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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어차피 엘베와 통화는 길게 할 수 없었다.
개와 길게 통화했다가는 왜, 딱 듣기 좋은 말이 있지 않은가?
‘미친 놈!’
그 소리를 들을 생각이 없었던 나는, 엘베에게 내가 지금 본가에 있고, 백 회장과 담판 지을 일이 있으니 그 볼일을 보고 나면, 그때 너를 데리러 개 호텔에 가겠다고 하자, 엘베도 순순히 그러라고 했다.
뭐 개를 상대로 이런 식의 구체적인 말을 하는 거 자체가, 어차피 미친놈처럼 보이긴 하겠네.
내 짐작대로 그 말을 같이 듣고 있었던, 개 호텔 직원이 적잖게 당황한 듯 말했다.
=고, 고객님. 오늘 오셨다가 오늘 바로 나가시는 것은 좀....
“내일 호텔 비까지 지불 하겠습니다.”
나한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바로 돈으로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결하는 게, 가장 빠르고 또 확실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어머. 그러시면 아무 문제없겠네요. 엘베. 언제든지 데려 가세요. 호호호호.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엘베와 개호텔 직원과 얘기를 끝낸 내가, 막 핸드폰을 내릴 때 서재 문이 열리고 백 회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피곤한 듯, 한 손으로 자신의 목과 어깨를 연신 주무르고 있었다.
그게 내 눈에는 마치, 나보고 어깨를 주무르라는 제스처로 비쳐졌다. 그래서 생각대로 말했다.
“어깨 좀 주물러 드려요?”
“뭐?”
내 말에 기가 차다는 듯, 날 쳐다보는 백 회장. 뭐 그러고 보니 백준열의 기억에 아버지 몸에 손 한 번 댄 적이 없었다. 그 만큼 백 회장과 나는 대면 대면한 사이였었다.
“뭐 싫으시면 마시고요.”
“허어....”
백 회장은 어이없어 하며, 서재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때 이번에는 내가 황당해졌다.
“주물러.”
“네?”
“주무르라고. 어깨 주물러 준다며?”
설마 백 회장이 자기 어깨를 나보고 주무르라고 할 줄이야?
나도 내가 예상치 못한 말을, 백 회장에게 듣자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뱉은 말이니,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겠지.
해서 백 회장이 앉아 있는 뒤쪽으로 돌아가서, 두 손으로 백 회장의 어깨를 잡았다.
근데 어깨가 무슨 돌처럼 딱딱하다.
“많이 뭉쳤네.”
그 말을 하면서 나는 열심히 백 회장의 어깨를 주물렀다.
이전 생에서 나는 제법 사람을 잘 주물렀다.
그 주무르는 게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 같았으면, 지금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겠지.
나는 어릴 적부터 손이 따듯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런 손으로 사람의 어깨나 팔 다리를 주무르면, 신기하게도 다들 시원하다며 참 잘 주무른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뭐 어째든 그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딱딱하게 뭉친 백 회장의 어깨가 내가 주무르자 제법 많이 부드러워졌다.
“으으으....”
백 회장도 시원했던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그 실수를 깨닫자, 바로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내 어깨 주무르기는 10분 넘게 계속 되었고, 그로 인해 백 회장과 내 사이의 간격도 많이 좁혀졌다.
물론 그건 순전히 내 생각일 수 있겠지만.
뭐 어쨌든 백 회장도, 처음 서재에 들어 올 때 굳었던 얼굴이 많이 펴진 건 사실이었다.
* * *
백 회장은 늘 바쁜 양반이었고, 나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어깨 안마를 받으면서, 그나마 그 시간의 80-90%가 훌쩍 날아가 버렸다.
“왜 날 보자고 했느냐?”
그래선지 백 회장은 내 어깨 주무르기가 끝나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백 회장과 긴 시간 얘기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바로 얘기했다.
“아버지. 저 내일 삼명 전자에 못 갑니다.”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미 발령까지 다 내려놓은 마당에!”
예상대로 백 회장은 내 마를 듣고 불 같이 화를 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준비해 둔 핸드폰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이건....”
그 핸드폰 화면에 그가 10여 년 전 저질렀던 살인의 증거가 나와 있자, 백 회장의 두 눈이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너, 너 이, 이게 어디서 났냐?”
“그게 중요합니까? 제가 그 증거물을 언제든 검경에, 가져 갈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나는 아예 대 놓고 백 회장을 겁박했다.
그러자 내 핸드폰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백 회장.
“크하하하하.....”
그가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나는 진짜 백 회장이 충격에 미쳐 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그건 나의 과한 우려에 불과했다. 백 회장이 갑자기 또, 그 웃음을 뚝 그쳐 버렸으니까.
무슨 켜고 껐다가 마음대로 되는, 웃는 기계도 아니고 말이다.
“너 이 새끼 그 동안, 잘도 송곳니를 숨겨 왔구나?”
“네?”
“그래. 이래야지. 백승렬의 새끼가 이래야 맞지. 지 애비의 목줄을 제대로 물었어. 크하하하하!”
“....”
나는 당최 백승렬 회장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또 겉으로 티내지는 않았다.
백준열도 백승렬 회장의 자식이라고, 이럴 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꼭 닮아 있었다.
나한테는 백 회장이 왜 저러는지가 중요하진 않았다.
당장 내일 삼명 전자에 출근하는 것부터, 막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아버지. 그럼 저 내일 삼명 전자 안 가도 되는 거죠?”
“....”
내 그 직설적인 물음에 백승렬 회장은 피식 웃기만 할 뿐, 가타부타 아무 대답도 내 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백 회장에게 대답을 재촉할 수 없었던, 나는 백 회장처럼 피식 웃으며 그를 빤히 쳐다만 봤다.
그랬더니 백 회장이 다시 기가 찬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말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 건, 그 만큼 준비가 됐다는 거겠지. 좋다. 내 너에게 힘을 실어주마.”
‘아니. 뭔 힘을 실어요? 나 내일 삼명 전자 안 간다니까?’
그런 내 속내를 백 회장이 파악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삼명 전자의 일도 언급했다.
“삼명 전자 발령 낸 것도 바로 취소해 주마.”
‘오예. 바로 그거지.’
“하지만 올해까지다. 내년에는 내 자리를 네가 꿰차야 해.”
“네?”
“네 형들에 대한 처분은, 네가 결정해라.”
어째 백 회장은 자기 얘기만 쭉 하고, 나는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계속 혼자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뭐 어째든 내일 삼명 전자 발령 낸 거 취소해 준다니, 다행이긴 한데 어째 백 회장이 날 보는 눈빛이 영....’
나는 불길한 느낌이 자꾸 중첩 되어 가는 거, 같아서 영 께름칙했다.
“늦었다. 그만 가 보거라.”
내가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백 회장이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는 몸을 일으켜서 곧장 백 회장의 서재를 나섰다.
그때였다. 내 뒤쪽에서 백 회장이 혼잣말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걸로 됐어. 우리 삼명그룹은 21세기에 세계로 ‘쭈욱’ 뻗어 나가는 거야.”
글로벌 삼명!
내가 이전 생에서 삼명 물산에 다닐 때, 지겹게 들었던 그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다.
그 소리를 백승렬 회장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데,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싹 돋았다.
* * *
나는 증거물을 가지고 백 회장을 나름 겁박한다고 했는데, 어째 백 회장은 정작 거기에는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한 쪽으로, 크게 나를 오해한 것 같았다.
“에이.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기 마음이니까.”
어째든 나는 내일 삼명 전자로 출근하지 않아도 됐고, 또 백 회장의 목줄을 쥐게 됐다.
그러니 앞으로 백 회장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역시 최선은 백 회장과 부자의 연을 끊어 버리는 건데....”
그 증거물로 백 회장과 다시 딜을 해야 하나 생각하며, 구기동 삼명家 본가 저택을 나와 대기 중인 내 차에 막 탔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내 핸드폰이 울려서 확인하니 백지연이었다.
“이년이 왜?”
내가 아는 한 그녀는 지금 그녀 모친, 서지현 사모님과 외가인 서재국 전 대통령의 집에 가 있었다.
그곳에 있는 그녀가 지금 나에게 전화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뭐지?”
의아해 하며 나는 백지연의 전화를 받았다.
“네. 누나.”
=야! 백준열! 너 이 새끼 아빠한테 뭔 소리를 한 거야?
전화를 받자마자, 버럭 소리부터 내지르는 백지연.
단단히 화가 난 거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화나게 할 만한 짓을 한 게 없다.
“네?”
=이 새끼 시치미 떼는 거 보소? 네가 뭘 어떻게 해서 아빠 마음을 흔들어 놓았는지 모르지만, 삼명전자 주식 순순히 도로 토해 놓는 게 좋을 거야.
이제 아주 대 놓고 협박까지 하는 백지연.
‘이 뻐꾸기 년이 진짜....’
그녀가 진짜 백승렬 회장의 딸이었다면, 나도 이렇게 열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 때문인지 이성을 잃었고, 그런 그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건, 순전히 그 어미인 서지현의 잘못이었다.
나는 그렇게 판단했고, 제 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서지현에게,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리기로 했다.
“지연씨. 당신 엄마에게 뻐꾸기가 이제 둥지를 떠날 때가 된 거 같다고 전해 줘요.”
=뭐, 뭐? 지, 지연씨? 당신 엄마? 너 이 새끼 미쳤구나!
아마 내 말이 백지연에게는 충격 그 자체 일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을 테고.
하지만 백지연의 입에서 그 말을 전해들은 서지현 사모님은, 아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 이런 거구나, 오늘에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깨닫게 될 거다.
=야. 너 이 새끼 지금 어디야. 너 오늘....
나는 백지연과 더 할 말이 없었기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자초한 사달이었다.
아마도 내가 좀 전에 던진 그 폭탄으로 인해, 평창동 서재국 전 대통령 집이 적어도 반파 정도는, 박살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 후폭풍이 엄청 날 테지만, 그로인해서 내가 삼명家와 연을 끊을 수 있다면, 그다지 나쁜 결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째 느낌이 좀 이상했다. 백승렬 회장과 담판을 지을 때도 그랬는데....
* * *
사당동 룸살롱 에로스. 사당동 일대에서는 가장 물이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게 난 이곳.
근데 오늘 그 에로스가 셔터를 내렸다. 이제 11시 조금 넘었을 뿐인데.
룸살롱의 최고 피크 시간대는,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다.
즉 이 시간에 문을 닫는다는 건, 오늘 하루 장사를 쫑 치겠다는 얘기다.
“쯧쯧. 가게 문까지 닫을 필요는 없는데....”
근처에 차를 대고, 에로스 앞에 온 양태석이 혀를 차며 말했다. 내려진 셔터 앞으로 다가간 양태석이 가게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장사 안 해요!”
그러자 안에서 누가 버럭 소리를 쳤다.
“양태석이다.”
양태석은 그냥 자기 이름을 댔다.
“양태석? 어디서 많이 들어 본....헉! 큰 형님! 야! 문 열어!”
한바탕 소란이 일고 룸살롱 문이 잠시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양태석은 에로스의 VIP룸으로 들어갔다. 진짜 장사를 안 할 모양인지 가게 안은 조용했다.
“오셨어요?”
그래도 양태석을 접대하려는 듯, 마담은 남아 있었다.
“정 마담도 그만 퇴근해.”
양태석은 여기서 술 마실 때,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다.
이유는 자기가 한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도 싫었고, 또 수하들과 대화 할 때 여자가 옆에 있으면 집중이 잘 안 됐다.
“알았어요. 술 세팅만 하고 갈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정 마담은 양태석이 여자를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양태석도 여자를 좋아했다. 단지 사랑 말고 다른 걸 원하는 여자가 싫을 뿐.
정 마담은 정말 술자리만 봐 주고 휑하니 사라졌다.
“형님!”
“어어. 어서 와.”
정 마담이 나가고 얼마 안가, 정준호가 룸으로 들어왔다.
그는 알아서 이미 상석에 앉아 있는, 양태석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받아.”
양태석이 양주잔에 양주를 가득 따라주자, 정준호가 그걸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캬아.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형님도 한 잔 받으시죠?”
정준호가 자신의 양주잔을 양태석에게 내밀며 말하자, 양태석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달리는 건 좀 있다가 하자. 그 보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그, 그게....”
정준호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양주잔에, 스스로 양주를 가득 따라서 이번에도 벌컥벌컥 순식간에 그 잔을 비웠다.
양태석은 그런 정준호를 가만히 지켜만 봤다.
정준호는 그걸 로는 양이 안 차는 듯, 두 잔 더 양주를 마시고 나서야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아아....실은 요 며칠 사이에 조직에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혹시 그게 조직이 곧 망할 거란 소문이냐?”
“어? 형님도 아십니까?”
“오늘에야 알게 됐다. 그게 소문이 아니란 것도.”
“네에?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역시나 정준호는 현재 태천파가 처한 진짜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그게 말이야....”
양태석은 며칠 내로 검경이 태천파를 향해 칼날을 휘두를 거란 걸 밝혔다.
그러자 정준호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양태석은 막상 정준호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자기와 함께 할지 정준호에게 물어야 했는데, 그럼 먼저 조직부터 배신해야 했다.
조폭이 조직과 확실하게 선을 긋는 방법은 배신뿐이니까.
양태석은 차마 자기 입으로, 정준호에게 태천파를 배신하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형님!”
그때 정준호가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고 양태석을 불렀다.
그러자 양태석도 자신이 왜 여기 왔으며, 정준호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하는 지를,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상기시켰다. 그리곤 결심 한 듯 정준호에게 말했다.
“준호야?”
“네.”
“너하고 밑에 애들....내 밑으로 와라.”
“네. 형님!”
“뭐?”
양태석은 정준호가 너무도 쉽게, 뭔 생각도 하지 않고 덥석 자신을 따르겠다고 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양태석을 보고 정준호가 되레 웃으며 말했다.
“그 말 기다린 지 10년은 더 됐습니다. 형님.”
“....”
정준호의 대답에 가슴 뭉클해진 양태석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