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5화 (254/259)

불길함의 정체가 이것이었나보다.

"후........드디어 올 것이 왔군."

결국….

앨버트 녀석이 복귀했다.

녀석 때문에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이 났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나는 소파에서 떨어지지 않는 몸을 일으켰다.

느릿하게 저택 정원으로 나가보니 꼬질꼬질한 두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에일린이 환한 표정으로 무사히 돌아온 그들 곁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녀석들의 얼굴에는 뿌듯함.

그리고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나를 발견한 앨버트와 찰스가 깜짝 놀라며 서둘러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 내 앞에서 오른쪽 무릎을 꿇으며 주먹을 바닥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 다녀왔습니다!"

어디서 본건 있어서….

쓸데없는 똥폼을 잡는다.

앨버트 녀석은 품속에 소중하게 간직해온 듯한 가죽 주머니를 조심히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염력으로 들어 올려 그 안을 슬쩍 살펴봤다. 

최하급 정령석이다.

대충 10개는 넘어 보였다.

나는 그것을 인벤토리로 넣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녀석들을 보니….

기대감에 찬 두 쌍의 시선이 내게 꽂혀있다.

"제자 시험은.......합격이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찰스는 보기 흉하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오러를 각성했구나…."

재능이 지지리도 없는 찰스 놈마저도 간신히 오러를 각성한 모양새다.

녀석들은 모르겠지만 공격 대원에 속해있는 이상 몬스터를 잡기만 하면 경험치...즉, 마력이 축적된다.

한계까지 축적된 마력은 결국 각성으로 이어진다.

이보다 쉬운 강해지는 수단은 없었다.

게다가 그럭저럭 좋은 오러 단련서도 줬다.

그런데도 안 되면 재능을 떠나 그냥 게으른 거였다.

녀석들은 공격대 파티에 속해있는 것만으로 노력만 한다면 재능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는 알까.

"예! 스승님! 스승님, 덕분입니다."

앨버트가 내가 오러 각성을 알아줬다는 것에 감격한 듯 목소리가 떨린다.

'그래...그 정도 염치라도 있어야지….'

"....수고했다. 오늘은 이만 쉬거라....그리고 내일은 해 질 무렵 이곳으로 다시 나오거라."

"예? 예, 알겠습니다."

앨버트는 내 뜬금없는 지시에 의문을 가진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스승의 말이라고 일단 대답하고 본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라. 별일 아니다. 수고했으니...내일 저녁 식사나 함께하자꾸나."

"네!! 감사합니다! 스승님!"

지금은 백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할 때였다.

시험 통과의 감격에 젖은 제자들을 뒤로한 채 저택으로 들어가자, 뾰롱하고 릴리아나가 나타나더니 내게 다짜고짜 묻는다.

"무슨 꿍꿍이냐."

"무슨 꿍꿍이냐니…."

"네가 앨버트 녀석들에게 한 이상행동을 말하는 거다."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었다.

그리고 눈치가 빨랐다.

"또 훔쳐보고 있었나?"

"또...라니...무, 무슨 소리냐?!"

내 말에 릴리아나가 화들짝 놀란다.

"무슨 소린지 알 텐데…."

그녀에게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음흉한 시선을 보냈다.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얼굴을 붉힌 릴리아나는 부끄러운지 본전도 못 찾고 얼버무리며 그대로 사라졌다.

다음날.

해가 저물며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때가 됐다.

전날 지시한 대로 정원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앨버트와 찰스의 모습이 보였다.

씻었는지 어제보단 조금은 더 깔끔한 모습이었다.

"그래 잘 쉬었느냐."

"네! 스승님! 푹 쉬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모습이다.

푸석했던 피부가 윤기를 조금 되찾은 듯도 보였다.

-따각. 따각.

마리가 마차를 끌고 왔다.

나는 너그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자, 오늘은 그동안 미궁에서 수고한 너희들을 위해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생각이다. 오늘만큼은 헝그리정신은 잊어도 된다. 마음껏 즐기도록."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거 같았지만 참았다.

천 보 전진을 향한 일 보 후퇴다.

"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둘 다 잔뜩 기대하며 마차에 올랐다.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알약 하나만 먹으면서 살아왔다. 앨버트 녀석은 좀 더 될 거다.

녀석들은 맛이 있는 음식을 먹는단 기대감에 얼굴이 들떠있었다.

마차는 화려한 가게 앞에 섰다.

"여, 여긴…."

누가 봐도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물이었다.

유려한 글씨체로 '플라리티'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촌뜨기 삼류 모험가였던 녀석들은 한 번도 와보지 못했을 그런 곳이었다.

앞에 깔끔한 정장을 입은 종업원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약은 이미 한 상태였다.

아니 이미 통째로 빌려놨다.

이 모지리 제자 놈들은 이런 스승의 고생을 모를 거다.

녀석들은 촌뜨기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나를 따른다.

바깥보다 안쪽은 더 화려했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복층으로 된 고풍스러운 살롱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가슴이 깊게 파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육감적인 중년의 여자가 나타났다.

이곳의 마담, 줄리아다.

마담은 한때 한 미모를 뽐냈을 법한 얼굴이었다.

"운호 님, 어서 오세요.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담은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드레스에 감싸인 그녀의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모습을 본 앨버트와 찰스는 눈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눈동자가 헤엄을 친다.

그런 녀석들의 보고는 마담이 미소를 짓는다.

"자리는 마련해 놨어요. 안내할 테니 저를 따라오세요."

눈웃음을 친 그녀는 그 커다란 엉덩이를 실룩이며 우리를 안내했다.

마담이 우릴 안내한 곳은 크고 화려한 룸이었다.

내가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자 녀석들은 촌뜨기처럼 쭈뼛거리면서 나를 따라 앉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쁜 여직원들이 화려한 음식들을 날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가슴이 깊게 팬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셋이 들어와 우리 옆에 각자 하나씩 앉았다.

촌뜨기 제자 둘은 분내 나는 여자가 옆에 안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놈들이 한 번도 여자와 관계해본 적이 없는 모쏠이라는 사실을.

오늘 일은 잘 풀리겠군.

"꿀꺽....스, 스승님 여기는…."

찰스의 떨리는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허허. 괜찮다. 너무 쌓아두기만 하면 터지는 법. 미궁에서 고생한 너희들에게 제자합격 축하 겸, 오늘 하루만 너희에게 일탈을 허락하마."

옆에 앉아있던 여자들이 음식 시중을 든다.

"이거 한번 맛보세요."

"제, 제가 먹을 수 이, 있습니다."

뻣뻣하니 굳은 앨버트가 딱딱하게 말했다.

"사내가 돼서 뭘 부끄러워하는 거냐. 쩝쩝."

넙죽넙죽 잘만 받아먹는 내 모습을 본 앨버트와 찰스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 그럼, 저도…."

녀석들이 옆의 미녀가 넣어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앨버트와 찰스는 오랜만에 맛보는 고급 음식에 정신이 혼미한 표정을 지었다.

별맛도 없는 릴리아나의 알약만 먹고 지냈으니 이해는 했다.

"자, 술도 마시거라. 오늘이 아니면 언제 맛볼지 모르니....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내 제자로 있는 이상 최후의 만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스승님."

내 말에 본격적인 식사를 이어 나갔다.

녀석들은 맛있는 음식과 술, 미녀 삼단 콤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들이 적당히 취기가 올랐을 때 말했다.

"나는 이만 자리를 비켜주도록 하지."

"예? 스, 스승님?"

"허허....오늘만은 너희들이 풀어지더라도 너그럽게 봐주마...내일까지 천천히 놀다 돌아오거라."

"꿀꺽....내, 내일까지…."

내가 말의 숨은 뜻을 깨달은 찰스가 마른침을 삼킨다.

"앨버트 님~ 운호 님도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옆에 있던 여자들이 애교를 부리며 그들에게 안긴다.

"자, 잠깐..거기는…."

"아유, 귀여워라...혹시..처음?"

"아, 아닙니다!"

녀석...꼴에 자존심은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미녀들은 다 알고 있을 거다.

두 녀석이 다 ADA라는 사실을.

안겨 오는 미녀들에 찰스와 앨버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게 술 때문만은 아니리라.

나는 여자들에게 정신 차리지 못하는 녀석들을 내버려 두고 나는 룸을 나섰다.

내가 룸에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마담이 고개를 숙인다.

"내가 지시한 대로 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운호 님."

나는 마담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술집에서 나와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으로 귀가하자 에일린이 마중을 나왔다.

"스승님, 오셨어요."

나를 마중 나왔다기보다 그녀의 눈이 여기저기 움직이는 게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거 같았다.

앨버트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녀석들과는 식사하고 헤어졌다. 내가 있으면 편하게 못 놀 거 같아서 자리를 비켜줬지. 녀석들은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왔다. 오늘은 마음껏 놀라고 자유시간을 줬지. 보니까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더 놀 거 같더구나."

"아....네…."

내 말을 들은 에일린은 조금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공격대원 위치 감지를 활성화해 줄 테니 찾아가 보겠느냐?"

"예? 예!!"

에일린은 이내 얼굴을 환하게 하고 앨버트와 찰스를 찾으러 나섰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

*

*

에일린은 시각에 떠오르는 화살표 방향을 따라 앨버트를 찾아 나섰다.

'역시 그곳일까?'

스승님의 제자가 되기 전.

앨버트와 모험가 일을 하던 시절. 

자주 가서 마시던 술집이 있었다.

한때 그곳에서 파티 동료들과 종종 즐겁게 술을 마시곤 했다.

술은 잘 마시진 못하지만, 파티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오늘은 용기를 좀 내볼까...앨버트와 진전이 있으면 좋겠는데….'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꽤 어필을 한다고는 했는데 앨버트의 둔감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오늘은 취한 척 잠을 자볼까. 그건 전에도 해봤는데….'

취해 잠든척한 자신을 앨버트가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렸을 때는 심장이 터질 거 같았지만...놀랍게도 그냥 침대에 옮겨 이불을 덮어주고 그냥 그대로 나갔다.

'하아.....좀더 적극적으로 해야 하나?'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거리를 걷던 에일린은 발걸음을 멈췄다.

'여, 여긴….'

해가 저문 어두운 저녁임에도 화려한 마법등의 불빛으로 거리가 환했다.

환락가.

격이 다른 등급이 높은 모험가들이 찾는 비싼 술집이나 도박장들이 늘어선 거리다.

에일린은 이런 거리가 있다는 것이야 알았지만 들어가 보진 않았다. 삼류 모험가였던 시절엔 오고 싶어도 올 형편이 안 됐다.

그런데 시야에 보이는 반투명한 화살표가 환락가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앨버트와 찰스 아저씨의 자금 사정은 알고 있다.

이런 곳에 올 정도로 돈이 많지 않다.

그러나 스승님은 부자다.

얼마나 재산이 많이 있는지 물어보진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슬러버에서 가장 비싼 호텔에서 지냈던 것이나, 터무니없는 마법 마차를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스승님과 함께 미궁 10층을 탐사하고 나왔을 때도 그렇다.

고생했다고 그동안 모험가 생활을 하며 번 것보다 더 많은 금화를 아무렇지 않게 쥐여줘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러니 앨버트와 찰스 아저씨에게도 금화를 넉넉하게 챙겨줬을지도 모른다.

에일린은 앨버트의 위치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쭈뼛거리며 환락가를 걸었다.

그리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건물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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