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고 싶으면 해-176화 (176/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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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현동백화점에서 장을 보고 필요한 식자재를 내 차에 실었다. 원래는 손진아도 내 차에 타려 했는데 그녀의 매니저가 훼방을 놓았다.

“진아씨. 내일 촬영 일정과 광고 스케줄 때문에 급하게 할 얘기가 있는데....”

“알았어요. 집으로 가는 길에 얘기해요. 준열씨. 그럼 집에서 봐요.”“네. 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손진아가 자기 차로 움직이기로 하면서, 우린 생이별을 하고 10여분 뒤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가 차에 타자 문대식이 생글거리며 내 옆자리에 탔다.

이대로 손진아 집에 가면 퇴근하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그건 다른 경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고.

하긴 직장인에게 퇴근하는 것 보다 더 좋은 일도 없겠지.

나 역시 손진아와 그녀 집에서 꽁냥꽁냥 거릴 걸 생각하니 벌써 흥분이 되었다.

좀 전 그녀를 위해 몸을 던진 탓일까? 손진아의 눈에서 쏟아지는 애정의 눈길이 아주 그냥....

백준열의 기억에 따르면 손진아는 섹스에 상당히 적극적인 편이었다.

그런 그녀가 제대로 불까지 붙여 놨으니....기대가 안 될 수 없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런 기분을 내 바지 호주머니 속 핸드폰이 다 망쳐 놨다.

“에이....”

누가 이렇게 눈치가 없는지 살피니 강남경찰서 강주엽 총경이었다. 하지만 강 총경의 전화는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차은석 부문장과 연관이 있는 제보 전화일 테니까.

“여보세요. 네. 네. 으음....”

나는 일단 강주엽 총경의 얘기를 쭉 경청했다. 그는 차은석 부문장을 해치려는 두 고위 경찰들의 음모를 제법 잘 요약해서, 내가 잘 이해 할 수 있게 설명해 주었다.

그 덕분에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들은 나는, 그에 대한 대책 역시 머릿속에서 바로 짜 낼 수 있었다.

“....니까 그쪽은 강 총경님이 맡아 주시고, 정재욱은 제가 서울경찰청장과 잘 아는 사이니까 손발을 묶어 놓도록 하겠습니다. 네. 네. 그렇죠. 그렇게만 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순리대로 처리해 나가면 될 거 같고요. 네. 이렇게 연락 주셔서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네. 조만간 자리 한 번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박대순 청장이 함께 할 겁니다. 네. 그럼 들어가십시오.”

경찰서장이라면 지방에서는 유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위치다.

그건 그가 속해 있는 강남경찰서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런 그가 이런 수고스런 일까지 해 주고 있는데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 주는 게 예의였다.

내가 아무리 잘난 사업가고, 재벌 3세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강주엽 총경과 얘기 하는 사이, 손진아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서 장 본 것을 챙겨 들고 ,아파트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걸 지켜보던 문대식과 경호팀원들은, 내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자 휑하니 퇴근해 버렸다.

“쳇....”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요즘 문대식과 경호팀원들을 너무 풀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예전의 백준열이라면 어림도 없었다. 원래 내 경호팀이라면, 혹시 모르니 내가 내 여자 집에 들어가고 한 시간 정도 대기했다가 퇴근해야 했다.

그걸 지금의 내가 그럴 필요 없다고, 퇴근하라고 했더니 칼 같이 지키고 있었다.

딩동댕!

“18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손진아의 집 앞에 가니 알아서 비밀번호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역시나 손진아는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들린 짐을 주방 쪽으로 가져가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널따란 거실로 나와서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넓은 거실은 창을 제외한 나머지 벽에, 온통 손진아의 그림과 브로마이드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지이이잉!

그때 내 핸드폰이 또 울렸다. 확인하니 이번에는 김훈 대표였다.

김훈 대표의 전화야 바로 받아야 했다. 그에게 급하게 처리해 달라고 맡겨 놓은 일만 두 개였다. 그 중 하나라도 처리했기를 바라며 그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여기 청평인데요.

“청평이요?”

=여기에 조진호 전무 별장이 있습니다. 해서....

간략한 김훈 대표의 설명이 있고, 그가 처한 어려움도 전부 들었다.

나는 바로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근데 그건 김훈 대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해서 일단 김훈 대표와 통화를 끊고, 나는 나의 큰형인 백준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 전화를 받는 백준경. 아마 갑자기 바뀐 백준열 때문에 가장 크게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백준경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도 살아야 하니까.

“형. 회사 경호원을 대체 몇 명까지 끌어다 쓰는 거야?”

=뭔 개소리야?

“우리 회사 행사에 필요해서, 그룹 경호실장에게 연락 했더니 경호원이 없다는 거야. 이게 말이 돼? 그래서 따져 물었더니, 형이 청평 쪽으로 경호원을 15명이나 보냈다지 뭐야?”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이 사실을 아버지한테 얘기해도 돼?”

=뭐? 너 이 새끼....

“그러니까 청평 쪽으로 보낸 경호원들 다시 그룹으로 복귀 시키라고. 당장!”

=하아....너....

안 그래도 삼명 자동차를 지키지 못하고 본사로 복귀한 백준경을, 좋지 않게 여기고 있는 백승렬 회장이었다.

그런데 이런 자잘한 거까지 막내가 고자질을 한다면, 백 회장이 또 무슨 막말을 자신에게 퍼부을지, 그게 걱정일 수밖에 없는 백준경.

“청평 쪽에 있는 사람이 누군데 경호원을 15명이나 붙인 거야?”

알면서 묻는 건지 모르면서 묻는 건지, 일단 제대로 백준경의 심사를 뒤집어 놓은 내 말에, 바득 이 가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릴 정도로, 백준경은 제대로 빡 친 거 같았다.

=좋아....철수 시키지. 그리고 이 수모 잊지 않으마.

뚜뚜뚜뚜뚜뚜....

백준경은 끝에 가서 자기 할 말만 내 뱉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중에 두고 보자는 놈 무서워 할 예전의 그 백준열이 아니었다.

내가 김훈 대표에게 그가 부탁한 청평 별장 경호원들 철수 시키는 걸 잘 처리했다고 막 전화를 할 때, 집 밖에서 디지털 도어 록에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 주인 손진아가 드디어 컴백 홈 한 것이다.

* * *

삑삑삑삑삑삑!

띠로릭! 촤락!

철컥!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누르자 도어 록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고, 유지태는 바로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20평형 아파트. 40대 중년 남자가 혼자 살기에 결코 좁다고 볼 수 없는 평수다.

그때 아파트 안에서 술 취한 사람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와 홀아비 냄새가 뒤섞여, 훅하니 풍겨왔다.

유지태가 곧장 거실 창을 쳐다봤다. 역시나 창문이 꽉 닫혀 있었다.

먼저 그 창부터 연 후, 유지태는 활짝 열려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 가구라곤 덩그러니 하나 놓여 있는, 싱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이성욱.

“드르렁....드르렁....”

이성욱은 술에 취해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런 그를 유지태가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내 흔들어서 깨웠다.

“으으으....물....물....”

“하아....”

물을 찾는 이성욱을 보고 살짝 짜증 섞인 얼굴 표정을 짓던 유지태.

그가 별수 없이 방밖으로 나가서, 냉장고 안에서 500미리 생수 하나를 챙겨 들고 다시 안방으로 돌아왔다.

“자아. 마셔.”

그 사이 잠에서 깨어 비몽사몽인 채, 어째든 상체를 일으켜 앉은 상태의 이성욱에게 유지태가 생수를 건넸다.

이성욱은 그 생수를 받아서 뚜껑을 딴 다음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이제야 좀 살 거 같네. 근데 형님이 뭔 일로 여기까지 오셨을까?”

그들은 원래 오늘 밤에 인천 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벌써 시간을 확인한 듯, 이성욱이 그렇게 물었다.

역시 머리 쓰는 건 유지태보다 이성욱이 더 나았다.

그래서 유지태도 하동훈에게 전화를 받자마자 여기로 달려 온 것이고.

“실은....”

유지태가 하동훈이 좀 전 걸어 온 전화 내용을 그대로 이성욱에게 얘기했다.

그러자 그 얘기를 들으며 이성욱이 심각한 얼굴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유지태가 얘기를 다 끝냈을 때, 이성욱이 그에게 불쑥 물었다.

“그래서 형 생각은 하동훈을 없애 버리자는 거네?”

“그렇지.”

하지만 이성욱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그 놈에 대해 잘 알 듯이, 그 놈도 우리를 잘 알아. 그런데 우리가 자신을 없애려 할 수 있다는 걸 몰랐을까?”

“뭐?”

“그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을 거란 얘기야.”

이성욱이 그 말을 했을 때였다. 이성욱의 짐작대로 하동훈이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유지태에게 보내왔다.

“이 씨발 새끼가....”

그 메시지는 사진 파일이 첨부 되어 있었는데, 그 사진을 본 유지태가 격분했다.

그럴 것이 그 사진에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뭐가 그리 좋은지 활짝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하동훈이 경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튼 수작 부리면 유지태의 미국에 가 있는 아내와 자식들의 안전을 장담치 못한다고 말이다.

“어쩔 수 없어. 그 새끼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하지만 상대가 삼명家의 막내다.”

“지금으로서는 막내가 아니라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이라도 없앨 수밖에 없어.”

이성욱의 그 말에 유지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성욱이 지금 위험천만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그와 오랜 친분을 이어 온 유지태가 직감한 것이다.

“너, 너....”

“그래서 말인데. 일단 규호와 그 가족부터 미국에 보내자. 이 일은 형과 내가 처리하고. 처리 직후 우리도 미국으로 뜨고.”

삼명家의 막내를 죽이고 한국에서 살 거라는, 어수룩한 생각 자체를 이성욱은 애초에 하고 있지 않았다. 이성욱의 그 말에 눈동자가 격렬히 흔들리는 유지태.

유지태 본인도 잘 알았다. 지금 이성욱이 내린 결정이,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이란 걸 말이다.

하지만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고 쭉 살아온 조국을 버리고, 앞으로 타국인 미국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중년 남자가, 그걸 바로 받아드린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잠, 잠깐만....”

아무래도 유지태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았다.

그래서 이성욱은 유지태를 그대로 두고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씻고 나올 때 정도면 유지태도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 되어 있을 거라 여긴 듯 했다. 그때였다.

딩동! 딩동!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 * *

유지태는 안 그래도 골치 아픈데, 누가 초인종을 누르자 인상을 팍 찌푸렸다.

딩동! 딩동!

하지만 초인종은 계속 울렸고 이 집 주인인 이성욱이 지금은 욕실에 들어간 터라 어쩔 수 없이 그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누구세요?”

평소 유지태와 달리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

그런데 더 짜증나게 초인종은 누르면서 상대가 자신이 누군지를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보나마나 저 하늘 위에 높으신 분 믿으라는 신도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유지태는 그냥 생 까기로 하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딩동! 딩동!

근데 자꾸 초인종을 눌렀다. 순간 유지태의 인내에도 한계가 왔다. 그래서 버럭 소리쳤다.

“불교 믿으니까 그냥 가세요.”

딩동! 딩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초인종을 누르는 상대. 유지태는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피슝!

그때 열린 현관문 사이로 튀어나온 총구에서 뭔가 발사 되었고 유지태는 어깨가 따끔거리자,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꽂혀 있는 주사기. 그 주사기를 본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의식을 잃은 유지태가 털썩 현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현관문이 활짝 열리며, 한 외국인이 쓰러진 유지태를 훌쩍 뛰어 넘어, 집 안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피슝! 피슝!

그 순간 욕실 안에서 소음기 장착 된 총소리와 함께, 욕실 문에 구멍이 두 개 뚫렸다. 그리곤 거실 벽에도 두 개의 총탄 자국이 생겼고.

이어 욕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그 안에서 튀어나온 소음기 달린 권총이 거실 안을 향해 내리 다섯 말의 총알을 토해냈다.

피슝! 피슝! 피슝! 피슝! 피슝!

그 직 후 욕실 안에서 튀어 나온 이성욱이, 거실 바닥을 한 바퀴 구른 뒤, 총구를 거실에서 현관으로 빠르게 훑었다.

그 과정에 뭔가 눈에 띠었다면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을 이성욱. 하지만 그는 총을 쏘지 않았다. 그럴 것이 총 쏠 상대가 아예 없었으니까.

위이이이잉!

그때였다. 거실의 열린 창문 밖에서 이성욱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벌 소리 같기도 하고, 또 모기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에, 이성욱이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을 때였다.

드론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드론에 총구가 그를 겨누고 있는 걸 확인한 이성욱이, 놀라며 황급히 자신의 권총을 드론 쪽으로 겨눌 때였다.

“커억!”

갑자기 귀가 멍해지면서 머리가 핑 돌기 시작한 이성욱.

피슝! 피슝! 피슝!

그는 비틀거리며 남은 세 발의 총알을 허무하게 자기 집 천장에 쏴서, 구멍 세 개만 만들고 맥없이 픽 쓰러졌다.

* * *

세르게이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문을 연 상대에게 마취총을 쏘고 안으로 들어가서 봤는데, 거실 창이 이미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욕실 안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세르게이는 더 들어 갈 것도 없이 바로 몸을 틀어 그 집에서 가장 안전한 위치, 즉 그가 들어 온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총질이 이어지고, 욕실 안에 있던 알몸의 이성욱이 튀어 나왔다.

그 모습을 세르게이는 현관문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거실 창밖으로 드론이 나타났고, 세르게이는 재빨리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았다.

곧 드론에 장착 되어 있던 음파총이 발사 됐고, 거실에 나와 있던 이성욱은 세 발의 총을 쏘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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