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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하동훈은 서재국이 눈빛을 빛내며, 자기가 하란대로 다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직감했다.
서재국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자실 것도 없이, 바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서재국이 그에게 그가 그토록 원하던 공천권을 던져 주었다.
현 야당의 중진 의원 중에서, 서재국이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파워가 있는 의원이, 바로 5선의 함종도 의원이었다.
그는 야당 최고위원이면서, 야당의 텃밭인 경북의 공천권을 실제로 움켜쥐고 있는 실세였다.
그런 그가 뒤를 봐준다는 건, 하동훈도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금배지를 가슴에 달게 될 게 유력하다는 소리와 같았다.
“하하하하하. 됐다. 됐어.”
국회의원만 된다면 뭐가 두렵겠나?
삼명그룹? 물론 초선의원이 상대하기 버거운 곳이다.
하지만 계파만 잘 골라, 거기 어르신의 밑만 잘 닦아 드린다면, 삼명그룹도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 까짓 하자. 지금은 어쩔 수 없잖아.”
서재국의 사저를 나서며, 하동훈은 서지현이 원하는 대로 삼명家의 막내를 손보는 것에 대해서, 완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멍멍멍...”
그때 개 소리와 함께 앙증맞은 체구의 말티즈 한 마리가 하동훈을 향해 뛰어왔다.
“어헉!”
그런데 그 귀여운 강아지를 보고, 하동훈이 기겁하더니 냅다 자기 차로 뛰기 시작했다.
꽝!
자기 차에 타기 무섭게 하동훈은 차문을 세게 닫았다.
“헉헉헉헉....”
그리곤 사색이 된 자기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놈에 지긋지긋한 개 알레르기....”
알레르기는 치료 안 된다, 면역요법 이란 게 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스스로 관리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관리란 게 이렇게 개만 보면 피하는 거고.
“왈왈왈왈....”
그때 언제 쫓아왔는지 그 말티즈 새끼가 차 밖에서 그를 보고 짖어댔다.
“저리 가! 확!”
진짜 좆만 한 게 제대로 하동훈의 성질을 긁고 있었다.
“죽여 버려?”
하동훈은 곧장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 다음 주위를 살폈는데 일단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성질대로, 차로 말티즈를 치어 죽이지는 못했다.
청담동의 비싼 주택가답게 주위에 CCTV카메라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동훈아!”
그때 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요 녀석. 그새 달아나면 어떡하니?”
아주머니 한 명이 뛰어와서는, 말티즈 목에 개 줄을 채웠다.
“가자. 동훈아.”
그런데....말티즈 이름이 동훈인가 보다.
“씨발....”
하동훈은 자기랑 같은 개새끼 이름 때문에, 공천 받아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싹 달아나면서, 되레 기분이 확 더러워졌다.
* * *
하동훈은 일단 국회로 향했다.
서재국에게 따로 인사하고 자실 것도 없었다.
아까 서재에서 나올 때 인사한 걸로 충분했다.
대통령 별정직 국가공무원 자격 역시, 당장 내려놓았다.
청와대에 전화 한 통하니 끝이었다.
현 권력자, 현 실세들이 바글대는 청와대에서, 이전 대통령을 보좌하는 별정직 공무원 하나 관두는 건, 별 이슈도 아니었던 것이다.
“속 시원하다.”
청와대를 나오고 전 대통령인 서재국을 곁에서 모시면서, 이런저런 말들이 참 많았다.
그때 마다 하동훈은 욱했지만,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 온 보상을 드디어 오늘 받은 것이다.
물론 거기에 그의 정부인 서지현이 많이 개입해서, 영향력을 행사해 준 덕분이었지만.
어째든 이제 금배지 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국회!”
드디어 멀고 먼 길을 돌아서 다시 국회로 돌아 온 하동훈.
그는 야당의 중진의원인 함종도 의원 실을 바로 찾아갔다.
“의원님 당직 회의 참석 중이신데. 기다리시겠어요?”
“네.”
당연히 기다려야지. 그렇게 하염없이 두 시간을 내리 함종도 의원실에서 기다린 하동훈.
“오오. 하 보좌관!”
다행히 함종도 의원은 그를 알아봐 주었다.
“어르신께 얘기 들었네. 경북 영천에 공천 받기를 원한다고?”
“네. 영천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겠습니다.”
“그래. 그 패기 보기 좋아. 하긴 우리 영남에도 이제 슬슬 세대교체가 이뤄지긴 해야지.”
말은 그렇게 해도 늙은이들이 쉽게 영남 텃밭을 내 놓으려 할 리 없다는 건, 함종도 의원도 알고 하동훈도 아는 바였다.
오히려 하동훈이 공천 받으려는 경북 영천을 노리는, 영악한 야권의 늙은 생강들이 쏟아져 나올 게 뻔했다.
그걸 막아줘야 할 사람이, 바로 지금 하동훈의 눈앞에 있는 함종도 의원이었다.
그가 나서주지 않으면 하동훈은 경북 영천에 공천을 받아도, 주위 강압에 그걸 도로 토해내야 할지 몰랐다.
그만큼 국회의원이란 자리는 한번 하고 나면, 내려오고 싶지 않는 중독성이 강한 자리였다.
“한번 시원하게 밀어주십시오. 그럼 국회에 들어가서, 의원님 앞길은 제가 열어드리겠습니다.”
“오오! 믿음직스럽군. 그래. 해 보자.”
함종도 의원은 자신이 잘 아는 선거 브로커를 하동훈에게 붙여 주고, 경북 영천의 야당 선거운동본부장을 연결해 주었다.
“이제 자금만 챙겨서 영천 내려가면 끝이군. 잘해 보게.”
“주신 도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함종도 의원에게 대충 받을 건, 다 받은 하동훈이 국회를 나설 때,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때 서지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런....”
그러고 보니 점심 전에 서지현에게 연락하기로 했었는데, 바쁘다보니 그걸 깜박해 버렸다.
“어어. 자기야.”
하동훈은 최대한 밝게 서지현의 전화를 받았다.
=뭐야? 왜 내 전화 씹는 건데?
생각대로 서지현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미안. 공천 문제로 국회에 들어와 있다 보니, 자기한테 전화하는 것도 깜빡했다. 나 지금 점심도 굶고 아직 저녁도 못 먹었어.”
이럴 때는 최대한 죽는 소리를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서지현이 혼자 흥분해서 날뛰게 되고, 그때는 하동훈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공천? 아빠가 동훈씨 공천권 주기로 했어?
“어어. 고맙게도 날 잊지 않으셨더라고.”
=잘 됐네. 그래서 아빠가 동훈씨에게는 뭐라셔?
삼명家의 막내 문제에 대해, 서재국 전 대통령이 하동훈에게 딱히 뭐라고 한 말은 없었다.
하지만 하동훈 입장에서, 지금 삼명家의 막내를 건드려서 위험을 자초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서재국 전 대통령도 삼명家의 막내를 건드리는 것에 대해, 살짝 우려 섞인 반응을 보였다고 에둘러 말했다.
=거 봐. 아빠는 늙었다니까. 그래서 동훈씨는 어쩔 거야?
“자기는 어쨌으면 좋겠는데?”
=나야 그 새끼 조지면 좋지. 다시 안 보게 되면 더 좋겠고.
“하아. 알았어. 내 힘닿는 데까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보도록 할게.”
=역시. 내가 믿을 사람은 이제 동훈씨 뿐이라니까.
서재국 전 대통령이 마지막에 그보고, 서지현에게 잘하라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하동훈은 삼명家의 막내를 건드리는 걸 계속 유보시켰을 거다.
그러다 서지현이 폭발 직전에 다다랐을 때, 그녀 설득 작업에 들어 갈 테고.
자기가 국회의원이 될 때까지만 참아달라고.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그때는 제일 먼저 그 삼명家의 막내를 처리해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서재국 전 대통령의 체면을 봐서, 어쩔 수 없이 당장 서지현의 요구를 받아드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성공하면 바로 연락 줘.
“그래. 너도 이제 마음 편히 지내.”
=안 그래도 그러려고. 내일부터 다시 재단 이사장 노릇 제대로 해야지 뭐. 그럼 동훈씨도 이제 쉬어. 아아. 공천 받은 거 축하 해.
“고마워. 자기도 잘 자.”
그렇게 서지현과 통화를 끝낸 뒤, 하동훈의 머릿속에 갑자기 복잡해졌다.
막상 어쩔 수 없이 하기로 했지만, 역시 삼명家를 건드리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아마 그쪽에서도 하동훈의 의뢰를 그리 달갑게 받아드리진 않을 것이고.
하동훈에게는 10년 넘게 함께 해 온 처리자들이 있었다.
모두 셋으로 구성 된 이들은, 여태 하동훈의 의뢰를 맡아서 단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셋 모두 정체를 일체 밝히지 않았고, 하동훈도 그들에 대해 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서로를 아예 모르기에, 그들 끼리 더 신뢰하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에이....모르겠다. 집에 가서 좀 더 생각해 보고....의뢰를 넣어도 넣자.”
일단 의뢰가 들어가면 그들과 일절 연락이 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멈추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하동훈으로서도 이번 일 만큼은 좀 더 신중을 기하기로 하고, 집으로 차를 몰아갔다.
* * *
삼명호텔 15층에 위치한 대표실.
삼명호텔 CEO인 백지연은, 비서가 올린 마지막 서류에 결재를 한 후 몸을 일으켰다.
벌써 퇴근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바빴고, 백지연은 그렇게 일에 치여서, 화장실 갈 시간도 아껴 가며 일을 했는데, 또 퇴근 시간을 넘겼다.
백지연은 일단 화장실부터 다녀왔다.
그 사이 그녀의 비서는 그녀가 오전에 의뢰한 친자 확인 결과를, 그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아....”
그 결과지를 앞에 두고 백지연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백지연은 떨리는 손으로 그 결과지를 집어 들려다가, 이내 다시 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창가로 갔다.
이미 어두워져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기 시작한, 도심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던 백지연.
그녀는 질끈 입술을 깨물어다가 다시 짧게 한숨을 내 쉰 뒤, 몸을 돌려 책상 쪽으로 갔다. 그리고 결과지를 살폈다.
“....아아!”
그리곤 예상했다는 듯 그녀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결과지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른 결과지를 꺼내 살핀 그녀 입에서 이번에는 안도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늘 아침에 그녀가 우려 했던, 그 결과가 친자 확인 결과에 그대로 나오고 있었다.
“뻐꾸기 맞네.”
그녀 입에서 자조 섞인 푸념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서지현은 그녀의 친모가 맞았다.
이렇게 해서 백승렬 회장은 그녀와 완전 남남임이 밝혀졌다.
그 동안 자기 자식도 아닌데, 나름 딸처럼 대해 주느라 고생했을 백승렬 회장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더불어 자신을 뻐꾸기에 비유한 막내 백준열. 그 새끼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녀석과 자신도 이제 생판 남남이었다.
자신이 뻐꾸기 인지 백준열이 언제부터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걸 알면서도 그 동안 그녀를 누나 대접해 준 것에 대해서 고맙긴 했다.
“내 친부가 누구냐고 엄마에게 물으면....안 되려나?”
백승렬 회장이 자기 아버지가 아니라니까, 괜히 자기 친부가 누군지 궁금해진 백지연이었다.
“가만....혹시 엄마가 준열이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백지연도 반대였다.
만약 모친이 준열을 어떻게 한 것이, 백승렬 회장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끝장나는 거지.”
백승렬 회장 성격에 가만있을 리 없었다.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전 대통령이자,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 서재국도 감옥에 처넣으려 했던 백승렬 회장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들을 낳아 주지 못할망정, 그 귀한 아들을 해치기나 하는 모친과 뻐꾸기 백지연을 과연 봐 줄까?
아마도 먼저 서재국 전 대통령부터 감옥에 처넣고 나서, 두 모녀를 지옥의 구렁텅이에 던져놓고서, 죽지도 살지도 못한 처참한 신세로 전락시켜 놓을 게 뻔했다.
백지연은 혹시 몰라 모친인 서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딸의 전화에도 잔뜩 날이 서 있는 모친. 그런 그녀에게 백지연이 물었다.
“엄마. 혹시 백준열이 건드릴 생각이면 절대 하지 마.”
=뭐?
“그랬다간 우리 다 죽, 아니 나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
백지연은 전화기 잡고 모친에게 좀 전에 자기 머릿속에서 한 생각들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자기라면 끔찍한 모친에게, 가장 강한 경고 멘트를 날렸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니가 왜 죽어?
“그러니까. 만약 그럴 생각이면 하지 마. 농담 아냐. 알았지?”
=어어. 그, 그게....
“알았냐고?”
백지연이 버럭 소리까지 치자, 서지현이 놀라며 대답을 하긴 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계집애가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오늘은 한잔하고 들어 갈 테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
그 말 후 백지연은 모친의 다른 말은 듣지도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 * *
백지연의 전화를 받고 난 서지현.
“이, 이거 어쩌지?”
딸내미한테는 알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하동훈에게 백준열을 처리하라고 말한 상태였다.
물론 하동훈에게 얘기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다시 그에게 전화해서 백준열을 처리하는 걸 멈추라고 하면 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나름 신중하게 생각하고 나서 결정한 일이었다.
백준열은 이 일로, 두고두고 자신과 자기 딸을 괴롭힐 것이다.
거기다 백승렬 회장도 지금 사태를 곧 파악할 테고.
그렇게 되면 백 회장이 백준열을 끼고 돌게 분명했다.
그럼 두 번 다시 그 녀석을 제거할, 이런 절호의 찬스는 없을지 몰랐다.
대통령까지 한 정치인의 딸로, 서지현은 정적은 제거할 수 있을 때 꼭 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긴다고 말이다.
“그래. 백준열 그 새끼는 이번 기회에 꼭 죽여야 해.”
그렇게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 어이없게 서지현은 하동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훈씨. 막내 건드리는 거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안 하는 게 좋겠어. 어. 그래. 그렇게 알고 끊을게.”
그렇게 하동훈과 서둘러 통화를 끝낸 서지현.
“이런 미친....”
그녀가 생각해도 좀 전에, 자신이 왜 그런 전화를 하동훈에게 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도 백준열은 손 봐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근데 미친 것도 아니고....
그렇게 그녀가 한 동안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해 어이없어 할 때였다.
“회장님 오셨습니다.”
최 집사가 백승렬 회장이 귀가했음을 알려 왔고, 서지현은 멍하니 몸을 일으켜서, 여느 때처럼 퇴근한 남편을 마중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