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1화 (230/259)

간단하게 말해.

해줘도 지랄인 상황이 벌어질 수가 있다는 거다.

선착장으로 나가니 그레이스가 이미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레이첼이 있었다.

"레이첼도 갈 생각인가?"

"아니에요. 운호 님을 배웅하러 나왔습니다."

레이첼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보급 요원은 나와 그레이스, 캐리다.

의외인 것은 필립이 별 반응이 없다는 거다.

그동안 꾸준히 우릴 따라 나왔던 필립이다.

평소라면 이 자리에 있어야 정상이었다.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드디어 여동생의 남자로 인정받은 건가?

......아니면 포기한 건가.

그렇다고 필립 따위 기다릴 생각도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우리는 그대로 출발했다.

새벽에 출발했음에도 해가 중천을 넘어서야 보급장소에 도착해 보급품을 챙길 수 있었다.

다행히 먼 길 온 보람이 있게 필립 일행처럼 허탕은 치지 않았다. 무난하게 보급품을 가지고 다시 우리가 캠프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늦은 밤임에도 사람들은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 처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당량의 보급품을 가져온 우리를 보고 그제야 안도하며 얼굴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보급하러 떠난 사이 필립 일행이 시애틀로 쉘터의 키를 구하러 떠났다는 거다.

필립과 리처드. 

그리고 에드워드.

이렇게 셋이서만 움직였다고 한다.

에드워드 이놈 뭐지?

미친놈인가.

그는 왜 사지로 기어들어 가려고 하는 건가.

까망의 말이 맞는다면 무덤으로 들어간 격이었다.

침식체의 하수인이라도 되는 건가?

"운, 운호, 어떻게 하지?"

캐리는 그래도 가족이라고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캐리, 내가 가볼게."

그레이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그녀도 오랜 동료인 필립을 버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필립 이놈 민폐 덩어리였다.

당연히 나는 그녀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자고 날이 밝으면 함께 움직이자. 온종일 움직였으니 피로도 쌓였잖아. 지금은 어두우니까 위험해."

"고마워. 운호."

우리는 일단 조금이라도 컨디션을 회복하고 내일 날이 밝는 데로 움직이기로 했다.

다음날.

어스름한 새벽.

레이첼뿐만 아니라 그녀의 딸 도로시도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그녀들을 공격대원으로 집어넣기로 했다.

<23지구의 공대원을 더 늘릴 수 없습니다.>

<추가 파티를 생성해야 합니다.>

<추가 파티 생성은 5개의 스킬포인트가 필요합니다. >

그녀들을 다 공대원으로 집어넣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했다. 스킬포인트를 사용해 공격대 파티를 하나 더 늘렸다. 

"이게 뭐야? 운호?"

캐리가 궁금한 듯 물었다.

"내 초능력이야. 서로의 위치도 알 수 있고 메시지도 보낼 수 있어."

「도로시: 아저씨, 이렇게요?」

「운호: ......그래.」

도로시가 왜인지 상당히 좋아했다.

이제 좀비 세계의 잉여 꼬마 공대원이 3명이나 됐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레이첼이 내 여자이기도 했고 그녀의 딸이다.

경숙이의 일처럼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것보다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이 나았다.

「그레이스: 시, 신기하네.」

「캐리: 대박!」

신입 공대원들이 신기한 듯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젊어서 그런지 적응이 빨랐다.

그리고 쓸데없이 복잡해지지 않게 당연히 한국에 있는 이들과는 메시지를 단절시켜놨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레이첼, 부탁해요."

그레이스는 레이첼이 초능력을 각성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혹시 모를 사태에 이 캠프를 보호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레이첼은 날 쳐다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호: 까망, 그 굉장한 놈이 있다는 곳으로 이동해.」

「까망: 드디어 잡는 거냐? 아, 알았다.」

까망의 메시지에서 기대감을 느꼈다.

"운호 님, 다녀오십시오."

"아저씨, 다녀오세요."

우리는 레이첼과 도로시의 배웅을 받으면서 필립 일행의 뒤를 쫓아 시애틀로 향했다.

*

*

*

필립은 박운호 일행이 보급을 나간 틈을 타서 에드워드와 리처드, 3명이 함께 쉘터의 키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

필립이 보기에 그레이스는 마음이 바뀔 거 같지 않았다.

박운호, 그 녀석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박운호가 동행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캐리가 따라올지도 모른다는 거다.

아니, 따라온다.

시애틀은 보급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위험한 곳이다.

그런 곳에 캐리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시간을 끌 거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게 더 나은 선택 같기도 했다.

무거운 보급품을 가지러 가는 것도 아니고 간단하게 쉘터의 마스터키를 가지러 가는 거다.

필립은 굳이 많은 인원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기동성이 중요했다.

다행인 것은 리처드가 찬성파라는 거다.

리처드는 아내와 딸이 있었다.

쉘터의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리처드마저 반대했으면 이번 일이 힘들어질 뻔했다.

그렇게 필립 일행은 에드워드를 길잡이로 시애틀로 향했다.

*

*

*

필립은 차를 세웠다.

앞에 보이는 도로는 시애틀에서 탈출하려던 차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차로 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

필립 일행은 차에서 내려 화물칸에서 무기를 챙겨 들고 도보로 이동을 시작했다.

에드워드의 말에 따르면 쉘터로 들어가기 위한 열쇠는 퓨쳐 인더스트리라는 곳에 있다고 한다.

필립이 알 정도의 앱플이나 테술라 같은 엄청나게 유명한 회사는 아닌 거 같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거 같기도 한 익숙한 이름이었다.

에드워드는 세상이 이 꼴이 되기 전 그 회사의 직원이었고 쉘터 건설에 관련된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했다.

미국에 쉘터를 짓는 부자들의 이야기는 유명했다. 퓨쳐 인더스트리란 회사는 그런 부자들의 쉘터를 지어주는 일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쉘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스터키가 필요한데 그게 그 회사의 건물에 있다는 이야기다.

필립은 도시를 향해 이동하면서 의문이 들었다.

좀비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전에 그레이스와 왔을 때는 꽤 많은 좀비를 봤다. 그리고 그 좀비들을 잡으면서 깊숙이 들어가다 죽을뻔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이상할 정도로 좀비가 없었다.

좋게 생각하면 그 덕에 이동이 편한 것도 사실이다.

필립 일행은 별문제 없이 도시에 접근할 수 있었고 기괴한 광경을 목격했다.

"왓더…."

점점 가까워지는 도시의 모습을 본 필립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게 뭐지?"

"그, 글쎄요…."

"......."

흉측한 굵은 덩굴이 건물들을 뒤덮고 있었다.

그 덩굴들은 마치 살덩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살덩이가 맥동하듯 꿈틀거린다.

그 모습을 본 필립 일행은 알 수 없는 소름이 끼치며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누가 봐도 불길한 생명체? 였다.

도로로도 삐져나온 뿌리 같은 살덩이가 보였다.

그들은 그것을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좀비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필립은 그 이상으로 힘든 여정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필립 일행은 마음을 다잡고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캠프의 스페어 차가 맞아."

도로 위에 주차된 픽업트럭을 본 그레이스가 말했다. 그 앞쪽으로는 이리저리 엉켜있는 차들로 도로가 꽉 채워져 있었다.

더는 차로 들어갈 수 없으니 필립이 놓고 간 모양이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필립, 들리면 대답해."

그레이스가 필립에게 무전을 시도해 본다.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캐리에게 등을 보이고 자세를 낮췄다.

그런 내 모습에 캐리의 의문 어린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업혀."

"업히라고?"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서는 네가 업히는 게 나아."

그레이스의 각성 능력은 독특했지만, 강화계의 특성도 가지고 있었고.

각성자가 아닌 캐리는 그레이스에 비해 육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캐리가 각성하기엔 그동안 각성제?를 주입한 시간이 모자란 감이 있었다.

언젠가는 각성하겠지만.

어찌 됐든 지금은 그냥 일반인이다.

나야 캐리를 업는다고 해도 전혀 부담되지 않으니 이 경우는 그녀를 업는 것이 나았다.

"나.....괘, 괜히 따라왔나?"

캐리는 내가 그녀를 업고 가려 하는 모습에 괜히 짐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거 같았다.

"그런 생각하지 말고 업혀."

내 입장에서는 캐리나 그레이스나 그게 그거였다. 내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이그니스나 릴리아나 정도의 수준은 돼야 한다.

캐리가 한숨을 쉬면서 내게 업혔다.

그녀의 부드러운 동체가 기분 좋게 내 등에 밀착해 온다.

풋풋한 여체의 향기가 콧속을 간질인다.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드론 조종할 줄 알아?"

"드론? 응. 할 줄 알아....드론도 가지고 있어?"

그녀에게 인벤토리에서 드론을 꺼내 건네줬다.

"그걸로 필립을 좀 찾아봐."

"응, 알았어."

그래도 할 일을 줘서 시무룩해하는 그녀를 달래줬다.

안타깝게도 필립 일행이 어디로 향하는지까지 자세히 듣지 못했다.

자세한 논의 단계에 가기 전에 그레이스가 극렬히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운호: 까망, 도시에 인간이 보이면 보고해.」

「까망: 알았다. 잘 살펴보겠다.」

까망은 이미 도시 상공에 도착해 있었다.

워낙 높이 있어 여기서 보면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그레이스와 캐리가 놀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레이스가 트럭 짐칸에 실려있던 무기를 꺼내 착용했다.

도끼는 들고 창과 샷건은 등에.

허리춤에는 정글도를.

그녀는 완전무장을 한 여전사의 모습이 됐다.

캐리가 드론을 띄우고.

그녀를 업은 나와 그레이스는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괴한 살덩이들이 덩굴처럼 뒤덮인 도시의 풍경을 보게 됐다.

"이, 이게 도대체…."

그 풍경을 본 그레이스가 당황했다.

"왜 그래?"

"저,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그러고 보니 좀비도 없어…."

전에 왔을 때는 좀비가 많은 도시였는데 지금은 없다는 말이다.

좀비가 없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봤을 때 더 지독한 존재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도시에 진입하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잠깐."

그레이스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봤다.

나는 업고 있던 캐리를 내려놓고 그녀들에게 내 마력을 씌워 갑옷을 만들어줬다.

그녀들의 잘빠진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색 슈트가 만들어졌다.

"이, 이것도.....초능력?"

"그....렇지."

역시 초능력이 존재하면 복잡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

그레이스와 캐리가 신기한 듯 자신들의 몸을 둘러본다.

"운호! 이, 이건 히어로 슈트 같아!"

캐리는 신기해하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헌터용 전투 슈트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이쪽이 나을 거 같았다.

내 마력 갑옷은 헌터들의 전투 슈트에 비해 유틸성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방어력만큼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살덩이 덩굴이 꿈틀거리는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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