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였다.
"어서 와."
진한 갈색 머리와 녹색 눈동자가 매력적인 미녀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워낙 할 게 없는 섬이다.
그래서 그런지 캐리는 종종 내게 놀러 오곤 했다.
나도 미녀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캐리는 제집인 양 익숙하게 들어와 소파에 앉아 늘어진다.
핫팬츠를 입고 있는 캐리의 매끈한 다리가 내 시선을 끌었다. 그녀는 그런 내 시선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척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피자와 콜라를 대접해 줬다.
"피자!"
그녀는 신이 나서 피자를 한 조각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우물우물. 언제봐도 신기하다니까. 그레이스도 알고 있어?"
맛있는 음식.
캐리가 내 집을 자주오는 또 하나의 이유다.
나는 그녀를 음식으로 꾄다고 할 수 있었다.
"능력은 알고 있는데....이런 음식까지 넣고 다니는 건 모를걸."
"하긴....이런 놀라운 능력이 있으니 혼자 살아남았겠지? 그런데 우리끼리만 이 맛있는 걸 먹고 있으니 양심에 쪼금 찔린다. 히히."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잘 먹는 거 아닌가.
정말 양심에 쪼금 찔리는 거 같았다.
"운호,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캐리는 캠프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뉴스들을 가지고 왔다.
"필립과 험프리가 사람을 구해왔어. 호수에서 떠다니고 있던 웬 남자를 구출했다는데…."
남자라는 말에 관심이 팍 식었다.
".......그렇군."
"필립은 그 남자를 우리 그룹에 받아들일 생각인 거 같던데 어떻게 생각해?"
"내 생각이 중요한가?"
"운호도 초능력자잖아. 발언권은 있지 않을까?"
그 필립이 잘도 내 말을 들어주겠다.
솔직히 얻을 것도 없는 캠프의 관리에 크게 관심이 없기도 했다.
*
*
*
운호에게 피자를 얻어먹은 캐리는 배를 통통 두드리며 귀가? 길에 올랐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능력을 갖춘 사내였다.
그가 처음 허공에서 음식을 꺼내는 능력을 보였을 땐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보급품을 챙기는지도 알 수 있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밝히는 비밀이란다.
캐리는 그의 신뢰를 받는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물론 그의 비밀은 지켜줄 생각이었다.
그는 상당히 능력이 있는 사내였다.
그리고 여자가 능력 있는 사내에게 끌리는 건 당연했다.
그건 캐리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섬 안에 괜찮은 남자가.......없었다.
캐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은 있었지만, 눈에 차지는 않았다.
그런데 운호가 나타났다.
나이 차이는 좀 있어 보였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초능력뿐만 아니라 그의 탄탄하고 듬직한 사내 냄새 물씬 풍기는 육체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의 집을 올 땐 일부로 노출이 있는 옷을 입기도 했다. 그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탐나네…."
캐리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훑었다.
안타깝게도 운호는 그레이스를 노리고 있었다.
"그레이스도 아주 마음이 없는 거 같지는 않고.....친구의 남자를 뺏고 싶지는 않은데....아직 사귀는 건 아니니....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아이....고민이네."
*
*
*
다음날.
"환영 파티?"
평화로운 어스름한 저녁.
캐리가 방문했다.
"운호도 했잖아. 환영파티."
"누가 왔나?"
"에휴. 어제 말했잖아. 필립이 호수에서 구해온 남자."
그렇게 말하니 생각이 났다.
남자라고 해서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우고 있었다.
"굳이 나가야 하나?"
남자 놈의 환영파티 따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같이 나가서 놀자~"
캐리가 내 팔을 끌어안고 애교를 부린다.
그녀의 폭신한 가슴이 내 팔뚝을 압박한다.
"크흠.....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어쩔 수 없지."
결국 캐리의 유혹에 못 이겨 환영파티에 참석하게 됐다.
내가 처음 왔을 때와 같은 커다란 캠프파이어가 공터 중앙에 타오르고 있었다.
필립이 보였고 옆에 젊은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남자 녀석의 얼굴은.....곱상하게 생겼다.
.........여자들이 환장할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잠깐 주목해 주십시오."
필립이 똥폼을 잡고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들도 소식은 들으셨을 겁니다. 저와 험프리가 호수에서 구해온 청년. 에드워드 모건입니다. 그를 우리 그룹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혹시 반대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다수결을 하는군. 라떼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운호는 초능력자잖아. 그는...일반인이고."
옆에 있던 캐리가 설명해 줬다.
"........일반인이라고?"
"어. 내가 말 안 했나?"
초능력자인데 힘을 숨긴다라….
누가 봐도 수상했다.
나는 손을 들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필립은 손을 든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박....운호? 이유는?"
필립은 내 의견 따위 무시하고 진행하고 싶었을 거다. 그래도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지 내 의견을 묻는다.
"이유? 수상해서."
".......수.....상하다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필립은 나를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 수상해서 반대한다. 뭐......어차피 반대는 나 혼자인 거 같군. 내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고 해도 불만은 없어. 그래도 내 의견 정도는 말할 수 있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렇군…."
필립은 내게 뭔가 할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거 같지만 참는듯했다.
"박운호! 외에는 반대하시는 분.......은 없는 것 같군요. 그럼 그를 우리 그룹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역시 민주주의 국가다.
-짝짝짝.
이어서 에드워드 모건이 말했다.
"저를 구출해주신 필립, 험프리 님에게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이 그룹에 절 받아주신 여러분들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마음에 안 드는 분도 계신 거로 압니다."
그러면서 나를 바라본다.
눈퉁이를 밤탱이로 만들어 주고 싶은 느끼한 눈이었다.
"그분에게도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좋은 그룹구성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에드워드는 일장 연설을 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생존자들과 인사를 했다.
"운호, 혹시...그레이스가 저 남자에게 넘어갈까 봐 그러는 거야?"
캐리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어봤다.
"......아니다."
속 좁게 그런 이유가 아니라 진짜 수상해서 반대했을 뿐이다.
에드워드는 초능력자다.
그걸 밝히면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데 그걸 숨기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걸 말한다고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레이스나 캐리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녀들도 반신반의하지 않을까?
그나마 믿을 사람은 레이첼 정도?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여론을 움직일 만한 힘이 없다.
에드워드란 놈이 능력을 발현해야 믿을 거다.
그런데 녀석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강제로 발현하게 해야 하는데 그러면 다소 과격한 방법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걸 용납할 리도 없었고….
나도 이들을 귀찮게 설득할 생각도 없었다.
이 정도면 해줄 만큼 해준 거다.
'그래도 나중에 그레이스랑 캐리에게는 수상한 놈이라고 말해줘야지.'
"에드워드는 아마.....그레이스의 스타일은 아닐 거야."
그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남녀 일은 모르는 거지."
"뭣!?"
"에이. 운호. 그렇게 실망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혹시 그레이스에게 버림받는다면…."
".....?"
"나는....어때?"
눈을 치켜뜨고 나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펴보는 캐리.
그녀의 살짝 달아오른 볼이 보였다.
캠프파이어에서 일렁이는 불꽃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그녀가 은근슬쩍 내게 기대왔다.
그 순간 나는 빠르게 감각을 퍼트려 그레이스를 서치했다.
그녀는 꽤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안심하고 캐리를 살포시 감싸 안으려던 순간.
"캐리."
니미….
욕이 육성으로 튀어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에이, 뭐야 필립. 좋은 분위기였는데!"
그러게, 이놈이 지금 어떤 순간이었는데 눈치도 없이!
".........미안, 박운호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게 있어서 그래."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필립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아니다.
"쳇!"
캐리가 필립에게 눈을 흘긴다.
"난 이야기 할 게 없는데…."
당연히 나도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박운호.....중요한! 할 말이 있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자."
어금니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는 필립.
조용한 곳….
바라던 바였다.
이놈이 오냐오냐해주니까.
오늘 캐리와 좋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는데….
아무리 그녀의 오빠라고 해도......이번만은 선을 넘은 짓을 했다.
좋은 기회였다.
이참에 이놈의 시스콘 버릇을 고쳐놓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
*
*
녀석은 나를 으슥한 창고 뒤쪽으로 데려왔다.
"간단히 말하겠다. 캐리와 가까이 지내지 마라."
"필립.....남의 연애사에까지 관여하다니.....선 넘는 짓 아닌가?"
"........너 그레이스에게 마음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있지."
"뭐!? 그러면 지금 하는 짓은 뭐지?"
"뭐긴.....썸타는 거 처음 봐?"
".......난 네가 무슨 짓을 한지 알고 있어. 그리고 레이첼과의 관계도 알고 있지."
"레이첼?"
"그래, 난 네가 레이첼과 깊은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레이첼은 늦은 밤에 찾아온다.
이곳 사람들은 보통 어두운 밤에 바깥은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걸 보고 있었다는 거다.
이놈….
"레이첼......스토커였나?"
"아니다! 네놈을 감시한 거다!"
필립이 정곡을 찔렸는지 발끈한다.
"이제는 진짜 보안관도 아니면서 무슨 감시야. 스토커지."
"자꾸 캐리에게 찝쩍거린다면 네가 레이첼과 잠자리까지 하는 깊은 관계라는 것을 밝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