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8화 (217/259)

얼굴에 의구심이 한가득이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표정이다. 나도 굳이 녀석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제대로 대답해 줄 생각이 없군. 수상해....그레이스는 몰라도 날 속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의심되는 행동은 하지 마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만약에 네가 위험한 행동을 한다면…."

그러면서 권총을 은근슬쩍 어필하는 필립.

"......"

이놈이 제정신인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해를 해줘야 했다.

그레이스나 필립, 그들은 아직 각성 능력의 성장이 총이 통하지 않는 초인의 단계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경지가 높아진 각성자가 얼마나 강해지는지 모른다.

그러니 권총을 한 자루 들고 위협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거다.

둘의 긴장? 은 그레이스가 다가오면서 풀렸다.

"둘이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그냥…."

필립은 얼버무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레이스는 선실로 들어가는 그를 슬쩍 보고는 내게 물었다.

"운호, 그 창은 어디 갔나요?"

"그 창?"

"네 당신이 가지고 있던 커다란 창."

"잘 가지고 있지."

아까 트럭 뒤에 타고 오면서 인벤토리에 넣어놨다.

"아까 선착장 어딘가에 숨겨놓은 건가요?"

그녀에게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보여주고 다시 집어넣었다.

"왓? 어, 어떻게 한 건가요?"

"초능력."

"이, 이런 초능력도 있었군요. 아, 당신이 따로 짐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도 그 능력 때문이겠군요!"

"....뭐.....그렇지. 그레이스 널 믿고 알려주는 거야.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군."

"아, 알았어요. 저를 믿어줘서 고마워요."

그레이스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그녀가 떠들고 다녀도 큰 상관은 없었다.

그냥 그녀를 믿는다는 나름의 작업 멘트였다.

요트는 내 예상대로 섬의 선착장에 정박했다.

〚사파이어 아일랜드 여름 캠프〛

선착장 입구에 조금 낡은 아치형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들은 몬스터들을 피해 섬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좀비 정도야 피할 수 있겠지만 진짜 강력한 괴물들한테는 안될 텐데….'

그렇다고 그걸 굳이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지금 이들에게 이방인이다.

믿어줄 리도 없고 굳이 설득할 생각도 없었다.

선착장에 몇몇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일행이 배에서 내리자 가족인지 모르겠지만, 서로 포옹하며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레이스!"

그레이스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레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진한 긴 갈색 머리를 가진 쾌활해 보이는 미녀가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기쁨과 안도의 표정이 서려 있었다.

"캐리."

그레이스도 그녀의 이름을 반갑게 부른다.

둘은 가벼운 포옹을 했다.

간만에 미녀를 연이어 보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이곳은 내 생각보다 괜찮은 피난처다.

그리고 따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너무 하늘에서만 생활한 거 같다.

이곳까지 까망이를 타고 오면서 너무 대충 훑어봤는지 모르겠다. 이제 한곳에서 자리를 잡고 진득하게 주변을 살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사람은 역시 대지에 발을 디디고 살아야 한다.

"그레이스 이 사람은?"

나를 발견한 캐리가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아, 캐리. 이분은 날 구해주신 분이야. 운호 박. 그는 강력한 초능력자야."

"오! 당신도 슈퍼 히어로였군요! 반가워요. 저는 캐리 맥브라이드예요. 캐리라고 불러줘요."

"나도 반갑군. 운호라고 불러."

"운호. 캐리는 필립의 동생이에요."

그레이스가 추가설명을 해줬다.

필립 녀석....다시봤다.

한참 저 밑에 있던 필립 녀석의 호감도가 평균치까지 올라왔다.

"운호! 키가 굉장히 크군요. 몸도 좋고, 농구선수였어요? 아니면 풋볼?"

"아니, 난 헌터다."

활달하고 호기심이 많은 여자인 거 같았다.

"헌터? 특이하긴 하지만 운호에게는 왠지 그것도 어울리네요. 우리와 함께하기로 한 거예요?"

"그래."

"그럼 지낼 곳이 필요하겠네요. 운호. 어때요. 제가 안내해줄까요?"

나야 당연히 오케이였다.

하지만 그때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캐리. 그건 내가 할 테니까 넌 다른 곳으로 가봐. 저녁 준비도 해야 하잖아."

이놈이….

"필립. 정말 이럴 거야? 저녁 준비야 운호 안내하고 가도 된다고!"

"미안, 박은 내가 안내할게."

오빠 놈의 저지에 캐리는 화가 난 듯했지만, 필립 녀석은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이놈......시스콘이었나.'

필립이야 나를 경계하고 있으니 동생과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은 거다.

그렇다고 해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퍽!

내 마음을 읽은 건지 캐리가 필립의 정강이를 찼다.

"윽!"

"흥!"

그녀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운호. 필립이 거처로 안내해줄 거예요. 저도 볼일이 있어서. 그럼 이따가 봬요."

안타깝게 그레이스도 그렇게 떠났다.

"그럼 따라와라."

필립이 정강이를 비비면서 앞장을 섰다.

아무리 캐리의 오빠라도 이놈은….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두 미녀를 생각해 참았다.

선착장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자 가운데 커다란 공터와 그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 목재로 된 집들이 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필립은 그 집중에 한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네가 지낼 곳은 여기다."

당연히 안쪽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2층 침대가 몇 개 있는 것이 원래는 여러 명이 자던 단체 숙소 같이 보였다.

"그레이스의 집은 어디지?"

"네가 그걸 왜 묻지?"

"왜기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으니 그렇지."

"설마, 너 그레이스 때문에 여길 따라온 건가?"

필립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연하지. 혹시 그레이스 애인이라도 있나?"

애인이 있다면 조금 곤란했다.

결국 필립 놈은 내 질문에 대한 대답도, 그레이스의 집도 알려주지 않고 떠났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반응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필립은 그레이스에게 마음이 있다.

다행히도 지금은 아무 관계도 아닌 것 같았다.

만약에 가까운 관계였으면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시점에서 진작 말이 나왔어야 했다.

'쪼잔한 놈.'

*

*

*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험프리스의 사령관 다니엘은 세종시 생존집단에 대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거주지에 대한 정보수집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경계심도 크게 없었다.

전기와 통신, 수도의 공급은 물론, 괴이한 상점까지 운영이 되고 있었다.

게다가 험프리스 사람들에게까지 상점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해줬다.

테일러 스미스 중령의 정찰을 통해 백설화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그 후 험프리스의 사람들은 지금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대부분이 마석을 구하기 위해 청주의 몬스터 사냥에 투입되고 있었다.

그들이 마석을 원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 알아냈다.

그들이 사용하는 전기나 수도가 마석을 이용해 공급하는 거란다.

게다가 그 우노 상가라는 건물에 있는 상점들.

오버 테크놀로지의 물건들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어딘가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는 수수께끼의 리더, 박운호가 혼자의 힘으로 이뤄낸 것이란 거다.

다니엘은 이쯤 되면 그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윌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나는 그가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한다네. 아니면 그의 뒤에 거대한 세력이 있는 건가?"

"그가 외계인이든 거대한 세력의 하수인이든 간에 현재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리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라고 하고.....그것보다 우리도 그 발전기라는 것과 물 공급 장치를 어떻게 얻을 수 없겠나?"

험프리스 캠프의 인원은 상당하다.

그나마 지금은 청주에서의 사냥과 세종 생존집단에 구걸? 을 해가며 사정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역시 아직 식량이나 식수의 공급이 원활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의 자비로운 성향을 보면 이야기해볼 가치는 있습니다."

"그 백설화라는 여자와의 자리를 마련해 보게."

"알겠습니다."

다니엘의 지시를 받은 부관 월터는 생존자 집단과 접촉해 백설화와의 자리를 빠르게 마련됐다.

"마력 발전기와 물 공급 장치를 얻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백설화에게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녀와는 첫 대면이었다.

테일러에게 어리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어리게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생존자 집단을 관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다니엘의 요구에 백설화는 침묵했다.

'무리한 요구였나?'

그녀의 표정 변화는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다니엘과 월터는 긴장하며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긴 침묵은 아니었다.

백설화의 입이 열렸다.

"제가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낭군님께 여쭤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그분과 연락이 가능하신 겁니까?"

"네. 먼 곳에 계시지만 연락은 가능합니다."

*

*

*

거처를 정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인벤토리로 쓸데없어 보이는 것을 집어넣어 치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공간을 만들고 한쪽에 내 고급 침대를 놓았다.

영웅의 안식처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안식처에서는 밖의 상황을 알 수가 없다.

그 사이 그레이스가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다.

저녁 먹을 때가 되면 부른다고 했다.

그동안 시간 좀 때울 겸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멍하니 낡은 목재로 된 천장을 바라봤다.

'이거 비 새는 거 아냐?'

비가 한창 올 계절은 지났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육체 강화 스킬은 8레벨에 올라섰다.

키도 눈곱만치 크고 이제 심장에 자리 잡은 마력 코어는 이제 심장 크기에 육박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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