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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미전실장의 대답에 백승렬 회장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마치 그 정도 일 줄 몰랐다는 듯 말이다.
“12곳이나? 광고비가 제법 되겠군. 그래.”
“계열사 마다 다르지만, 하루에 10번 광고 방송 내 보내 주는 조건에, 한 달 기준 20억에서 30억 정도 지출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20-30억이면 적은 돈은 아니네.”
“그렇죠. 일 년이면 3천 600백억이니까요.”
애초 푼돈이 아니다 보니, 일 년치를 모아 놓으니 웬만한 대기업 순수익 정도가 나왔다.
“좀 많네.”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아시다시피 TVM이 CH그룹의 계열사라....”
“말 잘했다. 거기 CH그룹 계열사지, 우리 계열사도 아니잖아? 삼명家에서 나가서 CH家로 먹고 잘 사는데, 뭐 하러 거기다 퍼줘. TVM 광고 다 빼.”
“네. 알겠습니다.”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지면, CH그룹 백승호 회장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삼명그룹 회장은 백승렬이었고, 그의 지시가 떨어진 이상 모든 것은, 그의 뜻대로 처리 되었다.
“아니. 다 빼는 척만 해.”
“네?”
“거기 광고를 계속 주고 말고는, 내가 아닌 준열이가 결정할 테니까.”
“알, 알겠습니다.”
미전실장의 눈에 확실한 당혹감이 어렸다. 그럴 것이 백승렬이라는 이 독재자가, 최초로 자신의 권력을 누군가에게 위임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유력한 후계자인 첫째 백준경이 아니란 사실에, 미전실장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삼명그룹 미래전략실장 강규석.
그는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의 복심, 혹은 왼팔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와 백승렬 회장의 나이차이는 무려 20살. 백승렬 회장이 떠나도 그는 아직 팔팔하게 활약 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렇다보니 오규동 비서실장처럼, 삼명그룹 후계자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까지 백승렬 회장은 무난한 행보를 보였다.
장남인 백준경에게 가장 많은 신경을 써 주고, 그 다음이 차남인 백준호, 그리고 막내는 내 놓은 자식처럼 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막내를 가장 많이 이용했다.
자식을 이용했다고 표현하는 건 좀 그렇지만, 백승렬 회장을 막내 백준열을 철저히 이용해 먹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한 셈이었다. 하지만 뭐가 불만인지, 백준열에게 후계자의 자리는 쉽사리 내주지 않았다.
그랬는데 요 며칠 사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지, 백준열에게 크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그를 후계자로 낙점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설마....’
미전실장 강규석은 아니겠지 싶었지만, 왠지 좀 전 백 회장이 한 말이 신경 쓰였다.
바로 ‘준열이가 결정 할 거’ 라는 그 말, 말이다.
“아무래도 막내 쪽으로도, 줄을 대 놔야 할 거 같군.”
현재 강규석은 첫째 백준경과, 둘째 백준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둘 중 누구에게 붙을지 아직 결정하지 않은 것. 그런데 이제는 막내에도 그 줄을 걸어야 할 모양이었다.
강규석의 입장에서야 둘이나 셋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서 그 때문에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막말로 후계자야 백승렬 회장의 맘대로 바뀔 수 있지만, 삼명그룹에서 미전실은 영원할 테니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강규석은,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질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고 있지 않았다.
미전실이 곧 강규석이고, 강규석이 미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미전실이기에, 그를 대신할 인재는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망각하고 있었다.
* * *
백승렬 회장은 자기 앞에서 겁도 없이, 미전실장 강규석이 대 놓고 통박 굴리는 걸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강 실장도 이제 다 됐군.’
백승렬 회장에게 있어서 그를 보필하는 사람들은 부속과 같았다.
부속이란 언제나 교체가 가능한 물건이다. 그러니 그가 불편하면 교체하면 그만이었다.
단지 오래 쓰다 보면, 그게 손에 익어 불편해도 계속 쓸데가 있는데, 강 실장은 그 정도까지 백승렬 회장이 인내하며, 데리고 쓸 인재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오규동 비서실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즘 비서실의 기강이 많이 해이해진 것을 못 느낄, 백승렬 회장이 아니었다.
“준열이 때문에, 이거 주변 정리까지 해야 할 판이로군.”
하긴 백준열이 아니었다면 오규동이나 강규석은, 아마도 백 회장이 계속 썼을 것이다.
지금 그의 나이에는 만사가 다 귀찮았다.
회사 출근하는 거, 즉 몸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기 할 노릇은 다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후계자로 백준열을 세우기로 작정하자, 생각이란 걸 더 하게 됐다.
즉 생각의 범주를 주위로 더 넓힌 것이다. 그러자 보이기 시작했다.
자기 주위에 엉망진창인 상황들이 말이다.
특히 믿었던 자들이 자기 눈과 귀를 막고, 방만하고 허술하게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백승렬 회장이 시킨 것은, 칼 같이 해 내면서 말이다.
이러면 사실 문제 될 건 없었다. 백승렬 회장의 독주 체제 하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후계자에게는, 결코 이런 환경이 좋을 수 없었다.
대신 후계자가 백승렬 회장이 있는 곳까지 오기까지 치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자기 후계자는 맨 주먹 뿐이었다.
하다못해 녀석을 도와 줄 조력자도 변변히 없었다.
“허어. 이거 큰일 날 뻔 했었네.”
오늘 아침에서야 백승렬 회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그에게 시간은 얼마 없는데, 후계자로 낙점한 백준열은 삼명그룹 밖에 덩그러니 혼자 있었던 것이다.
백승렬 회장은 일단 백준열이 자신과 바로 소통 될 수 있는, 핫라인부터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룹 내, 새로운 세력을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누가 좋을까?”
백승렬 회장은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회장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때 불쑥 최 집사가 끼어들며 그의 상념을 깼다.
“어?”
“식사 하시는데 생각이 많으신 거 같아서....”
최 집사. 백승렬 회장이 그래도 믿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백승렬 회장이 특히 최 집사를 신임하는 데는, 그가 집 안 일 외에 다른 쪽으로는 전혀 개입을 하지 않아서였다.
그 점을 좋게 보고 나니, 그가 하는 건 뭐든 마음에 들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자기 마누라보다 최 집사를 더 믿게 되었다.
“아냐. 밥 먹어야지.”
백승렬 회장은 그 일은 출근해서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런 그를 평소와 달리 미묘한 눈으로,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최 집사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 * *
강남에서 요즘 가장 핫hot하다는 클럽 플로렉스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호텔에 방을 잡은, 나는 바로 침대에 꼬꾸라졌다.
옷도 벗기 싫은 데 씻기는 무슨.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고, 깨니 날이 훤히 밝아있었다. 먼저 시간부터 확인했다.
“으음....”
9시다. 평소 8시에 칼 기상하던 백준열은 어디 갔단 말인가?
하긴 새벽 5시에 잠들었으니, 아침 8시 기상은 힘들만 했다.
그래도 한 시간 더 잤다고 머리는 개운했다.
서둘러 씻고 호텔 측에서 가져다 준 속옷과 정장을 챙겨 입었다.
그 사이 룸서비스 아침 식사가 도착했고, 배를 채운 뒤 호텔을 나서자 입구 앞에 문대식과 내 경호팀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에 오르자 내 옆에 자리 잡은 문대식이 말했다.
“정민지 요원은 아시다시피 다친 관계로, 일주일 병가를 내고 쉬는 걸로 처리했습니다.”
“어.”
그 일이야 간밤에 문대식과 양태석이 서로 통화를 했으니, 둘이 알아서 어련히 잘 얘기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온 결론이니, 나로서 뭐라고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려서 확인하니 손진아였다.
“네. 진아씨.”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 전화를 받았다. 어째든 나는 그녀와 한 약속을 지켰다.
그러니 그녀에게 더 당당해 질 수 있는 것이고.
=출근했어요?
“아뇨. 지금 하는 중입니다.”
=목소리가 밝은 걸 보니, 간밤에 급한 일은 잘 해결이 됐나 봐요?
“네. 사람이 좀 다치긴 했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어요.”
=어머. 사람이 다쳤다고요? 그럼 사고가 난거네요. 전 그것도 모르고....
사고긴 하지. 그 현장이 클럽이라서 좀 그렇지만. 내가 굳이 그 얘기까지 시시콜콜 손진아에게 할 필요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래도 다친 게 어디에요. 그 다치신 분들을 찾아 뵙고, 제가 심심한 위로의 말이라도 전하고 싶은데 워낙 바쁜 관계로....
손진아가 오늘 좀 오버 한다. 자기가 무슨 내 마누라도 아니고 말이다.
아니.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던 여자였던가? 하지만 백준열의 기억에 따르면, 손진아는 과묵한 여자였다. 자기 할 말만 똑 부러지게 잘하는....
그런데 알고 보니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다.
‘투머치토커(too much talker)네.’
2010년대 중후반에 유행하는 콩글리쉬 투머치토커.
필요 외의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 말이, 지금 손진아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 같았다.
다행히 그녀가 탑 스타이기 망정이지.
그대로 뒀으면 내가 회사 갈 때까지 계속 떠들었을 그녀였다.
=진아야. 박 감독이 할 말이 있데.
=알았어. 저 시간 나면 또 전화할게요.
‘안 해도 되는데....’
나는 그 속마음을 숨기고 최대한 밝게 대답했다.
“네. 그러세요.”
‘물론 내가 바빠서 그 전화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 * *
“룰루루루....”
TVM대표 백준기. 그는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출근하는 차에서 콧노래까지 불렀다.
어제 생각했던 대로 출근을 30분이나 앞당긴 그는, 편성국장 편일수에게 전화를 하려다 말았다.
“뭐 급할 거 없지.”
어차피 오전 중에 백준열은 TVM을 찾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생각 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던 백준기. 그런 그를 보고 운전석 옆 보조석에 있던 그의 비서가 물었다.
“대표님.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좋은 일? 있지. 아주 유쾌, 통쾌한 일이 말이야.”
백준기는 그 기고만장하던 백준열이 자기 밑에 편성국장 앞에서, 오늘 쩔쩔 맬 걸 생각하니 입가로 실실 웃음 끼가 흘러나왔다.
자기 대표가 기분 좋다니 비서도 얼굴이 환해졌고, 그 옆에 운전하는 기사도 덩달아 웃었다. 그렇게 출근길이 아주 훈훈한 분위기속에서 이뤄지고 있었는데, 그때 비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여보세요? 네. 아아. 네. 네?. 대표님께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뭔데?”
비서가 통화를 끝내자 뒷좌석의 백준기가 바로 물어왔다.
비서 입에서 대표님이란 말이 나왔으니, 자기와 연관 된 뭔 일이 있는 것이다.
“마케팅국장님이신데, 지금 대표님께 전화 드려도 되냐고 여쭤보라고....”
“마케팅국장이면 박 국장 말이지?”
“네.”
방송국인 TVM에는 여러 국장들이 있지만, 그 중 마케팅국장이 대표인 백준기에게 딱히 볼 일이 있을 게 없었다.
그럴 게 그곳만큼 안정적으로 잘 돌아가는 곳도 없었으니까.
그런 마케팅국장이 아침 댓바람부터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
그게 뭔지 궁금해진 백준기가 비서에게 말했다.
“통화 가능하다고 해.”
“네.”
비서가 전화를 걸고 잠시 뒤, 백준기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대표님. 마케팅국에 박진숩니다.
“알아요. 박 국장이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그게....뭐가 좀 잘못 된 거 같은데....삼명그룹에서 좀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삼명그룹에서요?”
=네. 광고 끊겠다고 말입니다.
“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삼명그룹에서 왜 광고를 끊어?
“삼명그룹 어디요?”
이때까지만 해도 백준기는 삼명그룹의 계열사 중 한 곳에서, 멋모르고 광고 끊겠다고 연락을 한 걸로 생각했다.
그 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확 잘라버려서, 오너家를 우습게 여기면 어떻게 되는지, 그 본보기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 그게....계열사 어디가 아닙니다.
“뭐요?”
=삼명그룹 계열사 12곳 전부 광고 끊겠다고, 삼명그룹 본사에서 연락이 온 지라....
박 국장의 그 말에 백준기는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러니까 삼명그룹이 그룹 차원에서 TVM의 광고를 끊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뭐, 뭔가 크게 잘못 된 거 같군요.”
=그렇겠죠? 대표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삼명그룹에서 광고 끊으면....저희는 어렵습니다.
백준기도 잘 알았다. 삼명그룹 광고가 TVM 매출의 70%를 차지한다는 걸 말이다.
즉 삼명그룹에서 진짜 광고 끊으면 TVM은 그날로 파산절차를 밟아야 했다.
“걱정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백준기는 마케팅 박 국장을 안심 시킨 뒤 통화를 끝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좀 전까지 히히거리던 그의 얼굴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백준기는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감도 못 잡았다.
하지만 그도 알았다. 이건 자기가 어쩔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란 걸 말이다.
“아, 아버지한테 말씀 드려야 해.”
백준기는 서둘러 CH그룹 회장이자, 그의 아버지가 되는 백승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삼명家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당연히 자신이 삼명그룹을 물려받을 줄 알았던 백승호.
하지만 선친이자 삼명그룹 초대 회장인 백선엽은, 장남도 차남도 아닌 셋째인 백승렬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게 불만이었던 백승호는 삼명그룹에서 계열사 몇 개를 거느리고 독립을 선택했고, 그게 지금의 CH그룹이었다.
CH그룹은 알게 모르게 삼명그룹의 도움을 받으며 급성장했고, 현재는 재계서열 20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래봐야 삼명그룹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백승호는 절치부심 삼명그룹의 회장 자리를 되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백승렬 회장 체제의 삼명그룹은, 예전보다 더 눈부시게 발전을 했고, 특히 전자의 경우는 글로블 회사로 급성장 중이었다.
CH그룹 가지고는 어떻게 비벼 볼 수 없을 정도로 커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백승호는 여전히 권토중래, 기어코 자기 자리를 되찾고 싶었고 그 야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으음....”
그런데 그의 나이가 문제였다.
그는 이미 돌아가신 선친보다 7년을 더 살고 있었다. 최근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졌고. 당뇨와 함께 혈압이 들쭉날쭉하며 병원에서 고 위험 수준으로 판정을 받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