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덮고 있던 하얀 시트가 흘러내리며 몸뚱이만 남은 흉한 몰골의 나신이 드러났다.
후안은 설마설마하던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파, 파블로! 그, 그만둬!! "
"수많은 남자에 올라탔던 개가 이제 주인인 당신마저 정복하는군요!!"
파블로는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하, 하지 마!!"
"후안 님....벌써 겁을 먹은 겁니까? 언제나 당당하던 당신의 모습은 어디 갔습니까. 녀석은 애피타이저에 불과합니다. 아직 당신에게 시험해 볼 게 많이 남았습니다."
"마, 맞다. 너 여동생이 있었지. 난 네 여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이, 이러면 네 여동생이 무사할 거라 생각하나?"
위기를 느낀 후안의 두뇌가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조직에 들어온 이들은 소중한 이를 볼모로 잡힌다.
그들은 비밀리에 관리되고 그 장소는 극소수 간부만이 알고 있다.
"제 여동생이요? 당신이 강간해 목을 졸라 죽인 여동생이요? 그것까지는 기억을 못 하신 모양입니다."
"......."
후안은 말문이 막혔다.
공포에 질린 후안 라즈카의 뒤로 커다란 로트와일러가 천천히 다가간다.
발정제라도 먹였는지 놈의 성기는 빳빳하게 서 있었다.
"후안 님. 혹시 압니까? 이걸로 새로운 성벽에 눈을 뜨실지."
"아, 안돼!!!"
밀실엔 거친 개의 숨소리와 후안 라즈카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후안 라즈카는 실종됐다.
누가 죽인 건지 아니면 구해준 건지는 알 수 없다.
알아볼까 잠깐 생각도 해봤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이 아니다.
놈은 각성 능력을 잃었다.
그것만 잃은 것도 아니다.
팔다리도 잃었다.
엄청난 덕을 쌓아 도와줄 인간이 많은 영웅도 아니다.
과연 그를 도와줄 인간이 있을까?
도와준다고 해도 재기의 가능성은 없다.
후안 라즈카라는 절대자가 사라지자 남아메리카는 혼돈 그 자체로 변했다.
놈의 부하였던 빌런들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피의 전쟁이 시작됐다.
말 그대로 남미판 춘추전국시대.
그중에도 파블로라는 마법사가 꽤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나야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었지만….
너튜브라던가.
언론에서 하도 떠들어대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김경숙은 남편과 아들에게 납치되었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도.
유나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 몰래 제주도로 내려왔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남편인 이만수에게 나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단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야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제주도로 김경숙의 남편 이만수와 아들 이진우가 찾아왔다.
애까지 밴 김경숙이 순간 실종됐었으니 직접 봐야 안심이 된다나 뭐라나.
이진우 녀석과는 첫 대면이었다.
유나와는 어색한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의외인 건 녀석이 각성했음에도 오러든 마법이든 아무것도 익히고 있지 않다는 거다.
개나 소나 다 익히고 있는 비전 아닌 비전을 익히지 않다니 무슨 똥고집인지.
당연히 돈이 없어서는 아닐 거다.
왜 그런지 대충 예상은 갔다.
아마도 유나 때문인 거 같았다.
녀석은 감히 유나를 좋아했다.
그리고 유나는 내 여자가 됐다.
유나의 남자인 내 비전을 익히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게 아닐까.
괜한 자존심 세워봐야 자기만 손해다.
그리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경숙이는 한동안 제주도에서 지내기로 했다.
돈만 있으면 산부인과 의사를 데려오는 거야 큰 문제도 아니었다.
명목상으로는 유나와 함께 지내고 싶다는 거였다.
유나도 있고 최고의 의료진을 두고 케어를 해주기로 했기에 이만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했다.
물론, 이만수의 내연녀인 오주연을 마음껏 만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지 않았을까?
이진우는 자신의 엄마가 이곳에서 지낸다고 하니 껄끄러워하는 기색이었지만......유나와의 사건으로 상당히 입지가 쪼그라든 녀석에게 발언권은 없었다.
"운호 님은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하지만 제 딸의 애인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전 당신이 여자가 많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만수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여자가 많다는 것은 내게 관심이 좀 있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자기 딸이 여러 애인 중 한 명이라면 그 어떤 아버지라도 좋아할 수가 없는 일이다.
"유나가 제 친딸은 아니지만 소중한 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전 유나가 당신과 헤어지길 바라지만......그래도 유나는 당신이 좋다는군요."
내가 유나를 보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이만수는 이미 유나와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당신이 유나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한다면....저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만수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게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다.
하지만 내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칭찬해 줄 만했다.
물론, 내가 특별하게 기세를 일으키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체구에서 오는 압박감을 무시할 수는 없을 거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건가?
다른 놈이었다면 귓방망이 날아갔겠지만.
이만수이기에 이런 건방진 발언도 너그럽게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는 내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닐까….
"걱정하지 마라. 유나도 경....크흠....네 부인도 내가 잘 보살펴주지."
"부탁드립니다."
이만수는 정중히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성의를 봐서라도 두 모녀를 잘 보살펴줄 생각이었다.
*
*
*
<판테라로 로그인하시겠습니까?>
판테라에 진입했다.
떠났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풍경이다.
오랜만의 방문이기에 조금 낯설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엔 다른 곳과는 다르게 별의 관리자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접촉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왠지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 같아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영웅의 안식처를 열고 이그니스를 불러냈다.
탄력 있는 갈색 피부를 가진 여전사가 불타는 듯한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주변을 둘러본 이그니스가 말했다.
"슬러버의 저택이로군."
그녀는 좀비 세계의 최대의 공로자다.
이그니스가 아니었으면 내가 그곳에서 돌아오는 시간은 몇 배 더 걸렸을 거다.
나는 고생한 이그니스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다.
"수고했어. 이그니스. 한동안 푹 쉬도록 해."
나는 기특한 이그니스의 탱탱한 엉덩이를 두들겨 주며 말했다. 내 손길에 그녀는 흠칫했지만 별 반응은 하지 않았다.
한 발짝 다가선 건가?
"고맙다, 주군. 나도 마침 쌓여있는 기운을 정리해야 할 것이 있던 시기였다."
내가 그녀에게 사냥 노가다를 시키긴 했어도 나만 이득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성장했다.
경험치를 온전히 그녀에게 몰아줬으니 상당한 마력이 쌓였을 거다.
그 덕인지 그녀의 엉덩이도 탄력이 넘쳤다.
조물조물.
그녀의 엉덩이에서 손을 뗄 수 없다.
중독성이 있었다.
"....."
-탁!
결국 이그니스는 거침없이 자기 엉덩이를 주무르는 내 손을 쳐냈다.
"주군은 잠깐만 느슨하게 해도 정도라는 것을 모르는구나."
나를 흘겨보며 투덜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 나쁜 기색은 또 아니었다.
호감도의 감소 없이 엉덩이를 만졌다.
그러면 개이득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이그니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키가 180이 넘으니 여자치고는 좀 크다.
그러나 내겐 품에 쏙 들어오는 귀여운 여자일 뿐이다.
"흠, 흠.....이 정도는 괜찮다…."
이그니스의 얼굴이 조금은 붉어진 거 같기도 했다. 그런 그녀와 함께 나란히 오랜만에 돌아온 저택 안으로 향했다.
*
*
*
이그니스는 그동안 쌓은 경험치....마력을 정리한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는 홀로 저택을 거닐었다.
가끔 마주친 메이드들이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나간다.
현대에서는 이젠 볼 수 없는 진짜 메이드.
하나같이 미모도 수준급이다.
확실히 눈 정화가 됐다.
앨버트가 한 짓 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무능한 녀석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나는 집무실로 향했다.
할 일은 없다.
아이러니하게 나는 할 일이 없을 때 자주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집무실이 맞나?
서재인가?
아무려면 어떤가.
집무실엔 창문을 등지고 고급스러운 의자와 책상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놓여있는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
집무(게임)하기 위한 도구였다.
집무실의 의자에 앉아 지구에서의 별의 미녀와 나눴던 대화를 회상했다.
별의 미녀들이 내게 여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건 내가 여성에게 압도적인 호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거다.
지구의 그녀는 좀비 세계의 별의 미녀와 느낌이 또 달랐다.
푸른 바다와 같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날 유혹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역시 벌거벗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몸매 역시 완벽했다.
조금은 멍해 보이는 좀비 세계의 그녀와 달리 내가 사는 지구의 미녀는 더 똘똘한 느낌이 났다.
"내가 관리자 후보라는데?"
내가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별의 미녀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고는 잠깐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확인했습니다.》
"내가 별의 관리자 후보라는 것이 마음에 안 드나?"
《그건 아닙니다. 제 예상과는 다른.......그리고 빠르게 관리자 후보가 나타난 것에 의문을 가졌을 뿐입니다. 관리자 후보가 나타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 싫어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름은 있나?"
《없습니다.》
"내가 지어줘도 되나?"
《안 됩니다.》
단호했다.
"왜지?"
《당신은 아직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역시 관리자가 돼야 하나?"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부르지?"
《이름이 없다고 해서 소통이 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지금처럼 대화하면 됩니다.》
"그럼 벼리라고 부르지. 내 맘대로 부르는 건 상관없지?"
별을 그냥 대충 늘려 불렀다.
《.......그것까지 제가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당신의 자유입니다.》
"그래도 관리자 후보쯤 되면 뭐....주는 건 없나?"
《주는 거 말입니까?》
"관리자 후보 기념 선물이라던가…."
몸으로 주면 좋겠는데….
나도 모르게 그녀의 깔끔하게 갈라진 균열로 눈이 갔다.
《후보라고 큰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별의 관리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이 주어집니다.》
"관리 정보?"
《현재 제가 관리하는 별의 정보를 말하는 겁니다. 정보를 보기 원하십니까?》
"그래. 보여줘."
《정보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보내온 정보에는 그동안 그녀가 별을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대한 과정이 들어있었다.
지구의 어비스 침식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지구를 감싸고 있던 차원벽이 옅어졌다.
별은 스멀스멀 다가오는 어비스를 느꼈다.
그렇게 별의 의식이 깨어나고 벼리가 탄생했다.
별의 의식에서 탄생한 벼리는 어비스 침식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다.
지구의 생명체에 어비스의 마나를 천천히 노출해 적응력을 길러줬다.
그건 몇백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미 멸망한 세계의 강력한 존재감이 있는 영혼을 지구로 이끌었다.
환생 삼인방이었다.
차원벽이 뚫리고 어비스의 침식이 시작됐다.
차원 균열이었다.
나름 대비를 했음에도 침식률은 빠르게 10퍼센트를 넘어섰다.
벼리는 게이트를 개방해 어비스의 침식률의 완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 현재 어비스 침식률은 24퍼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