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229/259)

내 알리바이를 위해 대외적으로 캐리와 깊은 관계라는 것을 밝힌 것이 됐다.

캐리의 말에 따르면 그레이스도 내게 조금 호감이 있는 상태라고 했으니 그게 원인이 아닐까.

언젠가 매듭을 풀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일단 모른 척할 때였다.

그보다 에드워드의 진실을 알려줄 때였다.

그동안 캐리와 질펀한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이 팔려 깜빡했다.

"에드워드는 각성자야."

내 말을 들은 그레이스의 얼굴이 대번에 진지하게 변했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초능력으로 그런 것도 알 수 있는 거야?"

"그렇지."

"그래서 그를 범인으로 지목한 거군.....운호, 네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의심스럽네."

"내 말을 믿어?"

"글쎄...반신반의지만 믿는 쪽이야. 하지만....에드워드가 초능력자라는 것만으로 범인이라고 할 수 없어…."

당연히 에드워드는 끝까지 부인할 거다.

필립이라는 든든한 애인도 있다.

심증은 있으나 마나다.

에드워드가 직접 불을 지르는 것을 본 확실한 증인이 없는 이상 범인으로 모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필립이 데이먼 실종사건을 포기한 것도 그 때문일 거다.

"그런데 범인은 왜 불을 질렀을까?"

캐리가 물었다.

"그건…."

".....?"

"에드워드가 운호의 말대로 진짜 범인이라면....곧 그 이유가 나오겠지."

미녀 보안관다운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말하는 그레이스의 얼굴은 확신에 차 있었다.

*

*

*

화재로 캠프의 식량 대부분이 손실됐다.

결국 보급 예정 일정을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이번 초능력자 보급 당번인 리처드와 필립.

필립의 애인 에드워드.

험프리가 보급을 나섰다.

그리고 결국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지금 캠프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었다.

그들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언제나 평화롭던 캠프의 분위기는 더욱 암울해졌다.

그 다음 날.

"운호, 필립이 찾아."

캐리가 찾아왔다.

필립이 날 찾다니 살다 보니 신기한 일도 있다.

그런데 가기 싫었다.

"가야 하나?"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거 같아. 간부들 모두 모여있어."

"......."

내가 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안 캐리가 말을 덧붙였다.

"그레이스가 건의한 거야."

"흠....그러면 어쩔 수 없군."

소파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캐리가 눈을 흘기며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나와 캐리가 향한 곳은 공용 식당이었다.

나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 곳이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레이스. 필립. 리처드....험프리, 메튜.

그리고 에드워드.

주로 보급을 담당하는 인원들이 둥근 테이블을 둘러싸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필립 옆에 에드워드가 부관처럼 서 있었다.

애인 사이 나란히 서 있는 게 보기 좋아 보였다.

우리가 들어오자 테이블 위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린다.

"어서 와."

그레이스가 우리를 미소 지으며 맞이해줬다.

캐리는 내 팔을 껴안고 있었다.

그것을 본 필립의 얼굴이 꿈틀거렸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난 그레이스의 옆으로 가서 섰다.

테이블 위에는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호수가 있는 현재 위치를 중심으로 많은 엑스 표시가 되어있었다.

아마 이미 보급을 다녀온 곳 같았다.

보급품을 구하는 거리도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애틀이라고 쓰여 있었다.

'시애틀이 까망이가 엄청난 놈이 있다고 말한 곳인가?'

근처에 다른 대도시는 안보였다.

"이대로는 힘들어. 다음에 보급하러 갈 마을은 하루 만에 다녀오기 힘들 거야. 어쩌면 바깥에서 노숙해야 할 수도 있어."

메튜의 말에 다들 침음성을 흘렸다.

다음 보급 당번은 나와 그레이스다.

아마도 캐리도 갈 거다.

나야 위기감이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밖에서 노숙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할 거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식량을 다 태워 먹었으니. 남은 게 일주일 분량은 될까 모르겠어.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수밖에."

그레이스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필립이 그레이스를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쉘터가 있는 곳을 알아냈어."

"쉘.....터?"

그의 입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모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래. 쉘터. 물도 식량도 풍부한 쉘터."

"......그런 곳이 있다고?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데."

"에드워드가 알려줬어."

필립이 에드워드에게 눈짓했다.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에드워드가 입을 나불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원래 쉘터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괴물에게 쫓기다 이 호수로 몸을 던졌죠. 그리고 운 좋게 필립 님께 구함을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이곳 생활도 나쁘지 않아서 쉘터는 잊고 이곳에서 잘 지낼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런데 타이밍 좋게 식량 창고에 불이 났다.

"이왕 상황도 이렇게 됐으니 혹시 괜찮다면 쉘터를 목표를 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필립 님께 건의드린 겁니다."

뻔뻔한 놈이었다.

"그, 그런 곳이 있다고?"

"괜찮지 않나?"

험프리와 메튜가 희망에 찬 목소리를 냈다.

리처드는 별 반응 없이 팔짱을 끼고 무게를 잡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나?

어쩌면 같이 보급하러 나가서 들은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레이스와 캐리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내 여자들은 이미 그가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단계였다.

그리고 마침 암울한 시기에 그가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도 들고 왔다.

여기서 의심하지 않는다면 언제 할까.

그래도 에드워드가 왜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건지는 대충 알게 됐다. 확실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우리를 쉘터라는 곳으로 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뭐, 뭔가 잘못된 거라도…."

생각만큼 나와 여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자 에드워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 타이밍에 너무....적절한 이야기네."

"예?"

그레이스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에드워드 놈이 이게 아닌데.....하며 슬슬 눈치를 본다.

"그레이스, 확실히 의심스러운 상황일 수도 있어. 에드워드도 한참을 고민하다 우리에게 이야기 한 거야."

나는 "미친놈아! 그 시점에서 믿는 게 아니라 의심해야지."라고 욕을 한 바가지 퍼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랑에 빠져 콩깍지가 씌면 뵈는 게 없다더니 필립이 딱 그 꼴이다.

"하아....그래서 그 쉘터는 어디 있는데."

필립의 그 모습에 그레이스가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이, 이곳에 있습니다."

에드워드가 지도로 손가락을 집었다.

남동쪽에 있는 데이톤이라는 지명이 보였다.

대충 보니 하루 이틀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캠프에 있는 생존자들을 이끌고 가면 곱절의 시간은 더 걸릴 거다.

"그래서....캠프의 사람들을 그쪽으로 이동시키자고?"

"예....그런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또 뭐가 있는 건데?"

그레이스는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할 얘기가 있으면 다 해보라는 듯 물었다.

"쉘터에 들어가려면 키가 필요합니다."

이야기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키? 그건 또 어디 있는데."

"그건…."

에드워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시애틀입니다."

"안돼. 그건 너무 위험해."

그레이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즉각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레이스, 생각해봐. 쉘터야. 그곳엔 전기는 물론 몇십 년은 먹을 수 있는 식량과 물이 있어. 지금같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된다고.....너도 알고 있잖아 이곳의 생활도 언젠가 끝나리라는 것을....이건 매를 언제 맞느냐의 차이야."

에드워드가 어떻게 설득한 건지 필립은 쉘터의 신봉자가 되어있었다.

"하아....필립, 너도 알고 있잖아. 시애틀이 얼마나 위험한지. 죽을뻔한 것도 얼마 안 됐는데....그곳을 다시 기어들어 가겠다고? 쉘터든 뭐든 죽으면 거기서 끝이야."

"시애틀에 가는 건 초능력자만으로 구성할 생각이야. 그러면 어렵지 않게 쉘터 키를 구할 수 있을 거야."

"하아....필립, 벌써 계획까지 세워 놨어?"

그레이스가 인상을 썼다.

"그, 그건…."

필립이 찔끔했다.

그레이스는 자신과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계획한 필립에게 화가 난듯했다.

그러게, 이놈이….

어쩐지....날 부른 이유가 이거였다.

위험한 시애틀에 같이 가자고.

캠프 실세인 둘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필립은 해볼 만하다고 느끼는듯했고, 그레이스는 당연히 반대였다.

단순히 위험해서는 아니다.

에드워드 때문이었다.

수상한 인간의 제안이다.

그레이스로서는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필립은 애인 때문에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 하고 있었다.

나와 그레이스, 캐리는 반대파.

나머지는 그레이스의 눈치를 보면서도 찬성 쪽에 가까웠다.

그만큼 꿈과 희망이 가득한 쉘터의 이야기는 강력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서로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그대로 회의를 파했다. 그리고 나와 캐리는 그레이스의 집에 다시 모였다.

"수상해."

캐리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 외에는 아니다.

필립은 에드워드를 신뢰한다.

그리고 필립뿐만이 아니다.

에드워드는 그동안 반반한 얼굴로 캠프 내에 평판 작업을 잘해놨다.

그 신뢰에 금이 가게 해야 하는데 그건 쉽지 않다

셋이서 머리를 굴려봤지만, 찬성파의 의견을 돌릴만한 뾰족한 수가 없었다.

두들겨 패서라도 에드워드가 능력을 발현하게 하면 되는데.....그걸 허락해줄 리가 없었으니….

나는 참견해봐야 좋은 소리 못 들을 거 같아 그냥 일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야 어찌 됐든 내 여자들만 챙기면 된다.

시애틀.

까망이 말에 따르면.

굉장한 놈.

즉 좀비킹 같은 놈이 있는 곳일 거다.

중급 침식체도 쩔쩔매는 이들이 그곳에 간다?

죽겠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다.

당장 먹을 식량을 구해야 했다.

다음날.

"운호, 빨리 일어나."

캐리가 새벽부터 나를 깨웠다.

"하암…."

이번 보급장소는 꽤 먼 곳이었다.

하루 만에 다녀오기 빡빡한 거리였고 새벽에 출발하기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

원래 이 정도 텀으로 가진 않지만, 필립이 보급에 실패도 했고 상황이 상황인 지라 어쩔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아침이 늦은 내게는 곤욕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내 인벤토리에 있는 식량을 풀 생각은 없었다.

지금 타이밍에 내 능력을 밝히고 식량을 풀면 누가 봐도 내가 식량 창고에 불을 질렀다는 게 된다.

식량을 빌미로 이 캠프를 쥐락펴락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특히 필립 놈이 그렇게 몰아붙일 가능성이 컸다.

캐리라는 알리바이가 있지만.

그녀와 함께 공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

사람은 생각보다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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