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0화 (219/259)

내가 그 말을 하자 필립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아마도 그레이스에게 가지 않을까.

내 예상대로 라면 그녀는 나와의 동행을 거부하지 않을 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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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운호의 건의?를 들은 필립은 그레이스를 찾았다.

필립은 그레이스가 박운호의 요구를 들어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놈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그래, 이번 일도 있고.....초능력자 한 명만으로는 안전하다고 볼 수 없겠어. 운호의 말대로 이제는 한 명 말고 두 명씩 가자."

"......"

그레이스의 의견에 필립은 말문이 막힌 듯 침묵했다.

"내가 그와 둘이서 움직일게. 한번 나갈 때 좀 더 많은 보급품을 가져오고 보급 텀을 늘리자."

그레이스는 운호가 물건을 수납할 수 있는 신기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다.

운호는 자기 능력을 비밀로 하길 원했다.

그가 다른 사람과 조를 짠다면 그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운호와 조를 짜는 것이 그의 능력을 활용해 상당량의 보급품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필립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허탈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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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안에서 일주일을 어영부영 보냈다.

그동안 섬 안의 사람들과 그럭저럭 안면도 익히고......특히 그레이스와 캐리, 그녀들과 친목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필립 녀석이 그런 내게 감시의 눈길을 보내긴 했지만 무시했다.

섬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재밌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간만에 휴식이기도 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자고 먹는 시간 빼고는 까망과 함께 날아다니면서 삭막한 시간을 보냈다.

섬 안의 생활이 심심하다고 해도 나한테는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는 즐길 것이 많다.

오래간만에 느긋하게 게임도 하고 영화도 봤다.

그렇게 뒹굴고 있으니.

금빛 단발을 한 푸른 눈의 미녀 보안관이 찾아왔다.

그레이스였다.

"데이트?"

그레이스가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보급 데이트야."

그레이스와는 그동안 농담할 정도로 조금 친해진 상태였다.

오늘은 내가 보급하러 가는 날이다.

결국 내 생각대로 그레이스와 함께 보급을 하러 가게 됐다.

그녀와 함께 선착장에 도착하니.

캐리가 환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본 그레이스가 놀라 물었다.

"메튜와 험프리는 어디 가고....캐리, 네가 있는 거야?"

"오늘은 내가 서포트 하기로 했어!"

"너......필립은 알고 있는 거야?"

"필립이 내 아빠도 아니고......운호는 허락했다고."

말 안 하고 그냥 왔다는 이야기다.

나야 귀여운 미녀가 따라온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그레이스가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안전은 내가 책임지지."

"운호 최고!"

캐리가 내 팔을 끌어안고 방방 뛰며 좋아한다.

팔뚝에 캐리의 말랑한 가슴이 기분 좋게 압박해 왔다.

"하아.....필립이 알면 난리 나겠군."

그레이스가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녀와 반대로 나는 이 사실을 알고 길길이 날뛸 필립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미녀 둘과의 보급.

나쁘지 않은 시츄에이션이다.

그때였다.

"캐리!"

날카로운 사내의 외침.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멀리서 헐레벌떡 빠르게 뛰어오는 보안관이 보였다.

"칫! 눈치는 빨라서."

필립의 얼굴을 본 캐리가 혀를 찬다.

"캐리, 뭐 하는 짓이야!"

가까이 다가온 필립이 캐리에게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긴 보급 나가려고 하지."

필립은 나와 캐리를 번갈아 본다.

캐리는 아직 내 팔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필립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에서 불똥이 튄다.

그리고 그는 나와 캐리를 억지로 떼어놓았다.

"뭐, 뭐 하는 거야.....필립."

"캐리, 그와는 가까이하지 마라."

그 말을 들은 캐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하.....필립....참나, 이제는 내 인간관계에까지 참견할 셈이야?"

"뭐?"

여동생의 강한 반항에 필립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 안전을 생각해서 지금까지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던 건 백번 이해해. 하지만 내 인간관계에 까지, 터치하는 건 너무한 거 아냐? 내가 어린애야?"

"그, 그건…."

필립은 말문이 막힌듯했다.

'잘한다. 캐리. 넌 할 수 있어. 저 시스콘에게서 독립하는 거다.'

나는 마음속으로 캐리를 응원했다.

"둘 다 그만해. 필립, 캐리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녀도 성인이야. 이번 건은 네가 심했어."

그레이스가 험악해지는 남매를 중재하며 캐리 편을 들었다.

"맞다. 필립 네가 심했다. 캐리에게 사과해라."

은근슬쩍 나도 꼽사리 껴서 한마디 거들었다.

"......"

필립은 이를 악물며 나를 험악하게 노려봤다.

겁을 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짓이다.

결국 필립 녀석은 우리와의 동행을 선택했다.

동생이 걱정이 된 건지 아니면 그레이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요트의 운전은 캐리가 했다.

그녀에게 물어보니 세상이 좆망 하기 전에 배웠단다.

캐리의 얼굴은 굉장히 신이나 있었다.

오래간만에 섬 밖으로 나간다는 설렘 때문일까.

배를 섬 건너편 캠프 선착장에 정박하고 픽업트럭에 옮겨타려던 그때.

필립 녀석이 괴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앞을 탈지 뒤를 탈지 상당히 고민하고 있었다.

운전은 캐리가 한다고 하고 그레이스는 먼저 뒷좌석에 탔다.

나를 어느 쪽에도 앉히고 싶지 않은 필립 녀석의 생각이 고스란히 느껴져 꽤 웃겼다.

'참나, 이놈 어이없군. 내 옆에 앉으면 임신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시스콘에 짝사랑.

하는 행동을 보니 이건 병이나 마찬가지였다.

필립은 질투심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선택은 결국 앞자리였다.

짝사랑보다는 가족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었다.

*

*

*

우리가 도착한 곳은 린턴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주차한 차를 보고 달려오는 좀비들은 필립과 그레이스가 가볍게 처리했다.

캐리는 좀비를 보고도 그렇게 무서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가 상대해 봐도 되냐고 말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필립이 기겁하면서 말렸다.

캐리는 성격 자체가 꽤 대담해 보였다.

저런 성격 때문에 필립이 섬에서 나오지 못하게 한 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할까. 같이 움직일까?"

각자 장비를 착용한 후에 필립이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따로 움직이자. 나랑 운호가 함께 움직일게."

그레이스의 말에 필립이 흠칫한다.

"필립, 넌 혼자 움직이는 게 어때. 캐리는 이쪽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거 같은데."

나는 필립 녀석이 떨어져 나가기를 원했다.

미녀들 사이에 녀석은 옥에 티였다.

게다가 내 사심은 둘째치고, 각성자가 둘 있는 쪽에 있는 것이 안전한 게 당연하다.

"......캐리는 나와 함께 간다."

필립은 내 말을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거절했다.

캐리의 안전을 위해서는 내 의견이 합리적임에도 녀석은 질투에 정상적인 판단을 못 하고 있었다.

"쳇! 난 운호랑 같이 가고 싶은데."

캐리가 투덜댔지만, 필립은 그녀의 의견을 묵살했다.

그녀는 그래도 섬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은지 필립에게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그의 의견을 따랐다.

우리는 캐리 일행과 헤어져 종종 튀어나오는 좀비 놈들을 처리하며 마을 탐색을 시작했다.

"운호, 그 초능력에는 물건을 얼마나 넣을 수 있는 거야?"

그레이스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녀 입장에서 내 인벤토리의 저장용량은 중요하다. 그에 따라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물건을 가져갈 수 있는지가 결정됐으니 궁금한 게 당연했다.

"부족할 일은 없을 거다."

"그건....대단하네."

「그레이스, 식료품점을 찾았어.」

필립에게서 무전이 왔다.

"알았어. 필립. 우린 다른 물건을 찾아볼게."

그레이스는 필립의 무전에 그렇게 대답하고는 탐색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녀는 한 상점의 옷 가게로 들어갔다.

옷 가게의 문은 잠겨있었지만, 문고리를 부수는 건 각성자인 그녀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옷?"

"응, 거주지에 그다지 넉넉한 편은 아니거든. 슬슬 추워질 때기도 하고........보급할 때 챙긴다고 해도 다른 물건 때문에 넉넉히 챙기기도 힘들고.....괜찮겠어?"

옷이 꽤 부피가 나가니 그게 걱정인 모양이었다.

"이곳에 있는 옷 다 넣어도 상관없어."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는 능력 있는 남자라는 것을 마음껏 어필해야 한다.

"정말?.....도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글쎄 자세히 재보지는 않아서 모르겠군."

내 말을 듣고 그레이스는 신이 난 듯 옷 가게 뿐만 아니라 건물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괜찮은 물건을 내 인벤토리에 쓸어 담았다.

좀비 놈들이 가끔 튀어나왔지만 내가 나서지 않아도 그레이스 혼자만으로 충분했다.

챙길 만큼 챙긴 우리는 세워둔 트럭으로 돌아와 짐칸에 물건들을 잔뜩 실었다.

그렇게 하고도 인벤토리에 남아있는 물건은 나중에 그레이스가 창고를 열어줄 테니 그곳에 몰래 넣어달라고 했다.

굳이 능력을 숨기지 않아도 되지만, 그레이스와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는 둘만의 비밀로 하는 것이 나을 거 같았다.

"이게 뭔…."

나름 식량을 잔뜩 짊어지고 온 캐리 일행은 짐칸에 잔뜩 실려있는 물건들을 보고 경악했다.

"와.......그레이스 그사이 이걸 다 챙긴 거야?"

"운호 덕이야."

그레이스가 내 등을 두드리며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필립을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당연히 녀석은 뭐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와 그레이스가 구해온 물량과 비교하니 필립이 메고 있는 배낭이 초라해 보였다.

이 정도 성과를 보여줬으니 필립도 이제는 다른 소리는 하지 못할 거다.

짐칸에 과할 정도로 든든하게 실은 물품을 가지고 돌아가는 차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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