 보고 멍하니 서 있자, 그가 옆에 여자에게 뭐라고 얘기하며, 시시덕거리더니 그 여자와 같이 내게로 다가왔다.
“아이고. JYB엔터 백 대표님 아니십니까?”
녀석이 능글맞게 웃으며 나와 두어 걸음 거리에서 멈춰 서며 말했다.
“강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작년 청와대에서 보고 처음이니, 오랜만이라고 인사 할만 했다.
그리곤 옆에 늘씬한 미녀를 쳐다보자, 강창욱이 움찔하더니 한 팔로 옆에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여기는 슈퍼모델 명세지양입니다.”
마치 자기 꺼니 눈독 들이지 말라며, 하얀 이를 여실히 드러내 놓으면서 말이다.
“안녕하세요? 백 대표님.”
명세지란 늘씬한 미녀가 교태 섞인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눈빛이 영....
‘나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그때 백준열의 기억이 알려주었다. 2년 전에 이 몸이 명세지를 따 먹고 버렸단다.
당시에 명세지는 이렇게 세련되게 예쁘지 않았다. 몸매야 그때나 지금이나 끝장나게 좋았지만.
그랬기에 백준열이 그녀를, 자신의 애마인 람보르기니 우라칸에 태워서, 으슥한 곳으로 가서 카섹스를 즐겼지.
뭐 그 다음이야 볼 짱 다 본, 백준열이 매너 있게 그녀를 대했을 리 있었겠나?
‘아이고야....’
나는 계속 그녀를 모른 척했는데 명세지는 그때를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는 거 같았다.
혹시나 해서 「개눈깔」아이템을 사용해서 그녀를 살폈는데 그녀 몸을 두르고 있는, 다섯 가지 빛 중에서 가장 강한 게 뿜어져 나오는 빛은, 바로 핏빛이었다.
복수와 파멸을 상징하는 그 핏빛 말이다.
* * *
나는 나에게 복수심을 활활 불태우고 있는, 명세지는 계속 모른 척 하고 강창욱에게 말했다.
“볼 일 보고 나가시는 길인가 봅니다?”
“네. 뭐. 근데 백 대표님은 여기에 왜 오신 겁니까? 그것도 혼자서 말입니다.”
강창욱은 자기가 명세지의 스폰서란 걸 당당히 내게 밝히면서, 거기에 더해서 내 부아를 치밀어 오르게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자기는 이렇게 미녀를 끼고, 여기 호텔에 왔는데 너는 뭐냐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강창욱의 그런 도발에 나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 호텔을 내 집처럼 생각하고 왔으니까.
집이 뭔가? 안락한 보금자리 아니겠나. 이 호텔은 내게 단지 그 집 역할을 해 주는 곳일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곳은 내게 강창욱이 생각하는 밀회의 장소가 아니었고, 고로 화날 것도 없었다.
“네. 뭐 혼자 쉬러 왔습니다.”
“네?”
호텔이 밀회의 장소에 불과한, 강창욱에게는 호텔에 혼자 쉬러 왔다는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야 뭐 녀석이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럼 저는 체크 인 해야 해서 이만....”
나는 어처구니 없어하며 날 쳐다보는 강창욱을 뒤로하고, 곧장 프런트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강창욱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뭐 내가 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니다. 그냥 내 견신 시스템의 개 특성 중에 *소리가 잘 들립니다.*가 녀석의 말 뿐 아니라, 녀석의 핸드폰에서 떠들고 있는 녀석의 목소리까지 죄다 들리게 만들었다.
나야 굳이 강창욱 따위가 통화하는 걸 엿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신경을 끌려고 했는데....
-....로 전화가 왔는데, QH엔터라고 전에 너도 갔었잖아? 왜 남산 타워 근처에.
“어어. 기억 나. 거기 진짜 끝내 줬었지. 근데 그 얘기는 왜 해?”
=오늘 거기서 파티가 있단다. 근데 거기 누가 오는 줄 알아?
“누가 오는데?”
=TVM 대표가 온데. 너 CH그룹에 석유 화학쪽에 하청 받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CH그룹과 TVM 대표가 무슨 상관이야?”
=얘가 진짜. 너 내가 대기업 인맥 좀 알아두라고 했어, 안했어?
“했지. 그런데 내 친척들 이름도 다 모르는데, 남의 집 계보를 내가 왜 외워야 하나 싶더라고. 그래서 때려치웠지.”
=하아. 너란 놈은 진짜....
“대신 나한테는 그쪽으로 박식한 친구가 있잖아. 바로 너.”
=그래. 너를 친구로 둔 내 잘못이지. 잘 들어. CH그룹 백승호 회장의 아들 중 하나가 바로 TVM 대표 백준기야. 그러니까 네가 오늘 QH엔터 파티장에 가서 백준기에게 잘 보이면....
“CH석유화학의 하청을 받을 수 있다 이거로군?”
=그렇지. 어때? 갈 거지?
“....”
잠시 망설이던 강창욱. 하지만 이내 가겠다고 대답했는데 그때 호텔 프런트 직원이 내게 물었다.
“손님 뭘 도와드릴까요?”
프런트 앞에 와서 말없이 멍 때리고 있는, 내가 프런트 직원이 봐도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뭔가 수상쩍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그 프런트 직원의 한 팔이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아마 거기 비상벨이 있을 것이고, 그 벨을 누르면 호텔 보안 요원들이 이쪽으로 득달같이 달려오겠지?
그런 프런트 직원에게 내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28층 키 주실래요?”
내 그 말에 프런트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곳 호텔 28층은 로열 스위트룸으로 VVIP고객에게만 개방 되는 공간이었으니까.
“죄,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프런트 직원이 이마에 땀이 맺혔다. 거기다 밑으로 내렸던 손은 어느 새 배꼽 위 높이에, 두 손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그래도 내 눈 앞의 프런트 직원은 VVIP고객을 어떻게 맞아야 하는 지 교육은 되어 있어 보였다.
* * *
원래 나는 백준기의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내 핸드폰에 녀석의 번호를 수신 차단해 뒀었다. 그런데 이곳 호텔 프런트에서 강창욱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걸 엿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분명 QH엔터라고 했었지?”
안 그래도 경호팀원들의 수련장으로 가는 동안, 차은석 특수 부문장으로부터 QH엔터에 대해 전해 듣지 않았던가.
내가 찾아 낸 예능 유망주. 바로 TVM 백준기의 수행비서 김준오가 QH엔터의 성 상납 장소와, 거기 성 접대에 동원 된 QH엔터 소속 신인 연기자와 매니저에 대해 털어 놨고, 나는 김훈 대표를 통해서 ‘연예인의 성상납 사건’으로 목숨을 끊고 마는, 비운의 여배우 강지영과 QH엔터 홍대복 대표와의 악연까지 이미 알아 본 상태.
“이렇게 또 강지영을 죽게 만들 수는 없어.”
내가 그녀의 억울한 죽음을 알면서, 그녀를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있을 예정이라는, QH엔터의 그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
거기 가서 강지영을 구해내고, 거기 있는 놈들 다 조져 버리기로 작심했다.
지이이잉!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하니, 내가 수신 차단해 둔 백준기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내가 수신 차단을 풀자마자, 이렇게 바로 전화를 걸어오다니.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미련한 건지 나로서 알 길은 없었지만.
“새끼. 양반은 못 되겠네.”
어째든, 나로서는 안 그래도 녀석에게 전화해야 하나 생각 중이었는데, 녀석이 알아서 이렇게 전화를 걸어 주니 고마울 일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