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4/259)

지금 하얀 별의 크기는 작은 섬 정도의 크기였다.

작은 거면 충분했다.

<120만 코인으로 안식의 호수를 구매하시겠습니까?>

120만 코인.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이었다.

그동안 원래 세계와 좀비 세계를 오가면서 벌어들이는 것이 워낙 많다 보니 이제 부담은 되지 않았다.

기껏 사용할 만한 인간이라고 해봐야 나와 이그니스뿐이다. 그래도 언젠가 또 좋은 영웅을 뽑을 일이 있지 않을까.

역시 버는 것이 많으면 씀씀이도 커지는 법이다.

시야에 영웅의 안식처 하얀 별의 조감도와 호수를 설치했을 때의 시뮬레이션이 표시됐다.

어차피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둥근 하얀 별이다.

어느 쪽에 설치하든 똑같았다.

<설치를 확정하시겠습니까?>

하얀 별 위에 호수의 설치를 확정하자 아무것도 없는 하얀 대지에 커다란 호수가 생겨났다.

제일 작은 소짜로 선택했지만 내가 목욕하는 데 쓰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크기였다.

호수의 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상당히 맑았다. 그런데 그 바닥이 그냥 새하얗게 돼 있으니 확실히 밋밋하긴 했다.

호수에 홀딱 벗고 몸을 담가 마음껏 비누와 샴푸를 써가며 몸을 씻었다.

호수에 흘러 들어가는 비누들이 바로바로 정화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성능은 기가 막혔다.

한번 씻겠다고 120만 코인을 태웠지만.....후회는 없었다.

간만에 몸을 깔끔하게 씻어내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럴 땐.

'목욕재계도 했겠다. 역시 가챠 시기가 아닐까.'

목욕재계는 개뿔....야심 차게 영웅소환 100연차를 하고 시원하게 폭삭 망했다.

말 그대로 개 한 마리 나오지 않았다.

"쩝…."

나도 이제 재벌의 마인드가 된 걸까.

전에는 100연차 폭망하고 부들부들 떨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큰 심적 타격은 없었다.

역시 돈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그렇다고 잃은 코인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그니스 같은 존재를 구할 수 있다면 10억이 아니라 천억도 쓸 수 있겠지만, 이렇게 나오지 않으면 나도 꺼려질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영웅소환 확정권을 구하기 전까지 존버하는 것이 나을 거 같았다.

*

*

*

그레이스 앤더슨.

그녀는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낡은 목재로 된 집안의 풍경이 보였다.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긁적이며 털레털레 현관으로 향했다.

방금 일어난 그레이스는 다소 부스스한 모습이었지만, 금발에 투명한 푸른 눈을 가진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가 빛이 바래진 않았다.

그녀가 현관문을 열자 보안관 복장에 진한 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는 20대 중반 정도 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필립이었다.

"아직 자고 있던 거야?"

"어........오늘은 내 차례였나?"

"그래."

필립이 대답하면서 그레이스의 늘어진 티셔츠 사이 보이는 가슴골을 훔쳐보고 있었다.

"구멍 뚫리겠다."

"구멍 뚫리기에는 너무 두꺼운 거 아닌가?"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필립.

한창 예민하던 어린 시절에 이런 거로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미안. 빨리 준비하고 나갈게."

"오케이."

그레이스는 현관문을 닫고 걸어가면서 티셔츠와 잠옷 바지를 벗어 대충 소파에 던졌다.

그러자 그녀의 잘 빠진 속옷 차림의 몸매가 드러났다.

그레이스는 집 한쪽 옷걸이에 걸린 보안관 복을 익숙한 듯 빼서 입었다. 부풀어 오른 가슴 탓인지 반짝이는 금색 별 모양의 배지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는 시애틀에서 조금 떨어진 로먼이라는 작은 마을의 보안관이었다.

이제 와서는 다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리볼버의 약실을 돌려 총알을 확인하고 허리춤에 챙겨 넣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벽에 걸려있는 보안관 모자를 쓰고 현관을 나서자 필립이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뭐야, 아직 안 갔어?"

어깨를 으쓱이는 필립.

그레이스는 그가 오늘 보급에 함께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겠어? 오늘 네 차례 아니잖아."

"바람이나 쐬지 뭐."

"......"

그가 어떤 마음으로 따라오는지 예상은 갔지만, 그레이스는 더 말해봐야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그와 함께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수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작은 섬의 풍경이 보였다.

선착장에는 두 명의 남자가 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메튜와 험프리.

오늘의 보급 당번들이다.

"미안, 오늘인지 까먹었어."

"드디어 우리 마을의 스타가 나오시는군."

덥수룩한 수염을 한 험프리가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스타는 무슨."

"넌 스타가 맞아. 우리 마을에서 너만큼 유명한 사람이 나온 적이 있던가?"

그녀는 한때 누군가 멋대로 찍은 동영상으로 인해 미녀 보안관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녀를 보러 촌구석 마을에 찾아오는 인간이 있을 정도였다.

험프리는 그걸 말하는 거였다.

그때는 짜증밖에 안 났지만 이제 와서는 다 그리운 추억이 됐다.

그들은 그런 실없는 농담을 하며 작은 요트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향했다.

세상은 변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좀비 세상이 됐다.

기조는 있었다.

괴이한 생명체들이 나타났다며 환경위기니 하는 뉴스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무관심했다.

그리고 좀비가 창궐했다.

감염경로는 누구도 몰랐다.

물려서 감염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냥 멀쩡하던 보안관 동료가....이웃이 좀비가 됐다.

그런 무작위적인 감염이 일주일이 넘게 일어났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더 이상 무작위적인 감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그레이스는 가족이 없었다.

외동딸이었고.

아버지는 보안관 일을 하다 순직했다.

바람난 엄마는 진작에 이혼하고 먼 곳으로 떠났다.

그레이스는 어느샌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보안관이란 직업을 가지게 됐지만, 범죄자가 아닌 좀비와 싸우게 됐다.

아니, 좀비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한 괴이하게 변형된 몬스터도 돌아다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보안관이었던 그레이스와 필립은 얼마 남지 않은 마을의 생존자들을 이끌어 인적이 드문 외곽.

학생들의 여름 캠프로 쓰던.

사파이어 레이크의 작은 섬에 있는 캠핑장으로 대피했다.

좀비나 괴물들이 호수를 건너오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실험을 해보진 못했지만, 그동안 섬 안에서 좀비 코빼기도 보지 못했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안전지대가 만들어진듯했다.

그렇게 지금은 호수의 작은 섬에 많지 않은 생존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레이스가 보급품을 구해오는 날이었다.

호수를 건너 요트에서 내리자 선착장 옆에 POLICE라고 적혀있는 픽업트럭이 한대 서 있었다.

그들은 익숙한 듯 픽업트럭 뒤에 가방을 싣고 차에 탔다.

"이번엔 어디?"

그레이스의 물음에 필립이 대답했다.

"바콘."

"흠....점점 멀어지는군."

"어쩔 수 없지."

대도시 시애틀도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어마어마한 좀비들이 몰려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죽을뻔한 경험을 하고 나서는 다시는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다소 멀더라도 인적이 없는 촌구석을 노리는 것이 나았다.

*

*

*

바콘은 전에 살던 곳과 비슷한 규모의 작은 마을로 보였다.

그레이스 일행은 마을 상점가로 진입하기 전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에서 내린 그들은 짐칸에 실린 무기들을 하나씩 나눠 가졌다.

메튜와 험프리는 창을.

필립과 그레이스는 양손 벌목 도끼와 정글도였다.

그레이스는 조금 무거울 수도 있는 도끼를 가볍게 등에 메고 정글도를 한 손에 들었다.

총의 소음은 아무래도 좀비나 몬스터를 끌어들이기 때문에 급한 순간이 아니면 자제하는 편이 좋았다.

그레이스 일행은 주변을 경계하면서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멀리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던 좀비 한 마리가 그들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달려온다.

"내가 처리할게."

그레이스가 그렇게 말하며 나섰다.

격하게 달려오는 좀비의 그 모습은 보통 사람이라면 기겁할만한 장면이었지만, 일행 중 누구도 그레이스를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좀비가 지저분한 입과 손을 벌리고 그녀를 덮쳐왔다.

그 와중에도 그레이스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좀비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투우하듯 간발의 차이로 가볍게 몸을 피하자 목표를 잃은 좀비가 자세를 잡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정글도가 움직인다.

-스걱!

가볍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친 정글도가 좀비의 목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정글도로 인간의 목을 잘라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에도 그레이스는 그것을 가볍게 해냈다.

-데구르르….

목이 잘리고 좀비의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몸은 바닥에 쓰러졌지만, 머리는 여전히 살아 이빨을 딱딱거렸다.

-퍽!

그 위로 필립의 벌목 도끼가 좀비의 머리에 박혔다. 좀비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시끄럽게 딱딱거리던 입이 멈춘다.

세상이 지옥처럼 변하고 보안관이었던 필립과 그레이스는 운 좋게 초능력을 각성했다.

그 덕에 일반 좀비는 그들에게 큰 위협이 아니었다.

영화에서 보던 슈퍼우먼 같은 히어로 정도의 힘을 가졌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에 비해서는 소소했다.

물론, 이것도 배부른 투정이다.

이런 세상에 이 정도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그 덕에 둘은 초능력의 힘으로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현재 그레이스의 그룹에는 필립과 그녀를 포함해 총 3명의 초능력자가 있었다.

초능력 각성자들은 각자 번갈아 가며 보급품을 구해오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 한 명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피난처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필립은 오늘 자신의 차례가 아닌데도 그레이스를 따라 나온 거다. 그래도 필립 덕분에 보급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 같았다.

상점가의 교차로가 나왔다.

"필립이 왔으니 함께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나와 험프리 아저씨는 서쪽을 찾아볼 테니까 필립과 메튜는 북쪽. 무슨 일 있으면 무전기로 연락하고."

그레이스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인 일행은 두 명씩 조를 나눠 탐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레이스와 험프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트를 찾았다.

그레이스는 어깨에 달린 무전기에 입을 대고 말했다.

"마트는 찾았어. 필립 너희들은 의약품 좀 찾아봐."

『알았어.』

의약품은 구할 수 있을 때 구하는 것이 좋았다.

필립의 응답을 들은 그레이스는 조심스럽게 마트 안으로 진입해 안에 남아 있던 좀비들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다행히 마트 안의 진열대에 보존식품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럭키. 한 번 더 와서 가져가도 되겠는데."

험프리가 신이 나서 가방에 식량을 챙겼다.

그의 말대로 재수 없으면 텅텅 비어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운이 좋았다.

그레이스와 험프리는 마트 안에 식량을 가방이 빵빵하게 쓸어 담았다.

식량을 챙기고 마트를 나서니 무전기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레이스. 변형체 좀비가 나타났어.』

"몇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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