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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121화 (1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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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그래도 그나마 퇴직금은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그걸로 그의 가족은 어째든 1년은 버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가장인 그는 내일부터라도 당장 재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하아....”

그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오는 박 과장. 여기처럼 든든한 직장을 구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차은석처럼 유능하기라도 했다면, 다른 연예 기획사에 바로 재취업이라도 했지.

자신처럼 줄타기에만 열중 해 온 직원을, 뽑아 줄 연예 기획사는 없었다.

이 바닥이 생각보다 좁아서, 각 회사마다 능력 있는 직원이 누군지 다들 파악하고 있었다.

박 과장이 알기로 차은석은 10곳도 넘는 연예 기획사들이, 그녀가 JYB엔터를 그만두고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백준열 대표가 그녀를 승진시키고, 중용하기로 하면서 그 일은 나가리 되었고, 10곳도 넘는 연예 기획사들도, 보기 좋게 헛물만 켠 꼴이 되고 말았다.

박 과장은 마지막으로, 자기 자리에서 짐을 챙겨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조하나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제야 조하나 대리 걱정을 하는 박 과장. 하지만 그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지금 누구 걱정할 때야? 빨리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지. 나 아니면 우리 가족은 누가 건사해?”

박 과장은 비장한 얼굴로, 자신의 짐을 챙겨서 사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그가 있었던 사무실 팀원들 중, 누구하나 그보고 잘 가라는 말 한마디 하는 직원이 없었다.

당연히 마음속으로야 서운했다. 한데 박 과장은 그런 그들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가 뭐 하나 잘해 준 게 있어야지.

오히려 그들을 구박하고 잔소리나 퍼부어댔지, 살갑게 대해 준 적이 없는데 그들에게서 뭘 바라겠나?

박 과장은 씁쓸하게 웃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고, 그와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을 한 명 발견했다.

“총무부장님?”

배 상무의 오른팔로 불리던, 그 총무부장도 예외는 없었다.

아마도 저 양반이 느끼는 배신감은, 박 과장에 비해 백배는 더 클 듯 했다.

왜냐하면 총무부장은 정말 열과 성의를 다해서 배 상무를 모셔왔으니까.

하지만 돌아 온 건 배 상무의 싸늘한 배신이었다.

“박 과장?”

“짐이 그게 답니까?”

“자네도 많은 거 같지는 않은데?”

둘 다 종이 박스 하나만 달랑 들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게 그들이 이 회사에게 가져 나갈 수 있는 전부였다.

고작 이거 밖에 들고 나갈 거 없는 회사에, 그 동안 그들의 중요한 시간을 갈아 넣어 온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진짜 갈아 넣어야 할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집중한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알아보니 배 상무 그 인간 벌써 튀었다더군.”

“그러고 남을 인간이죠.”

“이제 뭐할 텐가?”

“재취업해야죠.”

“갈 때는 있고?”

“....”

문제는 거기 있었다. 그들을 받아 줄 만한 회사가 없다는 것.

“부장님은요?”

“지방으로 내려가려고. 거기 형님이 중소기업을 운영 중이신데, 마침 총무부장 자리가 마침 비었다네.”

박 과장도 생각 같아서는 총무부장에게 빌붙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이 생활 기반인 그가 지방으로 가는 건, 절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총무부장도 자기 얘기를 별 부담 없이 한 거고.

그들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걸리는 거 하나 없이, 곧바로 지하 2층까지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각자 자기들이 타고 온 차로 향했고, 짐을 싣고 나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다.

“잘 살아.”

“건강하십시오.”

그렇게 JYB엔터에서 나름 잘나가던, 그래서 임원까지 꿈꾸던 두 샐러리맨들이 직장을 잃고, 험난한 세파 속으로 뛰어 들어야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있지 않은가?

그들은 몰랐지만, 아니 영영 모르겠지만, 그제까지 만해도 그들의 동료였던 한 여자는, 그런 삶도 영위하지 못하고, 땅에 묻히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게 봤을 때, 그들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봐야 맞았다.

* * *

박인호는 널따란 자신의 방보다, 창밖으로 보이는 빌딩 숲에 더 넋이 나가 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보이는 건, 끝없이 펼쳐진 먼 바다와 절망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감옥과도 같았던 그 거제도에서 벗어나서, 이제 희망으로 가득한 서울로 돌아왔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쭉 출세하는 것뿐이었다.

이미 아우토반과 같은 그 출셋길에다가, 백준열 대표로부터 람보르기니의 차 키까지 받은 박인호였다.

이제 그 차에 타서 300Km/h의 속력으로 신나게 도로를 질주하기만 하면 됐다.

그 질주의 끝에는 성공이라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달콤한 선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좀 걸리시네.”

자신에게 아예 이곳의 대표 업무를 인수인계하겠다던 백준열 대표였다.

하지만 곧 부르겠다던 그 말과 달리,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업무가 시작 된지 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백 대표는 그를 대표실로 부르지 않고 있었다.

뭐 그 사이에 박인호는 살짝 조연급 일처리 하나를 하긴 했다. 대표실 옆 회의실에서 말이다.

삐이이이익!

그때 그의 책상 위 인터폰이 울렸다.

“네?”

아직 자기 비서와 터놓고 지내지 못한 터라, 반말을 쓰지 않고 있는 박인호 부대표.

=부대표님. 대표님께서 찾으십니다.

“알았어요.”

이제야 백 대표가 말하던 정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점심 먹고 대표실로 가면서, 백준열 대표가 박인호 보고 그랬다.

자잘하게 정리 좀 할 게 있다고.

그 동안 부대표실이나 구경하고 차나 한잔하고 있으래서 여기 왔는데, 이미 차는 다 마셨고 부대표실 구경은....

“일하는데 책상 하나면 되지. 무슨 공간이 이렇게 넓은지....”

예전에 자기 일하던 공간에 비해, 족히 20배는 더 넓어 보이는 부대표실이, 박인호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박인호는 곧장 대표실로 향했고, 대표실에 들어가기 전 비서실의 비서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사람이야 인형이야?’

김 비서의 미모 앞에 또 한 명의 남자가, 영혼이 탈곡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김 비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부대표님. 입에 파리 들어가겠어요.”

“네? 아아....실례했습니다.”

“괜찮아요. 자주 보시면 익숙해지실 테니까.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처음 보면 다들 겪게 된다는, 김 비서와의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박인호는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미안해요. 자잘한 정리가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이리로 오세요.”

백준열 대표는 아예 박인호를 자신의 책상 쪽으로 불렀다.

“앉으세요.”

“하지만....”

대표가 앉으란다고 덥석 대표 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억지로 앉히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백준열 대표는, 그 뒤로 3시간 동안 박인호를 자기 자리에 앉혀 놓고, 대표가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인수인계 해 나갔다.

“와아. 진짜 대단하시다.”

그걸 보고 김 비서가 다 혀를 내둘렀다.

그 만큼 백준열은 악착같이, 자기가 할 일을 박인호에게 전부 알려주려고 노력했고, 유능한 박인호는 그걸 쉽사리 받아드리면서 백준열을 흥분, 아니 기쁘게 만들었다.

“하하하하. 됐다. 됐어.”

“네?”

“아, 아니. 박 부대표의 능력이 이렇게 출중하니, 우리 JYB엔터의 미래가 앞으로 얼마나 밝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알려 줄 건 얼추 다 얘기 한 거 같은데. 내일 하루 실전 테스트 해보고, 모레부터는 부대표 전결로, 모든 결재가 처리 될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런 식으로 일을 떠넘기면 부담스러워 하거나, 거부 반응이 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박인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JYB엔터의 일이, 그다지 어려운 수준의 일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초등학교 교장 일을 보라고, 대학교 총장을 그 자리에 앉혀 놓은 거랄까?

물론 초등학교 교장도 할 일은 많다. 손도 많이 갈 테고.

하지만 대학총장에 비해서, 그 규모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랄까?’

하지만 JYB엔터의 규모는 급속도로 커질 것이고, 내년에는 ‘염소’ 정도 잡을 수 있을 테고, 후 내년쯤이면 드디어 ‘소’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니, 박인호라는 인재가 JYB엔터에 있어서 뭐 꼭 차고 넘칠 정도는 아니었다. 백준열의 기준에 딱 부합하는 인재랄까?

* * *

퇴근 30분을 앞두고, 박인호에게 하던 인수인계를 전부 끝냈다.

박인호에게도 거듭 강조했지만, 5시 퇴근 시간은 꼭 지키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박인호가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더니, 내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충성을 맹세했다.

그런 그에게 주말에는 절대 일하지 말 것이며, 하고 싶은 여가 생활을 즐기라고 더 말해줬더니, 아예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나를 끌어안고서, 평생 같이 가겠다고 했다.

뭐 그 만큼 박인호가 나를 좋게 봐준다니 고마운 일이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한테 물어보고 손도 잡고, 끌어안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무안해 하며, 후다닥 대표실을 나가는 박인호.

아마 오늘부터 5시 정각이면 칼 퇴근을 할 테지. 물론 나도 그럴 테지만.

그런데 왜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 지금에 꼭 받아야 할 연락이 오고, 만나줄 수밖에 없는 손님이 찾아오는 건지 모르겠다.

그 첫 시작은 JYB엔터 M&A팀의 채수민 팀장이었다.

김 비서를 통해 연락이 왔기에 나는 그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채 팀장입니다.

“그래요. 경일 건설 인수 잘 끝났습니까?”

=네. 그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좀 전에 세금 문제까지 다 처리했습니다.

“잘했어요. 지금 밖입니까?”

=네. 회사 들어가는 중입니다.

“그럼 거기서들 바로 퇴근하세요. 아니다. 회식 하세요. 맛있는 거 먹고 술도 한 잔 하고.”

=저어. 대표님. 회식보다 그 돈을 성과급으로 받을 수 없을까요?

“네?”

아직 이때의 회사 문화는 보수적인 편이었다.

일 잘하면 회사에서는 당연히 회식을 시켜줬고, 직원들은 그걸 당연히 받아드리는.

그런데 M&A팀장이, 지금 내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닙니다. 회식 할게요.

채수민 팀장도 지금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바로 정정했지만 나로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럽시다. M&A팀에게 이번 달 적정 성과급을, 지급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채 팀장은 내일 그 적정이 어느 정도인지, 정해서 결재 올리세요.”

=진, 진짜로 성과급을 주시겠다고요?

“왜요? 싫습니까? 그냥 회식할래요?”

=아, 아뇨. 회식이 싫습니다. 성과급으로 주세요.

채수민 팀장도 어지간히 한국 대기업의 회식 문화가 싫은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기억하기로도, 이전 내 삶에서도 한국 회식 문화에 대해서 말들이 많긴 했었다.

하긴 여기서 10년이 지나도 삼겹살에 소주 한잔, 그리고 2차로 대변되는 직장 회식문화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으니까.

회식은 왜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내야 하는 것인가라는, 새내기 직장인들의 푸념과 ‘회식=술’이라는 등식에 익숙해진, 고참 직장인들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그때 역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직장에서의 세대차이는 회식문화에서, 눈에 띄게 나타난다고 했던가?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도, 한국의 회식 자리에서 엄청나게 술을 마시는 것에 놀란다고 한다.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삶에 익숙한 외국인들이, 한국의 회식 문화를 부러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혹시 채 팀장. 외국에서 살았어요?”

=네. 저 재미교포에요. 미국에서 대학 나와서 바로 한국으로 넘어와, 여기 취직 했거든요.

채 팀장의 그 말을 듣고 나니 백준열의 기억 속에 그녀가 있었다.

미국 명문대를 나온 재미교포 재원이, 한국의 아이돌에 반해 한국으로 들어와서, 아이돌의 실상을 직접 파악하고 충격을 받았다나?

그래서 그 아이돌을 자신의 손으로 키워보겠다며, 아예 우리 회사에 입사한 케이스였다.

그런데 막상 직장 다니다 보니, 자기 적성이 아이돌 키우는 것보다는, 인수합병에 적합하다는 걸 깨달았다나?

그래서 백준열이 인수합병 쪽으로 키워 보았고, 그 결과가 대박이었다.

지금의 채수민 팀장은 JYB엔터에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인재가 되었다.

실제 작년 연봉 협상에서, 백준열은 연봉 600% 이상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해서, 채수민 팀장을 잡는데 성공했다.

=근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다 아시면서?

“우리 회사 직원이 몇 명인데 다 알아요? 뭐 제니퍼야 기억나지만.”

채수민 팀장의 미국 이름이 제니퍼다.

실제 백준열 머릿속에 기억나는 JYB엔터 직원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들도 제니퍼처럼 백준열에게 인상적인 능력을 선보였기에 기억하는 거지, 아니면 대부분 김 비서에게 떠 넘겼다.

그러니까 대표인 나보다 김 비서가, 이곳 JYB엔터 직원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아는 것이다.

=와우. 제 미국 이름도 기억해 주시고. 영광입니다. 대표님.

“한국의 회식 문화 짜증나죠?”

=뭐 그런 편이에요. 사람들끼리 모이면 정말 할 게 많은데, 매번 술만 먹으니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쌓일 때가 많아요.

역시 미국에서 크고 자라서 그런지, 대표와 통화 중인데도 제니퍼는 할 말을 다 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이건 말이 회식이지 고문이나 마찬가지라는.

고문에 가까운 회식을 굳이 억지로 할 필요는 없었다.

해서 나는 회식이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를, 이번 기회에 JYB엔터 직원들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 얘기를 제니퍼에게 했더니 그녀가 굉장히 좋아했다.

=That's great! 대표님. 멋져요.

그렇게 제니퍼, 한국 이름 채수민과 통화를 끝낸 뒤, 어느 새 대표실에 들어와 있는 김 비서를 쳐다보니, 어째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긴 그녀 일이 또 하나 늘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밖에.

그때 김 비서가 말했다.

“삼명자동차 백준경 대표님께서, 연락 달라십니다. 당장.”

큰형이 전화 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삼명자동차 대표란 사실에 좀 놀랐다.

하긴 삼명자동차가 망할 거란 걸 귀신같이 눈치 채고, 곧 삼명물산 대표로 자리를 옮겨 갈 예정인 백준경이었다.

‘가만....’

하지만 그건 백준경의 곁에 박인호가 있었을 때 얘기고. 지금 백준경에게는 그가 지낭이라 불렀던 박인호가 없다.

‘그 박인호는 지금 나한테 있지.’

그렇다면 백준경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게 됐고, 삼명그룹 후계구도에도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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