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7화 (216/259)

"너무 정신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군요. 저는 그레이스 앤더슨이라고 해요. 그레이스라고 불러줘요. 제 목숨을 구해줘서 고마워요."

그레이스가 자기소개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난 박운호다. 음.....이곳에서는 운호 박인가?"

그러면서 박운호의 두툼한 손이 그레이스의 손을 잡았다.

"대단한 능력자시군요."

"뭐, 그렇지."

박운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 자신감만큼 강인한 사내라는 느낌을 물씬 받았다.

"미스터 박. 혹시 일행이 있나요?"

"아니, 나 혼자다. 그냥 운호라고 불러."

사내의 혼자라는 말에 그레이스는 잠시 생각하는듯하더니 말을 꺼냈다.

"알았어요. 운호. 어때요. 저희와 함께하지 않을래요?"

"그레이스!"

필립이 놀라 소리쳤다.

"괜찮아 필립. 그는 강한 초능력자야. 그가 악인이었으면 나를 구해줄 리도 없었을 거야."

"그, 그건…."

필립도 알고 있다.

그레이스가 그를 왜 그룹으로 끌어들이려는지.

초능력자가 많아질수록 그 집단은 생존율이 올라간다.

지금의 그룹만 해도 원래는 초능력자가 그레이스와 필립 둘뿐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한 명이 각성해 셋으로 늘어나면서부터 보급도 그렇고 훨씬 활동하기 편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중요한 일을 너 혼자 결정하는 건…."

"미안, 그가 상당히 강력한 능력자로 보여서 붙잡고 싶은 마음에 그랬어. 그리고 필립 너무 앞서가는 거 아냐? 그는 아직 오케이 하지 않았다고?"

두 사람의 시선이 박운호에게 향했다.

박운호의 시선은 그레이스에게 못 박혀있었다.

그의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에 그레이스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내, 내가 왜….'

그레이스는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감추려 애썼다.

"좋아. 그레이스. 너를 믿고 따라가지."

"환영해요! 저희의 그룹에 들어온걸!"

"잠깐."

"음? 왜 그래 필립."

그레이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레이스, 난 아직 그를 믿을 수 없어."

"필립!"

"이해해줘. 그레이스, 이건 우리 그룹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야. 그래...그냥 몇 가지 질문만 할게."

필립이 그렇게 말하니 그녀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운호, 미안해요. 필립은 우리 그룹의 안전을 위해서 저러는 거니 이해해줘요."

"이해한다."

다행히 박운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듯했다.

필립이 박운호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있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박운호.

그레이스와 필립은 흠칫했지만 큰 동요는 없었다.

이런 세상에 저런 힘을 가지고 살인 한번 해본 적 없다는 게 더 말이 안 됐다.

상당한 겁쟁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봐도 그런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몇이나 죽였습니까?'

"셀 수 없지."

"뭐?!"

필립과 그레이스 둘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래도.......아직까진 죽인 사람보다 구해준 사람이 더 많을 거다."

박운호의 이어지는 그 말에 그레이스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필립은 완전히 납득 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하던 박운호는 그저 무덤덤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박운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떼자 그레이스와 필립이의 문에 찬 눈빛으로 박운호를 바라봤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거 같은데."

"운호, 그건 무슨 소리…."

그레이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으적!

담벼락이 무너지며 괴물 크로커다일이 나타났다.

죽어 나자빠져 있는 놈 정도의 크기는 아니다.

새끼인지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작았다.

죽은 놈과 비교해 작다는 거지 웬만한 인간은 손쉽게 씹어먹을 만큼 컸다.

게다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으직! 으직!

주변의 담을 부수며 괴물 크로커다일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그것을 본 두 사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때 박운호가 괴물 크로커다일을 일격에 죽인 거대한 창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운호?"

"그레이스, 어느 쪽으로 가면 돼지?"

"저, 저쪽…."

"그럼, 잘 따라오라고."

"예?"

박운호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곳에는 괴물 크로커다일 들이 몰려있었다.

"운호!"

박운호의 그 무모해 보이는 행동에 그래이스가 놀라 소리쳤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박운호가 창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괴물 크로커다일이 말 그대로 날아가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창에 은은한 검은 빛이 감돌고 있다는 거다.

"왓더…."

"안 따라와?"

운호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가, 가요. 필립 가자."

"어? 어어!"

박운호의 신위를 보고 놀란 둘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박운호의 놀라운 능력에 힘입어 셋은 괴물 크로커다일 무리의 포위망을 무난하게 뚫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뒤로는 크로커다일 떼가 쫓아오고 있었다.

'바콘 근처에 강이 있는 것을 지도에서 보긴 했는데.....거기서 흘러 들어온 건가?'

그레이스는 이제 좀 여유가 생기니 그런 추론도 할 수 있었다.

전방의 위협이 사라지자 박운호가 속도를 늦추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안내할게요."

그레이스가 앞장서서 달리며 길을 인도했다.

메튜와 험프리는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출발할 준비만 남겨 두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동료들이 언제 오나 살펴보던 그들은 그레이스 일행의 뒤쪽으로 몰려오는 크로커다일 떼를 보고 경악해 소리쳤다.

"빨리와!"

먼저 도착한 그레이스와 필립이 서둘러 차에 탔다.

"운호! 어서!"

그레이스가 뒤따라오던 박운호에게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박운호가 보기에 5인승 픽업트럭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들어가기에 좁아 보였다.

"난 뒤에 타지."

그렇게 말한 그는 가볍게 뛰어 화물칸에 올라탔다.

박운호가 화물칸에 탄 것을 확인한 메튜가 액셀을 힘껏 밟았다.

-부와앙!

급발진한 픽업트럭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괴물 크로커다일 떼와 거리를 벌리면서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

*

*

괴물 악어 떼로 뒤덮인 마을이 멀어져 간다.

처음에는 이들과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

까망이를 타고 가다 중급 침식체로 보이는 괴물 악어에게 습격당하는 보안관을 둘 발견했다.

당시에는 하늘에서 마력창이나 하나 던지고 가던 길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보안관 중 하나가 여자였다.

보안관 모자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몸매가 심상치 않았다.

저런 몸매로 미인이 아닐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리볼버를 이용해 총알에 능력을 부여하는 특이한 능력을 보여줬다. 어떻게 보면 내가 마력 고정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지만 조금 달랐다.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미녀 보안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까망이의 등에 서 뛰어내려 나름 무게를 잡으면서 위기의 순간에 그녀를 구해줬다.

그리고 실제로 본 그녀의 미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직접 내려온 보람이 있었다.

웬 남자 놈이 총을 들고 왱왱거리긴 했지만,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 정도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녀 보안관의 외모는 나를 너그럽게 했다.

그녀는 나와 함께하길 원했다.

미녀가 원하는데 거부할 수는 없는 법.

결국 그녀와 동행하게 됐다.

「운호: 까망, 휴가다. 악어 놈 시체에 있는 마석은 잘 챙겨놔라. 그리고 한동안 내가 부를 때까지 근처에서 몬스터나 잡으면서 놀고 있어.」

나름 어엿한 공대 파티원인 까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까망 녀석은 덩치에 비해 겁이 많아서 그렇지, 상당한 고위 몬스터다. 그동안 잘 먹여서 그런지 살도 좀 올라 더 커졌다.

까망의 능력이라면 중급 침식체 정도야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당연히 녀석이 침식체를 잡아도 내 퀘스트에 기여가 된다.

「까망: 휴가? 운호, 너는?」

「운호: 나는 한동안 이들과 함께 할 생각이다.」

「까망: 운호 인간 암컷을 보고 발정 났구나.」

"......"

몬스터 주제에 왜 이렇게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건지….

한참을 달린 픽업트럭은 숲으로 둘러싸인 호수 근처, 목제 건물이 있는 공터에 차를 세웠다.

〚사파이어 레이크 여름 캠프〛라는 간판이 보였다.

'이곳이 이들의 거주지인가?'

감각을 퍼뜨려 주변을 살펴봤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이들은 차에 실려있던 식량이 가득 든 커다란 가방을 호수 선착장에 세워진 작은 요트에 옮겨 실었다.

이곳에서 한 번 더 보트를 타고 이동할 생각으로 보였다.

예상대로 험프리라는 털보 아저씨가 운전하는 요트를 타고 이동을 시작했다.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풍경은 꽤 좋았고 안에 작은 섬이 하나 보였다.

요트가 가는 방향을 보아하니 그 작은 섬으로 가는 거 같았다.

"어디서 왔지?"

요트 갑판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필립이 말을 걸어왔다.

녀석은 악어 괴물들 때문에 미쳐 못다 한 심문을 하려는 거 같았다.

상당히 경계가 심한 녀석이다.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귀찮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남자 놈이 내 신상을 캐다니.......평소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그레이스를 생각해 대답해 주기로 했다.

"코리아."

"코리아?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은 건가?"

필립은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코리아 몰라? 코리아."

"코리아는 안다. 아시아에 있는 나라. 내가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지 않나. 너의 국적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는 거다."

진실을 알려줘도 알아먹질 못한다.

나는 턱을 긁적이며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적당하게 녀석이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

"캐나다."

하지만 필립 녀석은 그 대답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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