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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추억의 향기’는 그냥 생각해 보면, 별 쓸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추억은 지나온 과거고, 그 과거의 냄새가 내게 줄 수 있는 건, 그저 추상적인 생각일 뿐 내게 별 도울 될 건 없으니까.
하지만 그 추억의 주인공이 바로 견신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카네기만 하더라도, 당시 미국에서 제일 부자였던 사람이다.
만약 그처럼 대단한 사람들과 견신이 알고 지내 온 거라면, 그 유형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 추억의 향기가 떠오를 것이고, 그 냄새가 나는 사람은 내가 특별한 존재로 분류해,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분명 좋은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눈앞에 떡볶이 국물에다가, 돼지허파를 찍어 먹고 있는 저년처럼 말이다.
벌써 떡볶이 5인분에 순대 3인분, 김밥 2줄을 혼자서 다 처먹고 있다.
돼지 같은 년. 별명이 하나 더 늘었다.
저런 년에게서 카네기의 추억 향기가 나다니....
뭐 어째든 잘 꼬드겨서 그녀에게 어떤 대단한 뒷배경이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일단 그녀가 하고 다니는 꼴을 봐서, 당장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부자들 중에서도 수수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은 꽤 많다.
하지만 부자들은 싼 게 비지떡이란 걸 잘 안다.
그러니까 좋은 거 하나 사서, 오래 쓰는 게 더 남는 거다 이 말이다.
명품이 달리 명품이 아닌 게, 그만큼 퀄리티가 좋았다.
해서 부자들도 티 안 나게 명품을 많이 하고 다닌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에이미는 순 거지같은 년이다.
몸에 걸친 것 중에 명품은 하나도 없다.
‘이상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미에게서는, 향긋하고 달달한 돈 냄새와 부자 냄새가 계속 나고 있었다.
“아줌마! 여기 라면 하나 추가요.”
배에 거지가 들어 있나? 또 시키는 에이미를 보며 내가 부들부들 눈썹을 떨 때였다.
“에이미!”
“어? 준열 오빠!”
에이미의 단골 분식집으로 그녀를 알고, 나도 아는 듯 한 여공시생 두 명이 나타났다.
그 두 여공시생들은 각기 에이미와 내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오빠 오랜만!”
내 옆에 앉은 살짝 귀여운 여공시생이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어어. 그래.”
나를 보고 그 애가 오빠라니 당연히 말은 놨다.
하지만 아직 기억이 나지 않다 보니, 아무래도 그 여공시생을 대하는 게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치잇! 오빠. 나 그 새 까먹었지?”
“어?”
“내 이름이 뭐야?”
“그, 그게....보경?”
“어! 아네.”
내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자, 내 옆 여공시생이 엄청 좋아 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근데 어떻게 안 거지?
그때 보경이란 여공시생과 백준열 사이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젠장....’
작년 연말이었나?
지금처럼 주말에 백준열은 보경이와, 윤정인가 하는 애랑 같이 술을 마셨다.
건물주 오빠한테 술 한 잔 얻어먹겠다니 사줘야지.
그러다 2차로 그의 집에 가기로 했고.
근데 윤정이는 괜찮은 데, 보경이는 별로 집에까지 데려가서 따먹고 싶지는 않았다 .
그래서 윤정이를 먼저 집에 들여보내 놓고, 보경이는 계단에서 대충 따먹고 자기 원룸으로 돌려보내 버렸다.
그때 계단에서 뒤치기를 했는데, 백준열은 보경이의 보지에 자기 좆기둥, 즉 기둥 경莖을 박는다며 그녀 이름가지고 낄낄 댔었다.
아마 그때 그 기억이 하도 강렬해서, 백준열이 보경이란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그녀가 자기 이름을 묻자, 부지불식간에 내 입에서 그녀 이름이 튀어 나온 거다.
이 사실을 보경이가 알면 나를 뭐로 생각할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 *
보경이가 이번에 데리고 나타난 여공시생은 이지숙이란 여자였다.
한영대 회계과 출신이란 이 여자는, 공인회계사를 준비 중이었다.
한데 걸치고 있는 것 중에 명품이 제법 많았다.
그녀도 나와 마주쳤을 때부터 시작해서 빠르게 나를 훑었다.
뭐 나야 몸에 걸치고 있는 거 하나부터 열까지 다 명품이지.
명품 중에서도 급이 있는데, 백준열은 뭐든 최상급만 선호했다.
“지숙아. 우리 건물주 오빠 어때? 잘생겼지?”
보경이가 그 말을 하면서 은근 내게 몸을 접근해 오며 스킨십을 시도 하려 들었다.
‘어허! 요즘이 어떤 시댄데. 한 빠구리 했다고 친한 척 굴고 이러나? 쿨하지 못하게.’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뻔했는데 겨우 참았다.
그때 이지숙이란 여공시생의 대답이 가관이다.
“뭐 잘 생기긴 했네. 홍대 나가면 자주 보는 얼굴 상이긴 하지만.”
‘뭐시라? 호오옹대에?’
그 말은 내가 성형했단 거잖아?
물론 살짝 손을 대기는 했다.
보다 완벽한 얼굴을 위해서.
하지만 얼굴에 칼을 댄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이렇게 흥분하는 건, 백준열의 몸이 이지숙이란 여공시생의 발언에 그만큼 격분했기 때문이다.
평소 백준열은 이런 싸가지 없는 년은, 차에서 따먹고 아무데나 버리고 가버렸다.
실제 이태원 거리에서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 년, 결국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고 있다.
“그래? 나는 홍대에서 이런 얼굴 본 적이 없는데?”
‘이년아. 얼굴 뚫어지겠다. 그만 쳐다 봐.’
내게서 도통 시선을 떼지 않는 보경이.
그 사이 이지숙은 되지도 않는 영어로, 열심히 옆에 에이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러던 말든 새로 시킨 라면 먹기 바쁜 에이미.
“후루룹....쩝쩝쩝....”
그러다 너무도 말도 안 되는 영어를 지껄이는 이지숙에 짜증이 치민 듯 에이미가 말했다.
“야 이씨.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그 입 좀 닥쳐!”
너무도 정확한 에이미의 한국말에, 이지숙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런 그녀를 보고 보경이 깔깔 거리며 말했다.
“거 봐. 에이미 한국말 진짜 잘한다니까.”
그 사이 이지숙이 잠잠해진 틈을 타서, 에이미는 라면 삼매경에 빠졌고, 라면 국물에다가 순대를 넣어 말아먹는, 미식계의 대참사를 저질렀다.
“오빠. 나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도 돼?”
그때 내 옆에 보경이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나는 순간 그 코를 잡아 비틀어 버리고 싶었지만 또또 참았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던데, 오늘 제대로 인내심을 시험 받는 거 같다.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먹어.”
“와아! 역시 건물주 오빠.”
보경은 틈만 나면 내가 건물주란 걸 강조한다.
그 소리 듣는 걸 내가 좋아할지 말지는, 애초 관심도 없는 애다.
그래선지 보경에게서는 쉰내가 풀풀 났다.
견신 시스템의 정보에 따르면, 그게 허영심이 강하고 이기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란다.
왜 여자는 예쁘면 다 용서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애는 안 예쁘니 용서가 안 된다.
‘빨리 처먹고 가라.’
이지숙이란 여공시생도 식사를 끝낸 에이미와 내가, 딱 들어도 수준 높은 프리토킹으로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분식점을 나가 버렸다.
‘저년 저거 손 좀 봐 줘야 되는데....’
백준열이었으면 못 가게 잡았을 거다.
그리곤 차에서 한 번 따 먹고, 서울 시내 번화가 중 한 곳에 처참하게 버렸겠지.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이년아.
* * *
“준열. 정말 그거 먹고 돼?”
이제 와서 내 걱정을 해 주는 에이미.
자기 처먹을 때 나는 신경도 쓰지 않더니 말이다.
나는 순한 맛 떡볶이 1인분만 먹었다.
처음엔 나도 매운 맛 떡볶이를 시켰다.
매운 게 당겼으니까. 하지만 먹어보니 죽을 맛이었다.
내가 먹고 싶다고 이 몸이 그걸 다 받아 주는 건 아니었던 거다.
해서 순한 맛 떡볶이를 시켜 먹어보니 그건 좀 먹을 만 했다.
그 이외 분식점에서 내가 먹고 싶은 게 딱히 없었던 터라, 나는 그것만 먹었는데 그게 에이미는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하긴 덩치는 내가 에이미보다 훨씬 큰데, 먹는 건 그녀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으니 말이다.
“딴 거 더 먹어.”
“여기서는 별로 먹고 싶은 게 없네. 너라면 또 몰라도.”
나는 농담 삼아 살짝 야한 농담을 에이미에게 했다.
“너라면? 그게 무슨 라면이야? 맛있어?”
역시 그녀가 한국말을 잘한다고 해도, 이정도 농담까지 이해하진 못했다.
“그래. 죽여주지. 백마 타는 건데 말이야.”
“백마? White Horse?”
그때 여전히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보경이.
“오빠. 지금 에이미랑 떡치고 싶단 거예요?”
그 말을 하면서 두 눈에 쌍심지는 켜는 보경이.
“하아. 너 아직도 안 갔냐?”
“네?”
“이제 좀 가라. 작작 좀 먹고.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내가 그녀를 보는 무심한 눈에서 보경도 깨달은 모양이다.
너 같은 건 관심 1도 없다는 걸.
“너무 해!”
뭐가 너무한지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휑하니 분식점을 나가 버리는 보경이.
그러게 아까 네 친구 이지숙이 나갈 때 따라 나갔어야지.
뭐 좋은 꼴 볼 게 있다고 남아서는....
문제는 보경의 말을 듣고 난 에이미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채, 날 똑바로 쏘아보면서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준열. 진짜 나 따먹고 싶어?”
“뭐?”
어디서 따 먹는다는 저속한 말을 배웠는지 모르지만, 에이미가 그런 말까지 안다는 사실에 내가 좀 놀란 건 사실이다.
“백마 타고 싶다며? 그 백마가 나 아냐?”
얘가 좀 오버를 하네.
나는 몰라도 백준열은 백마를 여럿 타 봤다.
눈앞의 에이미처럼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백마도 그 중에 여럿 있었고.
그 덕분인지 몰라도 에이미의 도발에도, 내 몸만큼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몸과는 달랐다.
“맞아. 백마가 널 말한 거고 너 따먹고 싶어.”
“....”
내가 이렇게 솔직하고 대담하게 대답할 줄 몰랐던 것일까?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한 에이미가,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내 속내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에이미 앞에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더는 여기에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준열이야 그 동안 여기서 평범한 사람 코스프레를 즐겨왔는지 모르지만, 내가 빙의 전에 그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굳이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단 얘기다.
해서 내일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곳 원룸 건물을 처분해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앞으로 다시 볼 일도 없는, 에이미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백준열은 에이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미국에서 에이미 같은 백마와 여럿 떡을 쳐 봤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 백마와도 빠구리 해 보고 싶은 게, 진심으로 솔직한 내 마음이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갑자기 내게서 슬슬 시선을 피하며 에이미가 말했다.
“사실 나도 준열이 좋아.”
“에?”
이건 아니지. 여기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 미친년아!
아무래도 에이미 저년은 제정신이 아니다. 정신 병원에 보내야...
하지만 더 충격적인 말을 에이미가 내뱉었다.
“한국에서 준열 만큼 많이 맛있는 거 많이 사준 남자 없다. 준열도 나를 좋아하니까 그런 건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이제 준열이 나를 따먹고 싶다니 나도 좋다. 준열과 떡치고 싶다.”
“떡? 떠억? 하아! 니미럴....좆도....”
이건 진짜 아니지. 그러니까 내가 자기 맛있는 거 많이 사줘서 좋다는 거 아닌가?
그리고 제 멋대로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거고.
에이미는 내 말에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그녀를 따먹고 싶다는 건, 백마인 그녀 몸만 원한다는 얘기다.
에이미 그녀와 그 어떤 정서적인 교감도 나누고 쌓고 싶지 않다.
하지만 에이미는 지금 나와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에이미와 떡치는 것에 절대 합의를....
“우리 이제 준열 집에 가는 거야?”
“뭐? 집?”
“내 원룸 너무 좁다. 준열 집 넓으니 거기서 준열과 사랑 나누고 싶다.”
그 말을 하면서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에이미.
당최 저년은 이해가 안 된다.
무슨 럭비공 같달 까? 어디로 튈지도 모를 저년 때문에 이미 뒷골이 당기고, 머리 양쪽이 지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 박칠석이었다.
순간 2인자 구재성이 떠올랐다.
지금 박칠석이 내게 전화를 해 온 건, 이미 그쪽 상황정리가 끝났다는 얘기.
구재성은 살았을까? 그게 궁금했지만 그런 거 까지 물어 보는 건, 박칠석에게 결례 되는 짓이다.
나는 박칠석의 전화를 받았고, 그에게 좋게 얘기했다.
어째든 박칠석은 내가 영입한 1호 충견이자, 내 일족인 최초의 견족 인간이다. 그 만한 대우를 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서울 오면 보자고 하고 끊었는데, 에이미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툭하니 말했다.
“준열. 나 급해. 빨리 가자. 집으로.”
“으음....”
잠깐 고민이 됐다. 하지만 백준열의 기억에서 말고, 내가 언제 진짜 백마를 타 보겠나?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이다.
“그래. 가자.”
백마를 탄다는 생각에 벌써 흥분이 된다.
분식점 계산을 하는데 주인아줌마가 아주 대견해 하며 에이미를 쳐다본다.
하긴 오늘 매상의 숨은 공신인데 얼마나 예뻐 보일까?
“이거 마셔.”
서비스로 캔 사이다를 건네는 분식점 주인아줌마.
내가 손을 내밀자 슥 피하더니, 에이미 손에 꼭 쥐어준다.
‘허얼! 계산은 내가 하는 데 왜....’
내가 흘겨보는 데도 참 일관성 있게 에이미 챙기는 주인아줌마.
저러니 에이미가 여길 단골로 삼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