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1화 (220/259)

"별거 아니네!"

운전하던 캐리가 우쭐해 하며 말했다.

"오늘은 잘 풀린 거다."

옆에 있던 필립이 들떠있는 캐리에게 주의를 줬지만, 그녀는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 모양새였다.

"아, 필립, 다음에도 운호랑 보급을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아, 참고로 허락받는 게 아니야. 네 허락이 아니라 운호의 허락만 있으면 되거든."

"하아…."

필립 녀석은 골치 아픈 듯 이마를 누르면서 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분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다른 각성자들이야 동생인 캐리를 보급에 데려가지 말라는 필립의 부탁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 갈 테지만, 나한테는 아니다.

만약에 내가 캐리의 부탁을 거절했으면 그녀가 나를 믿고 따라 나오지도 못했을 거다.

동생을 위험한 곳으로 데리고 나다니려는 내가 고깝게 보일 수 있겠다.

.........나는 내게 적대적인 필립을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기로 했다.

*

*

*

평소의 몇 배는 될법한 물건들을 싣고 섬에 도착하자 대량의 보급품에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캠프 안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짐을 옮겼다.

옷가지를 옮기던 여자 하나가 비틀거리더니 내게 부딪쳐 엉덩방아를 찧었다.

자연스레 내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옅은 갈색의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었다.

'이름이....레이첼이었던가?'

내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레이첼이 미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 섬의 3대 미녀 중 하나다.

물론 3대 미녀는 내가 멋대로 붙인 거다.

내가 일주일 동안 여기서 허송세월만 한 게 아니라는 거다.

섬 안의 여자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3대 미녀를 뽑았다.

그레이스, 캐리, 레이첼.

이렇게 세 명이다.

릴리아나가 이런 내 모습을 봤으면 한심하게 쳐다보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레이첼, 그녀는 유부녀였다.

꼬맹이 딸도 하나 있었다.

이 섬의 미녀가 레이첼 한 명뿐이었다면,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기 위해 도전해볼 가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섬에는 그녀뿐만 아니라 그레이스와 캐리가 있었다.

괜히 레이첼을 건드렸다가 그녀들의 호감도가 나락을 갈 수도 있다. 그래서 과감하게 레이첼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미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저앉아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보고 그녀가 움츠린다.

그건 마치 내게 맞지 않기 위해 몸을 보호하는 듯했다.

그녀의 눈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행동에 그냥 머쓱해졌다.

"........괜찮나?"

"예, 예. 죄, 죄송합니다."

레이첼은 자신이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이 조금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내 손을 조심스레 잡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레이첼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볼이 약간 부어있었다.

넘어져서 생길 수가 없는 흔적이다.

그녀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 물건을 들고 캠프 쪽으로 멀어져 갔다.

쩔뚝이는 게 다리도 안 좋은 거 같았다.

방금의 일로 그런 건 아니다.

전에 종종 봤을 때도 어딘가 몸이 안 좋은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

"그녀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어."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옆으로 다가온 그레이스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버려 두는 건가?"

레이철이 불쌍하다기보다 그냥 순수한 궁금함에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그레이스가 그것을 가만히 둘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고, 레이첼의 남편이 초능력자도 아닐 테니, 마음먹으면 처리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분리는 하려고 시도는 했는데....그녀가 원하지 않았어. 결국 경고 정도만 하고 있지."

분리….

나였으면 남편 놈을 어딘가 묻어버렸을 테지만, 그레이스는 그 정도로 강하게 처분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직 현대인의 때가 벗겨지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뭐.....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남의 가정사야 복잡한 문제니 내가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다.

게다가 본인이 싫다고 하면 뾰족한 답이 없다.

중간에 낀 인간만 이상한 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일은 내 기억 속에서 잊히는 듯했다.

*

*

*

늦은 저녁.

폭우가 쏟아졌다.

다행히 지붕에 물은 새지 않았다.

"레이첼!!"

남자의 고함이 들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폭우에 잘 들리지 않았을 소리다. 그리고 레이첼의 집이 내 옆집이라는 것이 컸다.

그냥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 고함에는 험악한 분위기가 섞여 있었다.

호기심에 감각을 확장해 그 집안을 살펴봤다.

"가, 가요!!"

남자는 전형적인 험악한 얼굴에 하얀 러닝 한 장과 사각팬티 한 장 입고 있었다. 근육질은 아니지만 살아올라, 180cm는 될법한 커다란 체구의 남자였다.

'저놈이 레이첼의 남편인가?'

저놈을 보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런 놈이 레이첼의 남편이라니.

내가 남자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하긴 남자는 아는 녀석들이 몇 없긴 하지.'

레이첼은 폭우 속에 밖에 있던 건지 옷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이, 개 같은 년.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모, 목욕물 채우라고 하셔서…."

"이 년이 넙죽 엎드려 죄송하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이게 말대꾸해?"

풀스윙 따귀가 그녀의 볼을 강타했다.

-철썩!

따귀를 맞은 그녀는 휘청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놈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그런 그녀의 등을 밟고 발로 찼다.

레이첼은 놈에게 맞으면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왠지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다.

그리고 한쪽을 바라보며 뭐라 중얼거렸다.

(괜찮아. 거기 가만히 있어. 괜찮으니까.)

그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집구석에 열두세 살은 되어 보이는 여자 꼬맹이 하나가 귀를 막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꼬맹이의 눈은 엄마처럼 그렇게 공포에 질려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빠라고 할 수 있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무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여자 꼬맹이가 몸을 일으켰다.

꼬맹이의 얼굴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엄마가 맞는 모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거 같았다.

"엄마를 때리지 마!!"

꼬맹이는 아빠를 향해 달려가 그의 허벅지를 물었다.

엄마보다 딸이 더 나았다.

"윽!"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놈의 험악한 시선이 꼬맹이에게로 향했다.

"레이첼, 이 개 같은 년! 애새끼 교육을 어떻게 시켜서! 감히 아빠한테 대들게 해?!"

사내가 꼬맹이의 머리채를 잡고 험악하게 들어 올렸다.

"아악!!"

꼬맹이는 머리채만으로 들어 올려지니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이 새끼, 내가 대신 교육을 해주마!"

그렇게 말한 사내가 머리채를 잡고 꼬맹이를 주먹으로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퍽! 퍽!

"컥! 컥!"

"도, 도로시!!"

무자비하게 딸이 폭행당하는 모습에 레이첼이 놀라 남편의 팔을 잡았다.

"이 개 같은 년아!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는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잘 해야 해! 네년 때문에 내가 이렇게 손수 교육해야겠냐!!"

"죄, 죄송해요. 제, 제발 도로시는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머리채를 잡고 자기 딸을 때리려는 아빠.

딸을 때리지 못하게 남편의 팔을 잡고 매달린 엄마.

아빠에게 머리채를 잡혀 울부짖는 어린 딸.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이 캠프 인간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건가?

몇 달을 같이 살았는데?

그레이스는 레이첼의 남편이 폭행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분리를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레이첼이 거부했고.

남편이 더한 해코지를 할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감에 그랬을 수도 있다고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지만.......당연히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아니.......저놈이 지능적인가?'

하는 짓을 보니 때리는 것도 얼굴보다는 몸 위주로 때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곳에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지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소란스럽지 않았다.

마침 폭우도 쏟아진다.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 걱정도 없으니 작정하고 활개를 치는 거 같았다.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팬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거였나? 남들 모르게 마음대로 팰 수 있다는?

난폭해 보여도 생각보다 약은 놈일지도 모른다.

의외로 캠프의 인간들이나 그레이스는 이 심각함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하긴 나도 오늘 일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테니.

참견해야 하나?

"뭐....시끄럽기도 하고…."

가볍게 손 좀 봐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살의를 불러일으킨다는 층간소음과 같다.

손 좀 봐주다 좋지 않은 곳에 부딪혀 재수 없게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일이고….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상황이 급변했다.

"그래, 오늘 제대로 살풀이 한번 해보자!"

사내가 머리채를 잡고 있던 꼬맹이를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퍽!

"켁!"

-털썩….

꼬맹이가 탁자 모서리에 뒤통수를 부딪치고 그대로 쓰러지며 머리를 시작으로 흥건한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도, 도로시!"

그 모습을 보고 창백하게 질린 레이첼이 딸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살펴본다.

"후....징징거리더니 이제 좀 조용해졌군."

레이첼의 남편 놈은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표정이다.

"여, 여보. 도, 도로시가 수, 숨을 안 쉬어요!"

"뭐, 뭐? 시발.....귀찮게 됐네....재수 없으면 여기서 쫓겨나게 생겼는데.....호수에 버리면 어딘가 흘러가지 않을까. 레이첼 호수에 버리고 와. 누가 물어보면.....그냥....나가서 안 들어왔다고 하고."

"그, 그걸 말이라고 하는 소리예요?!"

언제나 불안하고 공포에 질려있던 레이첼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라있었다.

그 모습을 본 놈이 움찔한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레이첼 따위에게 움찔했다는 사실이 화가 나는 듯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주먹으로 후려쳤다.

-퍽! 퍽!

"이년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남편 놈의 폭력에 레이첼은 도로시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맞으면서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안해. 도로시....미안.)

사내는 주먹이나 발길질로는 성이 풀리지 않는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의자를 집어 들어 레이첼을 후려쳤다.

"으윽!"

"이 씨벌 년. 네 새끼와 같이 천국으로 보내주마!"

내 잘못은 아니지만.....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괜히 찜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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