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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의 유일한 배우자, 흔히들 삼명家 사모님으로 부르는, 서지현은 밤새 한 숨도 못 잤다.
“이 개새끼가....”
자신의 딸을 뻐꾸기라고 한 놈 때문에 말이다.
뻐꾸기가 이제 둥지를 떠날 때가 된 거 같다는 말은, 곧 서지현보고 백지연이 백승렬 회장의 자식이 아니란 걸, 직접 밝히라는 소리나 진배없었다.
하지만 서지현은 죽으면 죽었지,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 비밀을 지켜 오느라, 그녀가 치른 희생이 얼만데. 그걸 지금 밝히라고?
그 보다 그 비밀을 알고 있는, 백준열을 설득시키는 게 더 나은 결정이었다.
해서 그러려고 백준열에게 계속 연락을 취했는데, 이 새끼가 그녀의 전화를 통 받지 않았다.
“사모님. 오늘 일정은....”
“다 취소 해.”
“네?”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서지현은 삼명 갤러리 관장과 삼명 문화재단 이사장 노릇을, 전혀 하지 않으려 들었다.
이건 그녀의 비서인 안 비서를,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어제 스케줄을 대부분 오늘로 미뤄 놓은 상황에서 말이다.
그걸 또 미루거나 취소한다? 아마 난리가 날 거다.
그 여파는 갤러리와 문화재단 전체에 영향을 끼칠 것이며, 삼명그룹 본사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를 비롯해서 수백 명의 갤러리, 문화재단 직원들이, 우수수 잘려 나가겠지.’
사모님 한명의 변덕 때문에 말이다.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안 비서를 비롯한, 현재 서지현을 모시고 있는 갤러리와 문화재단의 직원들은, 더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 사모님. 이러실 게 아니라 잠깐 바람이라도 쐬시면....”
안 비서는 어떡하든 서지현을 달래보려 했다.
하지만 서지현은 지금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
“바람은 무슨. 그 새끼가 내 전화를 씹고 있는 마당에.”
“네?”
“백준열. 그 새끼가 내 전화를 안 받는다고.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안 받아.”
“그, 그러시면 제가 전화해 보겠습니다.”
“안 비서가?”
그러고 보니 서지현은 단순하게, 계속 자기 전화로 백준열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녀 핸드폰으로 걸어서 안 받으면, 다른 전화로 걸어서 어떡하든 백준열이, 그녀 전화를 받게 만들면 그만인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못하는 건 그녀가 대 삼명家 사모님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 누가 감히 그녀의 전화를 씹을 수 있단 말인가?
“빨리 걸어.”
“네.”
그렇게 안 비서가 백준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그 개새끼가 안 비서의 전화는 대뜸 받는 게 아닌가?
“이이....”
서지현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 하지 못하고, 안 비서의 핸드폰을 빼앗아서 버럭 소리쳤다.
“백준열. 이 개새끼야!”
뚜뚜뚜뚜뚜....
그랬더니 백준열이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 이 새끼가 진짜....”
서지현은 안 비서 핸드폰으로 다시 백준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백준열은 이제 안 비서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서지현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괜히 화를 참지 못해 날뛴 탓에, 백준열과 정작 중요한 얘기를 나눌 찬스를, 날려 버린 셈이니 말이다.
그 뒤 서지현은 주위 사람들 핸드폰으로, 백준열에게 전화를 걸게 했다.
하지만 백준열도 눈치를 챘는지, 이제는 아예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서지현으로서는 진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때 안 비서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사모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 집사 전화는 백 대표님이 받지 않으실까요?”
“최 집사?”
서지현은 옳다구나 싶어서, 곧장 최 집사에게로 달려갔다.
* * *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안 받아도 되는 전화를 받고 말았다.
바로 뻐꾸기 엄마 전화를 말이다.
서지현 사모님은 내가 전화 받자마자 욕부터 내 뱉었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 뒤 그 어떤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최 집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다른 전화도 아닌 최 집사의 전화다.
“하아. 진짜 머리 좀 굴렸네.”
최 집사가 내게 전화할 일이 뭐가 있겠나?
하지만 최 집사의 전화는 안 받을 수가 없었다.
그건 아마 내 위의 두 형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삼명家의 주요 대소사를 관장하는 최 집사가 아니던가?
이건 최 집사의 탈을 쓴 서지현 사모님의 전화라는 걸, 알면서도 받아야 했다.
“네.”
=나야. 전화 끊지 마.
서지현이 다급히 말했다.
“먹을 게 얼마나 많은 데, 제가 먹을 게 없어서 욕을 먹습니까? 한 번 만 더 욕하면 바로 전화 끊겠습니다.”
아쉬운 쪽은 서지현이다. 나는 세게 나갔다.
=이이....알았다. 욕하지 않으마.
“무슨 일입니까?”
=너 어제 지연이한테 뻐꾸기 운운했다면서?
“정확히 뻐꾸기가, 이제 둥지를 떠날 때가 된 거 같다고, 지연씨 한데 말했죠.”
=뭐? 지연씨? 이 개....하아....
서지현 사모님은 내게 욕을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인 듯 보였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이 있으니, 차마 욕은 못 뱉고 그 화를 억누르느라 개고생 중이었다.
나는 바빴고 한가히 그녀의 푸념 따윌 들어 줄 시간은 아예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폭발 할 수밖에 없는 얘기를 꺼냈다.
“지연씨 생부가 누군지 곧 밝혀....”
뚜뚜뚜뚜뚜....
나는 내가 이 말을 하면, 도저히 못 참은 서지현 사모님이 욕을 내 뱉을 줄 알았다.
그럼 그 핑계로 내가 먼저 전화를 끊을 생각이었고.
한데 내 예상과 달리, 그 말을 듣고 난 서지현 사모님이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러나저러나 결과적으로 서지현 사모님과 통화를 끝낸 나는, 마저 하던 일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점심 먹기 전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살피고 있는 건, 이번에 JYB엔터에서 새롭게 만든 특수부문에 대한 제안서였다.
나는 어제 차은석을 특수 1부문장으로 승진 시켰고, 오늘 그녀를 정식 발령 낼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오늘 오전 중에, 새로운 부서인 특수 부문을 신설하는 게 급선무였다.
“일단 부서 인원은 50명으로 잡으면 되겠고....”
특수부문은 그야말로 스페셜한 연예인들을, 집중 케어하는 부서가 될 예정이었다.
당장 내가 생각 중인 스페셜한 연예인은, 바로 김명석과 최수현, 하종미, 그리고 박혜지였다.
그 스페셜한 연예인 1명 당 케어할 인원을, 10명씩 잡는다면 현재까지 총 40명, 거기에 혹시 스페셜한 연예인이 한 명 더 늘 수 있으니, 10명을 더 잡아 일단 50명으로 정하고, 오늘 중 부서 발대식까지 밀어 붙여야 했다.
“세부적인 조직의 틀은 오후에 발령 날, 특수 1부문장인 차은석 상무가 하면 될 테니....”
급한 대로 부서 신설과 발령이 급선무였다.
삐이이익!
=네. 대표님.
김 비서는 없지만 그녀 대타는 JYB엔터에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그 대타가 김 비서만한 역량을 갖춘 건 아니지만.
어째든 내가 전결한 결재서류를 각 부서에 보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오전 중 긴급히 처리한 결재 서류니까, 빨리 각 부서로 보내서, 오늘 중 일 처리가 가능하게 해요.”
=네. 대표님.
회사 대표로 있다 보면,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이렇게 생기는 법이었다.
그래도 오전 중 가장 급한 불을 끈 나는, 김 비서 대타로 불려 올라 온, 그래도 JYB엔터 여직원 중에서는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모두 출중한 여직원에게, 결재 서류를 넘기며 차 한 잔 가져다 달라는 부탁도 같이 했다.
* * *
오늘 오전에 하도 많은 전화가 걸려오고 문자가 날아오다 보니 못 확인했는데, 박지수로부터 한 통의 전화와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이게 다 서지현 사모님과 전경일 때문이다.
그 둘이 하도 전화질을 해 대니, 다른 전화와 문자를 받지도 확인도 못한 것이다.
나는 김 비서 대신 대타로 올라 온 여직원이 타 준 꿀 넣은 인삼차를 마시며 핸드폰을 살폈고, 그제야 박지수가 보낸 문자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어제 좋았어. 다음 주에 보자.]
간결한 내용. 하지만 거기 담고 있는 건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박지수를 자기 여자로 만든 뒤, 그녀 입에서 좋았다는 말을 들어 보는 게 처음인 백준열.
거기다가 제발 다음 주에는 안 봤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다음 주에 보자고 하지 않은가?
내 바뀐 말자지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때 문득 오늘 퇴근하면, 또 누구 집에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은 임연수로구나.”
임연수는 JYB엔터 소속으로 아나운서 출신 MC였다.
원래는 KVS의 간판 아나운서였는데, 9시 뉴스에서 하차하면서 전격적으로 프리를 선언했고, 그런 그녀를 백준열이 낚아 챈 것.
임연수는 딱히 문제 될 게 없는 여자였다.
물론 백준열은 그녀를 위해서도, 그녀 명의로 집을 사주었다.
평창동의 로데오 캐슬 최고급 빌라로 말이다. 83평인 여기 시세는 대략 35억 정도 했다.
임연수를 유혹해서 자기 여자로 만드는 건, 백준열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회사와 집만 왔다 갔다 한, 경력만 화려했지 인간관계부터 시작해서 사회생활까지,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젬병이었으니까.
좋은데 데려가고 좋은 거 사주고, 자신의 외모로 유혹하자 그냥 넘어왔다.
그래서 지금 백준열의 여자들 중에서, 임연수가 호감도에서 보면 백준열을 가장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임연수와 백준열은 신혼부부 같달 까?
작년 말부터 임연수가 자꾸 백준열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칭얼거리고 있는 게, 둘 사이의 문제라면 문제일까.
그 이외 둘은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오늘은 퇴근 후 집에 가서 편하게 쉴 수 있겠다 싶었다.
백준열의 기억에 따르면, 임연수는 백준열과의 빠구리에 비교적 만족해하는 여자였다.
아무래도 백준열이 그녀의 첫 남자라서 그런 거 같았다.
“놀랍군. 임연수가 30살의 나이까지 처녀였다니.”
그러니까 작년에 백준열이 임연수를 처음 안았을 때, 그녀의 일생에서 그가 첫 남자였단 소리다.
임연수 역시 박지수처럼 백준열에게는 연상의 여인이었는데, 차이라면 박지수는 백준열에게 누나처럼 굴었다면, 임연수는 아직 철없는 여동생 같았다.
임연수에 대한 기억이 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는데, 그냥 그녀가 여태 살아 온 인생처럼, 나와 그녀의 관계도 평탄했다.
임연수는 라디오 고정이 하나에, 종편 시사채널 MC와 지상파로 월요일의 ‘가요노래 무대’MC를 현재 맡아보고 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더 많은 프로그램의 MC로서 활약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일에 크게 욕심을 내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며, 나머지는 여가와 취미 생활을 주로 즐겼다.
“임연수가 진짜 하고 싶은 거 하고 잘 살고 있네.”
일반적으로 ‘웰빙’이라 하면 식생활 개선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상 진정한 웰빙 라이프는 잘 먹고, 잘 자고, 질 좋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봤을 때 임연수야 말로, 지금 제대로 된 웰빙 라이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니 나로서도 그런 그녀가 부러울 밖에.
퇴근하고 나도 그런 임연수처럼, 웰빙 라이프를 제대로 한 번 맛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 점심시간이 되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오늘 점심은 뭐 먹나?”
신기하게 지금의 나도, 여느 직장인처럼 뭘 먹을지 고민을 한다는 거다.
이게 다 김 비서가 없어서다. 김 비서가 있었다면 분명 또 방송계나 연예계 높으신 분이랑, 점심 약속을 잡아 놨을 테니 말이다.
* * *
“허얼....”
내가 점심 먹으러 대표실을 나오자, 이미 비서 자리가 비어 있었다.
김 비서 대타로 올라 온 그 여직원이, 벌써 점심 먹으러 가고 없었던 것.
뭐 그 여직원을 오늘 또 볼 일은 없었다.
점심시간 끝나면 김 비서가 저 자리에 복귀해 있을 테니 말이다.
“오늘 삼계탕 어때?”
내 그 물음에 문대식이 빙그레 웃었다.
왜냐하면 문대식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삼계탕이었으니까.
한마디로 문대식보고 삼계탕 잘하는 식당 예약 하란 소리였다.
신나 보이는 문대식이 어딘가 전화를 하는 사이, 경호팀원들과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5층에서 멈췄고, 문이 열리자 한 무리의 직원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대기 중이었다.
근데 그 무리에서 대표인 나보다, 직원들에게 더 깍듯한 대우를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작자가 있었다.
“배 상무?”
“아이고. 대표님.”
배운철 상무가 사람 좋은 얼굴로, 내게 슬그머니 머리 숙여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탔고, 그런 그의 뒤로 그의 사람들로 보이는 직원들이 탑승했다.
다들 내 눈치를 보는 듯 했지만, 배 상무를 믿는 듯 그 주위를 에워싸며, 엘리베이터 안에 자리를 잡았다.
순식간에 엘리베이터가 사람들로 꽉 찼는데, 다행히 과적은 아닌 듯 벨은 울리지 않고 그대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식사하러 가나 봐요?”
내가 먼저 묻자, 배운철 상무가 바로 대답했다.
“네. 다들 맛있게 식사하고, 오후에 더 열심히 일해야죠. 그렇지들? 하하하하.”
일은 개뿔. 배 상무 주위의 직원들 중에, 백준열이 인재로 점찍은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보신주의에 물든, 곧 구조조정의 여파에 가장 먼저 잘려 나갈 쓸모없는 작자들이었다.
=딩동댕!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는 금방 1층에 도착했고,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러자 2개의 팀으로 갈렸다.
배 상무와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 직원들과, 나와 경호팀원들로 말이다.
“배 상무님. 인기가 많아 보이시네요?”
“아이고. 아닙니다. 대표님. 인기는 무슨.”
그때 눈치 없는 배 상무 쪽 직원 하나가 말했다.
“배 상무님. 인기 짱 이세요. 점심 때 맛있는 것도 잘 사주시고. 맞지?”
“어? 어어. 그래.”
괜히 그 옆에 직원을 걸고넘어진 덕분에, 그 직원까지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더 설치려는 것을, 눈치 빠른 배 상무가 나서서 말렸다.
“어허! 자네. 그만 좀 하지.”
“네? 아네.”
그제야 자신이 너무 설쳤다는 걸 깨닫고 꽁무니를 빼는 그 직원.
하지만 이미 폭탄을 터졌고, 그걸 수습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배 상무님 여윳돈이 많은가 봐요? 이 많은 직원들 점심도 척척 사주시고 말입니다.”
“그, 그게....”
“하여튼 식사들 맛있게 하세요.”
나는 배 상무의 구질구질한 변명 따윌 듣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빨리 그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