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0화 (239/259)

"저건?"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던 그레이스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웬 전신이 시커먼 거인이 거대 꼽등이와 싸우고.....아니,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고 있었다.

명백하게 두 팔과 두 다리가 달린 인간의 형상을 한 거인이었다. 거인의 전신엔 검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거인이 주먹을 뻗을 때마다 살꼽등이의 살이 움푹 터져나간다.

살꼽등이를 일방적으로 두드리는 그 모습은 노련한 싸움꾼의 모습 같기도 했다.

'저런 몬스터도 있었나?'

그레이스는 그 두 괴물의 싸움을 보며 그동안 변한 세상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면서 봤던 그 거대한 까마귀만 해도 그랬다.

'호수라는 장벽은 의미가 없어. 그 까마귀 괴물만 캠프에 들이닥쳐도 끝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다.

'우, 운호는?'

그레이스는 거칠게 싸우는 두 괴물에게 들키지 않게 몸을 숨기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운호를 찾았다.

혹시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괴물 둘이 싸우고 있는 틈에 구출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찾아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탈출한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와 동시에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른다.

'버, 벌써.....죽진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혹시나 못 찾은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자리를 섣불리 뜨지 못했다.

그렇게 그레이스가 운호를 찾아 헤매는 사이 꼽등이 괴물은 말 그대로 검은 거인의 압도적인 힘에 해체되었다.

승패는 결정 났다.

'후퇴해야 하나? 아! 메시지! 멍청하게!'

공격대라는 운호의 초능력.

생소하기도 했지만, 신기한 능력이기도 했다.

너무 상황이 다급해 그런 수단이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뒤늦게 운호에게 메시지를 보내보려 한 그레이스는 다음에 벌어진 광경에 경악했다.

거대 살꼽등이를 처리한 검은 거인이 허공에 흩어지고 그 자리에 커다란 체구를 가진 익숙한 뒷모습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 사내는 무심하게 소이수류탄을 던져 재생하려는 살점을 태운다.

'거, 검은 괴물 거인이 운호였다니!! 설마! 그가 인간이 아니었다고?!'

그러고 보니 운호의 능력은 초능력자라고 하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뛰어났다.

게다가 검은 거인이라니.

그레이스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결심을 한 듯 커다란 바위 뒤에 숨기고 있던 몸을 드러내고 운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살꼽등이의 재생력은 예상한 대로 대단했다.

'마석이 있군.'

촉수일 때는 보이지 않던 마석이 느껴졌다.

'촉수에서 떨어져 나올 때 놈이 집어넣은 건가?'

살꼽등이의 몸통에 손을 집어넣어 마석을 움켜쥐었다. 

놈이 뺏기지 않으려고 발광을 한다. 

무시하고 그냥 힘으로 뜯어냈다.

-으드득!!

역시 다른 살덩이 놈들처럼 마석이 떨어져 나가자 재생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살덩이의 크기가 너무 컸다.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재생하는 놈을 붙잡고 하염없이 두들길 수는 없다.

그대로 놈을 잘게 잘게 찢어버렸다.

찢어진 살점이 여기저기 흩뿌려진다.

마무리는 소이수류탄으로 할 생각이었다.

거인화를 해제했다. 

그리고 남아있는 살점에 소이수류탄을 던져 더 이상 재생하지 못하게 소각했다.

"운호…."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그곳엔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그레이스였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건가?'

의외로 무모한 구석이 있었다.

이건 내 계획과는 다른 상황이다.

악성종양까지 처리하고 멋지게 귀환할 생각이었는데….

"방금....그건…."

"봤군…."

"응......운호....넌.....인간이 맞는 거야?"

평범한 인간은 그런 거인을 만들지 못한다.

초능력이라고 이해하기에는 상식을 벗어난 모습이었을 거다.

"인간 맞아…."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그게 초능력이었다고?"

"그래."

그레이스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긴 지금까지 봐온 초능력과는 궤를 달리했으니 믿기 힘든 그녀의 마음도 이해는 했다.

".......우리를 속인 거야?"

"속인 건 아니야. 말하지 못한 거지. 너도 봐서 알겠지. 내 힘은 단순히 초능력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규격 외다. 이런 힘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두려워하지."

"......"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레이스가 움찔한다.

그녀의 눈동자는 혼란스러운 듯 떨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발걸음을 멈췄다.

곤란한데….

잘못했다가는 지금까지의 호감도를 모두 날려버릴 수 있었다.

"내가....무서운 건가?"

"그, 그건…."

그레이스는 반사적으로 부정했지만, 그 표정은 복잡했다.

"나는......그냥 너와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네 모습을 보니 욕심이 과했나 보군."

"아…."

"후.....너는 이대로 돌아가라."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나는 이대로 떠나겠다."

나는 그대로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천천히….

어색하지 않게.

'흠......안 잡으면 나가린데….'

난 그레이스의 인성을 믿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캠프에는 이미 내 여자가 된 캐리도 있고 레이첼도 있다.

당연히 그녀들을 그냥 버리고 떠날 순 없다.

'이렇게 말하고 몰래 만나러 가는 건 너무 모양 빠지는데….'

위기의 순간이었다.

"운호!!"

그레이스는 급하게 뛰어와 내 옷을 붙잡았다.

기다리던 신호가 왔다.

발걸음을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애절함과 죄책감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를 거부한 것에 대한 미안함일 거다.

"가지 마. 운호."

".....넌 내가 무섭지 않은 건가?"

"미안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난 네가 무섭지 않아! 오히려…."

"오히려?"

"그, 그건…."

말을 더듬는 그레이스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나는 귀여운 모습을 보이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그 도톰하고 탐스러운 입술을 빨아들였다.

"읍!.....으음....츄릅. 츕. 츕."

그레이스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듯하더니 두 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는다.

-츄읍. 츄릅.츕.츕.

길게 이어지는 키스.

나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다 자연스레 손이 엉덩이를 향했다.

탱탱한 엉덩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자, 잠깐. 여, 여기선…."

안 된다.

분위기 탔을 때 끝장을 봐야 한다.

어영부영해서는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나는 재빨리 눈을 굴려 적당한 장소를 골라 인벤토리에 있던 커다란 텐트를 꺼내 재빨리 설치했다.

"그럼, 저기로 가자."

내가 가리킨 장소를 바라본 그레이스가 깜짝 놀란다.

"어? 왜 저런 게 이런 곳에....꺄악!"

나는 그레이스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렸다.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내 목을 끌어안는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재차 입을 맞췄다.

"아음...츄읍."

나는 그레이스를 안아 들고 키스하면서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게 주변을 마력으로 둘러싸 단단하게 막아버렸다.

*

*

*

"뻑!!"

필립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박운호....그놈이 그런 영웅적인 행동을 하다니….'

녀석은 악당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 오해였다고?

믿었던 에드워드 놈은 민폐 덩어리였고….

박운호는 영웅이 되었다.

'그레이스는 왜 또….'

"뻑!"

필립은 자신의 멍청함에 욕이 저절로 나왔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에드워드에게 속지만 않았다면.

그레이스는….

박운호가 초능력으로 만들어 준 슈트가 흩어져 사라진다.

그것을 본 캐리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두 명의 동료를 잃은 일행의 분위기는 처참하게 가라앉았다.

필립 일행은 침울한 분위기로 캠프에 복귀했다.

캐리는 운호를 마중 나온 레이첼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으앙!! 레이첼~! 운호랑 그레이스가!! 운호가 만들어 준 히어로 슈트가! 흐아앙~"

횡설수설하는 캐리의 말을 듣고 레이첼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이내 풀어졌다.

"캐리 진정해요. 운호 님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진짜?! 그걸 어떻게?!"

"우리는 그분의 은총을 받지 않았나요?"

"으, 은총?"

캐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을 붉혔다.

(아니....그거 말고.....다른 거요….)

레이첼이 캐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 공격대!!"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인다.

잊고 있었다.

운호의 메신저 기능 비슷한 초능력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캐리는 전에 처음 잠깐 시험을 해봤던 기억을 되살려 운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응답이.....없어…."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캐리가 시무룩해한다.

"괜찮아요. 지금 이렇게 그분의 은총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그분이 무사하다는 증거니까요."

"그, 그렇겠지?"

레이첼의 말에 그제야 조금 얼굴이 펴지는 캐리였다.

필립은 그런 캐리의 모습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운호와 그레이스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필립은 이제 여동생을 품 안에서 보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운호....괘, 괜찮겠지?"

"괜찮을 거예요."

레이첼은 걱정하는 캐리의 등을 토닥여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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