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5화 (234/259)

조금은 믿음이 생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흠흠.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니 이 녀석.....사정이 아주 딱하더군. 그래서 좀 도와주기로 했다."

모두의 얼굴이.

특히 필립 녀석의 얼굴이.

이놈이 뭐 잘 못 먹었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결국 우리....아니 나는. 

에드워드의 누나를 구출하기로 했다.

이러면 내 결정에 다른 일행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그룹에서의 내 의견의 거의 절대적이었다.

결국은 무력이다.

역시 이런 세상에서는 무력이 깡패다.

가장 극렬한 반대파였던 그레이스도 내가 결정하자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살덩이 괴물들을 가볍게 처리하는 것을 봤으니 쉘터의 마스터키도 무난하게 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그곳까지 얼마나 걸리지?"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하,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겁니다."

"한 시간? 진짜?"

"두, 두 시간…."

"......복귀해야 하나?"

에드워드의 어리바리한 모습에 겁을 줘 본다.

"사,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을 재본 것이 아니라.....두 시간은 안 걸릴 겁니다."

복귀 소리에 에드워드가 아연실색하며 횡설수설 변명을 한다.

이놈.....믿을 수 있는 건가?

"캐리, 그 이상한 슈트는 뭐야?"

잘빠진 검은색 슈트를 입은 캐리와 그레이스의 모습을 보고 필립이 궁금증이 생겼는지 물어본다.

"응? 이거? 멋지지? 운호가 만들어 줬어."

"만....들어줬다고?"

필립이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갸웃한다.

"응. 운호의 초능력이야."

"그게 초능력이라고?!"

"잘 봐."

캐리가 옆에 반쯤 부서진 승용차의 유리창에 주먹을 뻗었다.

-퍼석!

차 유리를 가볍게 부수고 들어간 캐리의 주먹.

"어?"

그녀는 기스 하나 없는 주먹을 빼서 필립에게 보여주며 자랑한다.

"어때? 대단하지."

"........대단하군."

"필립, 너도 운호에게 부탁해봐."

"......됐다."

캐리의 권유에 필립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그래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나도 해 줄 생각이 없었으니 부탁했어도 면박만 당했을 거다.

우리는 에드워드의 미인 누나를 구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이동 중 살덩이 슬라임들을 몇 마리 더 잡았다.

그러면서 소이 수류탄 하나만 던져서는 놈들을 완전히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허접한 에드워드의 능력보다 소이 수류탄이 화력이 더 강했음에도 그랬다.

놈들은 불이 붙어 괴로워하면서도 그 강한 재생력으로 버티어냈다.

게다가 불도 그냥 붙여서는 잘 안 붙는다.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에드워드 같은 각성자의 화염 능력이나 소이 수류탄 같은 것을 던져야 한다.

오히려 어설프게 불을 붙였다간 살덩이가 아닌 불덩이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도 같았다.

마석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감지 능력.

감지된 마석을 적출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

그리고 마무리할 수 있는 강력한 불.

살덩이 괴물 놈들을 처리하려면 이 세 가지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일행 중에 그 정도의 능력자가 없다.

그나마 화염계 능력을 갖춘 에드워드가 쬐끔 도움이 되고 나머지는 그냥 짐 덩어리들이다.

짐이 생각보다 좀 많긴 했다.

그렇다고 일행들을 돌려보내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에도 애매했다.

한 시간쯤 이동했을까?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그 풍경을 보고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기괴하다고 해야 하나.

건물들은 물론 바닥까지 검붉은 살덩이 점막들로 뒤덮여 있는 풍경은.

마치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는 듯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그 풍경을 본 필립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러분. 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더 이상 가기 싫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자 에드워드 녀석이 먼저 점막 위로 올라가더니 허세를 부린다.

"그만둬라. 에드워드. 그렇게 함부로…."

리처드가 그런 에드워드를 보고 젊잖게 주의를 준다.

그때 밟고 있던 바닥이 꿈틀거리자 비틀거리는 에드워드.

"으악!"

녀석이 기겁하면서 황급해 자세를 잡는다.

이놈도 처음 밟아보는 거 같은데….

"네가 탈출할 때는 이렇지 않았나?"

녀석이 우리의 눈치를 보며 눈을 굴린다. 어떻게 말해야 우리가 돌아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그, 그렇습니다. 제가 탈출할 때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에드워드는 괜찮은 대답이 생각이 나진 않는지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운호, 저길 봐."

그레이스가 점막이 덮인 곳과 없는 곳의 경계를 가리켰다. 스물스물 천천히 영역을 넓히는 점막이 눈에 보였다.

이런 풍경을 보니 나도 조금은 고민이 된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나야 괜찮을 거다.

나머지 인원들이 문제다.

인제 와서 다시 돌아가기는 귀찮은데….

겨우 이 정도로 미녀 의사를 포기한다고?

짐들이 많다 보니 나도 모르게 허약한 생각을 하게 됐다. 이래서 필립 같은 하남자와 가까이 지내선 안 된다.

내가 이들에게 보여준 능력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들을 보호하는 거야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강력한 능력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들이 마냥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세종시에서 접수한 생존자 캠프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생존자 캠프를 접수한 그 과정을 지켜본 이들에게 나는 공포의 대상이다.

당연히 나를 향한 존경이나 경외는 없다.

천부문 쪽은 그나마 조금 낫지만….

나는 세종시의 생존자들과는 대면할 때마다 그들이 내게 품은 두려움을 느꼈다.

한마디로 그들은 나를 거의 사람 취급하고 있지 않다는 거다.

괴물이면 모를까.

그렇다고 섭섭하다는 건 아니다.

그들에게 잘 보일 이유도 없고….

친하게 지낼 생각도 없다.

내 여자들과 친하게 지낼 시간도 부족하다.

만만하게 보이는 것보다는 괴물이 낫다.

하지만 이곳 미국의 여자들과는 친하게 지내고 싶다.

첫인상은 중요하다.

남녀관계는 첫인상이 틀어지면 시작도 못 하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힘숨찐 짓을 좀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힘숨찐한다고 괜히 일을 복잡하게 질질 끄는 건 상남자로서 할 짓이 아니다.

마음을 굳혔다.

"뛰자."

"예?"

"에드워드, 너의 각오를 보여줘라. 얼마나 일찍 도착하냐는 네 놈에게 달렸다."

여기서 체력이 제일 약한 캐리를 내가 업고 달린다면 에드워드 녀석만 열심히 하면 된다.

"아, 알겠습니다."

에드워드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퍽! 철퍽!

우리는 에드워드를 앞세워 그 뒤를 따라 점막을 밟으면서 빠르게 뛰었다.

"허억! 허억!"

에드워드는 상당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캐리는 내가 업고 있고 그 혼자 육체 강화 쪽의 각성자가 아니니 죽을 맛일 거다.

기분 나쁜 풍경이긴 했지만.

생각한 것과 달리 이동하면서 큰 위협은 없었다.

괜한 기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에드워드가 누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달린 결과.

우리는 살덩이 점막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커다란 빌딩이었을 건물 앞에 섰다.

빌딩은 점막에 싸여 들어갈 구멍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건물이야?"

"헤엑! 헤엑! 예…."

그런데 에드워드는 거친 숨을 내몰아 쉬면서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탈출할 때는 이런 상태가 아니지 않았을까?

(이미.....늦은거아냐?)

내게 업혀있던 캐리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럴지도….

필립과 리처드, 그레이스는 긴장한 채 연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운호, 도착했으니 내려줘."

나는 업고 있던 캐리를 바닥에 내려줬다.

"으윽! 밟는 느낌이 이상해."

그녀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발로 바닥을 툭툭 건드리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우진 않고 있었다.

생각보다 강심장이었다.

"에드워드, 돌아가는 게 어때? 건물 상태를 보니 이미…."

그레이스가 에드워드에게 냉정한 말을 건넸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이쯤에…."

-화악!

에드워드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화염을 일으켜 빌딩 입구로 보이는 지점을 태운다.

살덩어리가 꿈틀거리면서 점막이 밀려난다.

효과가 있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곳이 입구입니다!!"

에드워드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

그러나 일행의 얼굴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저기 왜…."

에드워드가 우리의 눈치를 보면서 묻는다.

이놈.....정말 몰라서 묻나. 

누가 저따위 건물 안에 들어가고 싶겠나.

시커먼 어둠에 잠겨있는 빌딩으로 들어가는 구멍. 

그곳은 지옥의 던전 입구처럼 보였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들어가기 싫은 것이 당연했다.

"운호....굳이 들어가야 해?"

캐리가 찜찜한 표정으로 물었다.

확실히….

나도 저 더러운 살덩이 건물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즈륵즈륵즈륵.

그때 어디선가 상당히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시발! 저게 뭐야!!"

필립이 소리쳤다.

어디 숨어있다 나타난 건지 팔뚝만 한 구더기의 물결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비위 상하는 살점 구더기 몬스터 떼였다. 구더기의 끝 주둥이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둥글게 나 있었다.

커다란 개불 끝에 이빨이 달린 좆같은 모습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에드워드가 점막을 태워서 그런 거 같은데….

어디 도망갈 곳도 없었다.

아니, 딱 한군데 있었다.

기감을 풀어 건물 안쪽을 살펴봤지만 큰 위협은 없어 보였다.

"어, 어쩔 수 없군요. 도주로는 이곳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은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왠지 얄미워 보였다.

'이놈 좋아하는 거 같은데….'

결국 우리는 에드워드의 의도대로 구더기 괴물들에게 쫓겨 떠밀리듯 강제 던전 입장을 하게 됐다.

빌딩 안쪽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곳곳에 점막 곰팡이가 피어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래도 바깥에 비하면 별거 아닌 편이었다.

"이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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