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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팍! 팍! 팍! 팍!
지하실을 나오자 바로 옷을 털었다.
지금 내가 걸치고 있는 옷값만도 수천만 원어치는 될 텐데, 이런 명품 옷을 입고 노가다라니.
“도련님!”
그때 최 집사가 나를 보고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하긴 먼지도 먼지지만, 얼굴이 땀범벅이니 그가 놀랄 만도 하다.
“어찌 된 일입니까?”
최 집사가 힐끗 지하실 입구를 쳐다보고, 다시 시선을 내게로 돌리며 말했다.
대체 지하실 안에서 뭔 짓거리를 한 거냐고 묻는 거다.
분명 그에게는 미국 유명 성인 잡지를 찾는다고 창고에 들어가 놓고서 말이다.
“아아. 그게 창고에 들어갔더니, 옛날 생각이 갑자기 나더라고. 10살 땐가 창고 바닥에 뭘 묻었는데, 글쎄 그게 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거야. 내가 또 궁금한 건 못 참잖아?”
“그렇지요.”
“해서 땅 좀 파 봤어.”
“그래서 찾으셨습니까?”
“아니. 땅 파다 보니 이게 또 뭔 짓인가 싶더라고. 10살 때 내가 묻어봐야 보나마나 장난감 중 하나겠지. 그래서 포기했어.”
“그럼 찾으시는 잡지는?”
“그것도 그냥 안 찾기로 했어. 요즘 넘쳐 나는 게 포르노, AV동영상인데 잡지 따위 봐서 뭐해? 뭐 또 하고 싶으면 진짜 해도 되고. 주위에 널린 게 여잔데.”
“그, 그러시군요.”
참 개새끼 백준열 다운 대답이다.
나는 그런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는, 최 집사의 시선을 슬쩍 피해서 손목시계를 봤다.
“오우. 이런 늦었다. 나도 이만 가 봐야겠어.”
그렇게 말하고 본가 저택을 나서는 데, 뒤에서 최 집사가 말했다.
“막내 도련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왜?”
내가 뒤돌아보자, 그때 최 집사가 핸드폰을 받고 있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최집사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다고 했지만, 내 귀가 그가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그의 핸드폰에서 나오는 소리까지 죄다 들었다.
‘서지현이 왜 나를 보자는 거지?’
백지연의 모친 되면서 법적으로는 내 어머니 되시는 사모님이 갑자기 날 보잔다.
“도련님. 사모님께서 잠깐 보시자고 하십니다.”
내가 잠깐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어느 새 내 가까이 다가온 최 집사가 말했다.
“사모님이? 날?”
나는 일단 그 말을 듣고 놀란 척 했다.
백준열도 유학 갔다 온 뒤로, 일 년에 많이 봐야 대 여섯 번 정도 보는 사모님이다.
그가 유학가기 전에는, 사모님도 가족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했었다.
하지만 백준열이 유학 다녀와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백승렬 회장은 사모님을 가족 식사 자리에서 빼버렸다.
그녀도 잘 됐다며 좋아했다는 데, 그 얘기를 백준열이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니, 확실한 정보라 볼 수 없었다.
뭐 어째든 최근 몇 달 사이 사모님을 보지 못했던 백준열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먼저 보자고 한 것은, 그가 유학 다녀 온 이후 처음 있는 일인지라, 나는 직접 사모님도 볼 겸, 그녀가 뭣 때문에 날 보자고 하는지, 그것도 궁금하고 해서 최 집사를 따라 나섰다.
* * *
와장창창!
“지, 지연아. 진정하렴.”
프랑스제 엔틱 장식 테이블 위 인테리어 소품들이, 널찍하니 고급스런 방안 바닥을 나뒹굴었다.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됐어?”
그런 짓을 저지른 건 바로 삼명호텔의 CEO인 백지연.
“그게 무슨 소리니? 제발 차근차근 설명을....”
“설명이고 뭐고. 이제 어쩔 거야? 아빠한테 제대로 찍혔는데 어쩔 거냐고!”
“지연아. 일단 물 한잔 마시렴.”
백지연의 모친, 서지현 여사. 삼명그룹 회장 부인되시겠다.
그런 대단한 신분의 그녀가, 지금 딸 앞에서 쩔쩔 매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갈증은 났던지 모친이 건넨 물 잔을 받아, 시원하게 들이키던 백지연.
그런 그녀가 들고 있던 잔을, 좀 전 그녀가 쓸어버린 테이블 위에 올리며 모친에게 말했다.
“큰 올케 진짜 준열이하고 붙어먹은 거 맞아요?”
“맞지. 그럼 그걸 본 사람이 몇 인데. 심지어 나도 봤다.”
“하아. 백준열. 이 개새끼. 그럼 이럴 때를 대비해서 올케가 딴 놈이랑 붙어먹는 걸 일부러 동영상 촬영해 둔 거네. 이 영악한 새끼.”
“지, 지연아. 네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엄마에게도 설명 좀 해 주겠니?”
서지현 여사의 요구에 백지연은 불과 10여분도 전에, 부친의 서재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얘기했다.
“뭐? 준열이 그녀석이 그런 식으로 그 위기를 넘겼다고?”
“그렇다니까. 역시 머리만 비상한 게 아니야. 위기 대처 능력도 엄청나. 아무래도 조심해야겠어.”
“그, 그래야겠구나. 그, 그럼 이번에도 아빠가 너에게 주식 넘겨준다는 얘기는 없었단 거네?”
“주식은 무슨. 아들 새끼들한테 다 줄 모양이던데. 엄마. 나 이러다가 호텔에서도 쫓겨나는 거 아냐?”
명색이 호텔 대푠데 보유 중인 호텔 주식이 없었다.
“그건 걱정 마. 이 엄마가 보유 중인 삼명호텔 주식 5.7%가 있으니까. 급하면 그걸 너에게 증여하도록 할게.”
“고마워 엄마. 역시 엄마 밖에 없어.”
“참. 할아버지가 너 찾으시더라.”
서지현 여사의 할아버지란 말에 백지연의 눈빛부터가 변했다.
“할아버지가? 진짜?”
항상 외갓집에 가게 되면 외할아버지가 그녀에게 꼭 선물을 주었다.
그게 선물이든 돈이든 간에 말이다. 그 일은 백지연이 어른이 되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다.
외할아버지인 서재국은 백지연을 만나면 뭘 꼭 줬다.
그게 외제차가 됐던 건물, 혹은 아파트가 됐던지 간에 말이다.
그렇다보니 백지연은 외할아버지 만날 때면 꼭 기대를 하게 됐다.
“오늘 시간 되니?”
“할아버지 보러 가는 일인데 없어도 만들어서 내야지.”
“그래. 그럼 평창동에서 같이 저녁 먹자.”
“좋아. 아아! 시간이 벌써....엄마. 나 출근해요.”
“그래. 어서 가 봐.”
그렇게 백지연을 보내고 나서, 서지현은 아침 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최 집사를 불렀다.
“어떻게 된 일이죠?”
“그게 사모님. 식사 자리에서 막내 도련님께서....”
최 집사는 서지현을 실망시키지 않고, 당시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세밀하고 정확히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랬군요. 준열이가 드디어 마각을 드러내내요.”
“네?”
“아! 별말 아니에요. 그만 가보세요.”
“네.”
“아아. 잠깐....준열이 아직 출근 안했다고 했죠?”
“네. 뭐 지하실 창고에서 뭘 좀 찾으실 게 있으시다고....”
“그럼 저 좀 보잔다고 전해 줘요.”
“지금 막내 도련님을 보시겠다고요?”
“뭐 어때요? 녀석도 법적으로 엄연히 내 아들인데.”
“알겠습니다. 막내 도련님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아. 혹시 모르니까 준열이 만나면, 그때 저한테 전화 줘요. 갑자기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삼명그룹 회장 부인 노릇도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특히 서지현 같은 경우는 시아버지의 갤러리와 문화사업을 같이 병행하고 있어서, 사실 엄청 바빴다.
좀 전 서지현의 말처럼 갑자기 급한 일이 터지면, 백준열을 만나지도 못하고 저택을 나서야 할지도 몰랐다.
그걸 잘 알기에 최 집사가 바로 수긍하며 대답했다.
“네. 막내 도련님 만나면 일단 붙잡아 놓고 사모님께 전화부터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이제 정말 가보세요.”
그렇게 최 집사를 자기 방에서 내 보낸 서지현 여사.
그녀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고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야. 사람 좀 있지? 어. 이 집 막내 말인데. 아무래도 손을 좀 써야 할 거 같아. 보통내기가 아냐. 어. 알았어. 그럼 이따 평창동에서 봐.”
그렇게 통화를 끝낸 서지현 여사. 그녀는 곧 사용인들과 전문 코디네이터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헤어 스타일리스트를 불러서 치장을 시작했다.
삼명그룹 회장 부인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변신 시도는 30분 넘게 계속 이어졌다.
* * *
“다 끝났습니다.”
“너무 예쁘세요.”
“오늘 패션의 완성은....이 브로치겠네요.”
치장이 끝나고 전신 거울 앞에 선 서지현은, 오늘 자신을 전반적으로 연출해 낸 코디네이터에게, 특히 액세서리로 브로치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자아. 그럼 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되지?”
서지현이 자신의 비서에게 스케줄에 대해 묻자, 주위 사용인들과 전문 코디네이터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각자 자신이 가져 온 옷가지와 구두, 액세서리와 도구등을 챙겨서 그녀 방을 빠져 나갔다.
그렇게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사람들로 북적댔던 서지현의 방안에, 비서와 그녀 단둘만 남겨졌다.
“오늘 오전 일정은 잠시 뒤, 10시에 송암 갤러리 관장님과 미팅을 시작으로....”
“그 송암 갤러리 관장과의 약속 시간을 10분만 뒤로 미뤄.”
“네. 알겠습니다.”
삼명그룹 회장 부인이 고작 10분 늦는다고 감히 뭐라고 할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되겠나?
아마 그 정도 시간은 다들 사모님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용납해 줄 것이다.
때문에 비서는 굳이 이 사실을, 송암 갤러리 측에 알리지도 않은 채, 서지현의 다음 스케줄을 얘기했다.
“11시10분에 한성대학장학재단을 방문하실 예정이시며, 12시에 한성대학 총장과 점심 약속이....”
그때 서지현의 개인 핸드폰이 울렸다.
힐긋 자기 핸드폰을 보고, 누구 전화인지 확인한 서지현. 그녀가 그 전화를 바로 받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전화처럼.
“저예요. 네. 지금 바로 데려 오세요. 네.”
그렇게 간단히 통화를 끝낸 서지현이 자기 비서를 보고 말했다.
“안 비서. 나 10분만 쓸게.”
갤러리 관장과 문화재단 이사장으로써가 아닌, 개인 서지현으로 10분의 시간을 요구한 것이다.
“네. 사모님.”
비서는 바로 자리를 떴고, 잠시 뒤 그 자리에 최 집사와 삼명가의 막내아들로 잘 알려져 있는 백준열이 나란히 섰다.
“그럼 두 분 얘기 나누십시오.”
알아서 최 집사가 자리를 피해주자, 서지현이 백준열에게 말했다.
“앉으렴.”
“네. 사모님.”
“너희는 언제나 나를 사모님으로 부르는구나?”
서지현은 백준열이 딱딱하게 자신을 사모님으로 부르는 게 영 마뜩찮았다.
하지만 또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어릴 때 그녀가 자기 입으로 그랬었다.
앞으로 자신을 사모님으로 부르라고 말이다.
물론 아버지가 있을 때는 어머니라고 부르고.
* * *
어릴 적 백준열은 사실 철이 없어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랐다.
특히 성격이 지랄 맞은 사모님은, 아버지하고 있을 때는 자기보고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었다.
하지만 큰형과 둘째 형이 계속 사모님을 사모님으로 부르는 걸 보고, 그 역시 사모님이라 그냥 계속 불렀다.
처음엔 그것 때문에 화도 내곤 했던 사모님이, 어느 순간 그가 뭐로 부르든 별 상관하지 않자, 그때부터 백준열은 쭈욱 그녀를 사모님으로 불러왔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내가 자신을 사모님으로 부른다고 칭얼대다니.
‘별 미친 년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가 눈앞의 서지현에 대해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 건, 그녀가 백지연에게 내가 형수와 붙어먹은 걸 알려 줬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지연이 그 일을 어떻게 알았겠나?
“저 빨리 출근해야 합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만 하시죠?”
“그래. 나도 10분밖에 시간 없다.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마. 너 제법 뻔뻔하더구나? 첫째랑 놀아먹은 게, 네가 아니라고?”
이쯤이면 막가자는 얘기다. 그렇다면 막가 주지 뭐.
“그 말씀 하신 첫째랑 놀아먹은 남자가 어디 한 둘이어야죠.”
“흥! 그런다고 진실이 숨겨질 거 같으냐?”
“글쎄요. 밝혀질 진실이, 어디 하나 둘이어야 말이죠.”
“뭐? 너 그게 무슨 소리냐?”
나의 의미심장한 말의 의미를 그래도 서지현은 눈치를 챈 모양이다.
“작년인가? 지연이 누나 머리카락이 소파에 있기에, 그걸 챙겨서 아버지 머리카락이랑 유전자 감식을....”
“닥쳐! 네가 뭔데 감히 지연이 머리카락을 챙겨?”
삼명그룹 회장 부인답다고 해야 하나?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를 향해 불호령을 내리는 서지현의 모습은 확실히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러게. 왜 칠칠맞게 소파에 머리카락을 흘리고 다녔을까요? 그 지연씨가.”
내 입에서 더 이상 지연이 누나가 아닌, 지연씨란 말이 나오자 서지현은 역시나 내 그 말뜻을 알아듣고 바르르 치를 떨었다.
바로 백지연이 백승렬 회장의 딸이 아니란 거 말이다. 서지현은 당장 나를 잡아 죽일 거 같이 살벌한 얼굴로 나를 쏘아봤다.
아마 눈빛으로 나를 죽일 수 있었으면 바로 죽였지 않을까 싶다.
뭐 그런다고 그녀 말대로 진실이 사라지거나 완전히 숨겨질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그, 그이가 말해 준거지?”
“무슨 말씀을.... 가만. 그렇다면 이 사실을 아버지도 알고 있단 거네. 와아. 아버지도 참 대단하시네. 자기 딸도 아닌 년을, 아아. 이런 죄송....여자를 여태 딸로 키우다니. 대체 이 말을 누가 믿을까요? 저희 아버지 성정에 말입니다.”
“닥쳐! 너 그 입 함부로 놀리면 죽. 는. 다.”
서지현이 표독스런 얼굴로 앙칼지게 죽는다는 말을 딱딱 끊어서 외쳤다.
근데 그 소리를 듣고 보니, 내 머리가 괜히 삐딱선을 타면서 순간 빡 쳤다.
“이 C발년이 진짜....사모님, 사모님 해주니까....삼명家 핏줄이 너한테는 우습지?”
그래서 그냥 내 입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불대도 그냥 내버려둬 버렸다.
그랬더니 서지현이 기겁해서는 미친 개 또라이 쳐다보듯 날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