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이 있다면 여기서 내게 에드워드까지 업으라고는 못 한다.
그레이스와 리처드도 있지만 그들에게 미루는 건 남자답지 못한 쪽팔린 짓이다.
필립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에드워드에게 등을 내줬다.
"시발! 에드워드, 빨리 업혀!"
"헥! 헥! 가, 감사합니다. 필립 님."
필립이 에드워드를 업고 달리자 더는 쳐지는 인간은 없었다.
그래도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콰콰콰쾅!!
눈깔이 가득 박힌 거대 촉수가 차량에 가득 막혀있는 도로를 거침없이 헤집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촉수와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진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따라 잡힐 것 같았다.
「운호: 까망, 시간 좀 끌어봐.」
우리 위를 날고 있는 까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까망: 내, 내가?」
「운호: 그럼, 네가 하지 누가 하냐. 그동안 처먹은 게 있는데 싫다고?」
「까망: ......아, 알았다. 시, 시간만 끌겠다.」
까망은 내 메시지가 험악해지자 찔끔한다.
그리고 하늘에서 급속 강하를 시작했다.
"저, 저거!!"
캐리가 하늘에서 빠르게 낙하하는 거대한 까마귀를 발견한 거 같았다.
순식간에 날아온 까망이가 발톱을 세우고 낙하하는 힘을 더해 거대 살덩이 촉수를 강타한다.
-콰앙!
까망에게 충격을 받은 촉수가 옆으로 튕겨 나간다. 큰 소리가 나자 무슨 일인가 하고 일행들이 뒤를 돌아본다.
"미친! 산 넘어서 산이군! 저건 또 뭐야!!"
누가 봐도 몬스터로 보이는 까망이의 모습에 필립이 놀라 소리친다.
까망이는 발로 거대 촉수를 움켜쥐고 날개를 퍼덕이며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저지했다.
내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모습이었다.
"싸, 싸우는 모양인데요?"
두 괴물의 모습에 에드워드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냐. 저놈들 중 하나라도 우리를 노린다면 끝장이야. 이 틈에 빨리 도망치자."
그레이스가 심각한 얼굴로 재촉했다.
두 괴수가 드잡이질하는 사이.
우리는 다시 원래의 계획대로 픽업트럭을 향해 도주를 시작했다.
거대촉수의 그 꿈틀거리는 피부에서 작은 촉수가 튀어나와 까망의 다리를 휘감기 시작했다.
「까망: 나, 나 죽는다! 운호!!」
엄살이 심했다.
까망이는 퍼덕이며 자기 다리를 휘감는 촉수를 부리로 쪼아 끊어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까망: 운호! 나는 부상이 심하다! 잠깐 후퇴하겠다.」
'미친....까망이.....그거 잠깐 잡혔다고 부상이라니….'
까망이의 등급에 본체도 아니고 촉수 하나 상대하지 못하는 게 말이 안 된다.
'이놈이....쫄보 짓도 적당히 해야지.'
언젠가 한 번 정신교육을 단단히 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까망이 덕에 거대 촉수와의 거리는 상당히 벌어졌다.
까망이가 하늘로 도망가자 놈의 목표는 다시 우리가 됐다. 그러나 우릴 뒤늦게 추적하려던 거대촉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움직임을 덜컥 멈췄다.
"어? 왜 저러지?"
"포기한 건가?"
"아니......촉수의 길이가 모자란 게 아닐까?"
제시카의 말이 맞는 거 같았다.
이미 도시 외곽이다.
촉수는 본체와의 거리가 상당이 멀어져 있다.
늘어나는 것도 무한은 아닐 거다.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일행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오를 때였다.
거대한 촉수의 끝동이 떨어져 나온다.
그렇게 커다랗게 떨어져 나온 살덩이 양옆으로 다리가 여러 개 솟아나기 시작했다.
두툼한 살로 이루어진 보디와 그 옆으로 나 있는 네 쌍의 다리.
니미….
"히익!! 꼽등이!!"
캐리가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10미터 크기의 거대 살꼽등이가 탄생했다.
아니 꼽등이보다 더 흉측했다.
놈의 입은 둥그렇게 뚫려 그 안에 작은 촉수가 꿈틀거리고 있었고, 몸통 곳곳에는 커다란 눈알이 박혀있다.
참으로 개성 넘치게 혐오스러운 모습이었다.
촉수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 살꼽등이는 네 쌍의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우릴 추적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놈이 오기 전에 주차해 놓은 픽업트럭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리처드와 에드워드가 주차되어있던 두 대의 픽업트럭에 나눠 타고 운전대를 잡았다.
이어서 일행은 그 두 차에 빠르게 나눠 탑승했고, 나는 에드워드가 운전대를 잡은 픽업트럭의 짐칸에 올라탔다.
"빠, 빨리 출발!!"
캐리가 정말 급하다는 듯이 운전대를 잡은 리처드에게 재촉했다.
그녀는 꼽등이가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부릉!
영화처럼 시동이 안 걸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끼이익!!
급하게 출발한 픽업트럭은 순식간에 속도를 높이며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거대한 살꼽등이가 차를 타고 도주하려는 우리를 무섭게 쫓아 오고 있었다.
"어?"
운전하던 에드워드가 백미러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이, 이게 최대 속력인데.......따, 따라잡히겠는데요?"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거대 살꼽등이.
덩치도 큰데 더럽게 빨랐다.
"이, 이대로는…."
잡힌다.
차를 타고 있는 일행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른다.
까망이를 다시 불러?
아니….
이 정도면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다들 멈추지 말고 계속 달려. 난 나중에 갈 테니까."
"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한 일행들.
그런 그들을 내버려 두고 나는 달리는 픽업트럭에서 뛰어내렸다.
"운호!!"
경악하는 일행들을 뒤로하고 나는 살꼽등이를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놈의 징그러운 촉수 달린 입이 나를 집어삼키려 한다.
그것을 피해 놈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머리 근처에 박혀있던 눈알이 데굴거리더니 나를 바라본다.
그 눈깔에 들고 있던 창을 깊숙이 찔러넣었다.
-푸욱!!
-끼에엑!!
눈알을 찔려 아픈 건지 살꼽등이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날 떨어뜨리기 위해 발광을 한다.
로데오를 하듯 깊숙이 박힌 창을 잡고 떨어지지 않게 버텼다.
이대로 놈의 등에 붙어 적당히 주의를 끌기로 했다.
놈의 상처 입은 눈알이 피부로 쏙 들어간다.
그리고 이내 상처가 회복된다.
내가 서 있는 살꼽등이 놈의 피부에서 촉수들이 슬금슬금 올라오더니 나를 붙들기 시작했다.
슬쩍 일행 쪽을 바라봤다.
캐리가 차 문을 열고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필립이 두들겨 맞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빼, 날 애처롭게 멍하니 보고 있는 그레이스도 보였다.
두 대의 픽업트럭은 빠르게 멀어지더니 점으로 변하고 이어 완전히 사라졌다.
"갔나?"
괜찮은 시기라고 생각했다.
마침 뾰족한 수도 없었고….
일행의 안전도 어느 정도 확보했다.
그들에게서 잠깐 떨어져 이 꼽등이 놈을 잡고 시애틀의 거대 악성 종양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캠프로 돌아가면 될 거 같았다.
미국인은 히어로라면 환장을 한다.
죽은 줄 알았던 히어로의 귀환.
자기희생을 한 영웅이 구사일생으로 돌아온다?
이보다 호감도를 올릴 수 있는 좋은 이벤트가 있을까. 그레이스나 제시카, 그녀들의 호감도를 맥스까지 찍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면 그레이스에게 키스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좀 더.....딥한 관계로….
말 그대로 일거양득이라고 할 수 있다.
살꼽등이 놈은 떨어지지 않는 나를 촉수로 휘감고 자신의 몸속으로 끌어당겼다.
내 몸은 이미 녀석에게 반쯤 집어삼켜져 있었다. 하반신에서 상당한 압박이 느껴졌지만 내게는 별 의미 없는 짓이었다.
이제 놀아주는 것은 끝났다.
꼽등이 박멸을 할 때였다.
내게서 뿜어나온 마력이 내 몸을 단단하게 감싼다.
그리고 팽창을 시작한다.
팽창하는 마력에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촉수와 살덩이들이 뜯어져 나간다.
살꼽등이 놈이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거대화를 예전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 마력은 이런 물질화에 가장 특화되어있다. 그러니 커다란 놈들에겐 체급을 맞춰주는 것은 꽤 효과적인 방법이다.
순식간에 팽창하는 마력에 꼽등이의 머리가 뭉개진다.
적당히 놈과 비슷한 크기의 10미터 정도의 검은 거인을 만들어낸 나는 꾸물거리며 빠르게 머리를 재생하는 거대 살꼽등이를 바라봤다.
거대 악성 종양을 제거하러 가기 전.
놈을 애피타이저로 적당히 두들기며 워밍업을 하기로 했다.
*
*
*
괴물에게 따라잡힐지도.....아니, 따라 잡힌다는 절망의 순간이었다.
운호가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아…."
그레이스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말문이 막혔다. 살꼽등이 괴물을 향해 달려드는 운호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살꼽등이 괴물의 위에 올라탄 그가 그 커다란 창을 내려 꼽는다.
-끼에엑!!
괴물이 비명을 지른다.
운호는 고통에 발버둥 치는 괴물의 머리에 박힌 창을 잡고 떨어지지 않게 매달린다.
꼽등이 괴물은 더 이상 일행을 쫓아오지 않았다.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
트럭은 괴물로부터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멀어져 갔다.
그러나 일행의 누구도 기뻐할 수 없었다.
필립은 운호를 따라 뛰어내리려 한 캐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캐리, 미쳤어?"
"안 미쳤어! 필립 놓으라고!! 안 놔?!"
-퍽! 퍽!!
필립은 캐리에게 얻어맞으면서 필사적으로 그녀가 뛰쳐나가지 않게 붙잡고 있었다.
운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괴물의 머리에 매달려 평온한 눈동자로 멀어지는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순식간에 일어난 운호의 희생에 머리가 멍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악어 괴물과의 사투.
죽음을 각오하던 그 순간.
그가 목숨을 구해줬다.
해를 등지고 있던 듬직한 그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를 마음에 담은 것이.
그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그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필립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영입해 캠프로 끌어들였다.
그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예전부터 남자들의 고백은 많이 받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먼저 남자를 좋아해 본 건….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끄는 사이, 운호는 캐리와 깊은 관계가 됐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캐리의 적극적인 성격이 부러웠다.
연구소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하게 된 운호와의 충동적인 키스는.....캐리에 대한 죄책감에 후회가 되면서도 설레기도 했다.
운호가 강한 초능력자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고 저런 거대한 괴물을….
홀로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젠장!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필립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들었지만 무시했다.
너무 빠르게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린 탓에 중심이 흐트러지며 지면을 굴렀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운호가 초능력으로 만들어 준 검은 슈트 덕분이었다.
그레이스는 그대로 오뚝이처럼 일어나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자신이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