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화 (213/259)

이제 세종시 거주지는 큰 위험이 없다.

게다가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 돌아가는 시스템이 구축됐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거주지 관리에 웬만하면 터치할 생각이 없었다. 나야 지금의 사냥 시스템만 잘 돌아가기만 하면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잠이나 자야겠다.'

생전 처음 보는 오로라에 모닥불도 피우고 분위기 좀 잡아봤는데 이제 그만하고 자기로 했다.

나는 옆에 있는 까망이의 접혀있는 날개 틈새로 파고들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깨달은 새로운 사실.

까망이의 등에 탔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깃털이 상당히 부드럽고 푹신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게 까망이의 품속이었다.

까망이의 품속은 내 예상 이상으로 편했다.

침대에 비 할 바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는 내 침대 대용이 된 까망이었다.

자고 있던 까망이가 자신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나를 졸린 눈을 떠 슬쩍 보곤 편히 들어올 수 있게 날개를 살짝 들어줬다.

까망이는 내가 하는 이 짓을 처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모습이다.

나는 까망이의 품속에 들어가 안락한 잠자리를 만끽하며 잠을 청했다.

*

*

*

테일러는 세종시의 생존집단과 접촉했다.

그리고 부하들을 바깥쪽에 대기 시킨 테일러는 혼자 거주지로 들어섰다. 자기 능력을 알기에 부하들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을 거다.

거주지 안으로 들어오는 조건으로 총기는 압수당하고 손이 묶였다.

예상했던 일이다.

그러나 초능력을 각성한 자신에게는 의미 없는 짓이었다.

경비가 무전을 하고.

테일러는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어디론가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그는 거주지의 생존자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가 일단 처음 느낀 감상은 생존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깔끔하다는 거였다.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그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자신과 상당히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적대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불안한 시선도 아니었다.

그냥 호기심에 가까웠다.

그때 테일러의 시야에 길을 걸어가며 핸드폰을 사용하는 사람이 보였다.

'해, 핸드폰을 쓰고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무전기로 보이지 않았다.

한때 질리도록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 폰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종종 사람들이 스마트 폰의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 연기?'

워낙 이질적이고 현실감 없는 그 모습에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기도 했다.

'어떻게?'

머릿속에 의문을 가지면서 경비병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안내된 곳은 빈 아파트의 1층을 거실에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나이 든 노인과 상당히 젊은 여자, 그리고 30대 정도 돼 보이는 남자 하나가 있었다.

여자와 노인은 한국의 전통 복장을 하고,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있었다.

여자는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얼굴은 무표정한 것이 조금 차가워 보이기도 했다.

"테일러 스미스입니다."

테일러는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한국말을 잘하시는군요."

30대 남자가 말했다.

"아내가 한국인입니다."

사실이기도 했고, 호감도를 올려줄 수 있는 요소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렇군요. 저는 임구성입니다."

경계가 약간 풀어지는 임구성의 표정을 보면 아내 이야기는 어느 정도 먹힌 거 같았다.

"백설화입니다."

"천부문주 백태산이라고 하오."

노인과 여인이 임구성에 이어 자기소개를 했다. 테일러는 천부문주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갸웃했다.

"여러분이 이곳의 리더입니까?"

리더가 아니더라도 이 거주지에서 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일 거라 판단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경비가 이곳으로 자신을 데려올 이유도 없었다.

"아닙니다. 리더는 저의 낭군님이십니다. 잠시 외출하셨어요."

"낭군?"

외국인인 테일러에게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였다.

"제 남편이라고 하면 이해하시겠습니까?"

"아, 이해했습니다."

잘 봐야 사회초년생 정도로 보였는데....결혼이라니......동양인이라 어려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처음 임구성이나 백태산이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주로 이야기를 주도 하는 것은 백설화 쪽이었다.

'백설화가 현재는 실질적인 리더라고 보면 되는 건가?'

테일러는 백설화가 리더의 배우자라는 것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희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괴물들을 피해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정찰 도중 여러분들을 발견했습니다.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찾아왔습니다."

"이 근처에 정착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아직 정하진 않았습니다. 지금은 일단 이 도시를 살펴보는 중입니다."

"당신들이 세종시에 정착하는 것을 저희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정착하신다면 이 근처에서 식량을 구하기는 힘들 겁니다. 이 도시의 식량은 거의 다 수거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도적인 차원으로 저희에게 식량을 좀 지원해줄 수 있겠습니까?"

뻔뻔한 말일 수도 있다.

테일러도 당연히 이들이 식량을 줄 거라 기대하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식량은 상당히 중요하다.

험프리스도 다른 집단이 식량을 나눠 달라고 하면 당연히 주진 않을 거다.

테일러는 그저 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마석이 있습니까? 마석이 있으면 식량으로 교환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마석? 그게 뭡니까?"

"이런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백설화가 허공에서 푸른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돌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보고 테일러는 깜짝 놀랐다.

'역시 이 여자도 초능력 각성자였군.'

처음 보는 능력이긴 했지만 초능력으로 생각하면 이해 못할 건 아니었다.

그리고 백설화가 꺼낸 블루 스톤.

당연히 알고 있다.

좀비보다 강한 변형체 괴물에게서 나오던 물건이다.

험프리스에도 있긴 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블루 스톤이 조금은 특별한 물건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험프리스에서도 조금은 연구했으나 진전이 크게 없어 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캠프 안이 어수선해 제대로 연구할 만한 여유 자체가 없었다.

그 결과 현재 험프리스 안에서는 거의 기념품 취급이었다.

'그것을 식량과 바꿔 준다니….'

이들은 이 블루 스톤에 대해 특별한 무언가를 알아냈는지도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많이 모아둘 걸 그랬군.'

백설화의 표정과 말투는 딱딱했지만, 생각보다 친절하고 기품이 있었다.

테일러는 그녀와 대화를 나눈 후 무기도 돌려받고 무사히 빠져나와 자신들의 집단 험프리스로 돌아갔다.

*

*

*

"그곳의 리더는 한동안 자리를 비웠다고 합니다. 현재는 리더의 여자, 백설화와 천부문이라는 집단의 리더, 백태산이라는 노인이 이끄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백설화가 더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게다가 무선 통신망을 복구해 핸드폰 사용도 한다니 대단하군. 그 백설화라는 여자가 블루 스톤을 건네주면 그 대가로 식량을 준다 했다고?"

사령관 다니엘은 테일러의 보고에 황당하면서도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마석으로 불렀습니다. 이곳에 좀비들이 거의 없는 이유도 그들이 상당수 정리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블루 스톤.......마석이 그들에게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것이 식량에 비할 바인가?'

다니엘은 그런 의문이 생기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은 소식이었다.

"그게 그렇게 쓸모가 있는 물건이었나? 우리가 블루 스톤을 얼마나 가지고 있나?"

다니엘은 옆에 있던 월터에게 물었다.

자신들이 모르는 귀한 물건이라고 해도 당장 식량이 급한 험프리스에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기념품처럼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면서도 그 마석이라는 것이 있을 법한 괴물들을 몇 잡았지만, 굳이 사체를 헤집으며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식량을 얻으려면 그 마석이라는 것을 구해야 하겠군. 역시 그 변형체 몬스터를 찾아 잡아야 하나?"

"그 방법도 알려줬습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구해야 할까 생각하던 그때 테일러가 말했다.

"허? 그 방법을 알려줬다고?"

"네, 이곳보다 조금 더 남쪽에 있는 청주라는 곳에 가면 상당히 많은 몬스터들이 있고 그곳에 있는 몬스터를 잡으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다니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잘 만들어진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마석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을 구할 수 있는 곳까지 친절하게 알려줬다.

과도한 친절이었다.

전과 같은 멀쩡한 세상이 아니다.

그 친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함정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야 없겠습니다만......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제가 정찰 겸 다녀오겠습니다."

테일러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다니엘은 그를 믿고 정찰을 허락했다.

*

*

*

숙면하고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까망이의 품 안이다.

내가 예상하는 바로는 난 잠을 자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없을 거다.

그러나 나는 잠을 잔다.

지금의 내게 있어 잠은 사치 생활이나 마찬가지다.

수면시간을 챙기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 생활패턴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람이 생산적인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인간은 커피나 술,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섹스를 하지 않아도 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술과 커피, 맛집을 찾아다니고 모텔을 찾는다.

내가 잠을 자는 것도 그것과 같다.

오히려 나는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잠도 못 자고 언제나 깨어 있는 삶이 그렇게 좋을 거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꼼지락거리면서 까망이의 품에서 기어 나오니 어제와 크게 변하지 않는 알래스카의 새하얀 풍경이 나를 반겼다.

며칠 동안 샤워하지 않았더니 몸이 꿉꿉했다.

나는 생각보다 깔끔한 인간이다.

못해도 하루에 한 번은 샤워하는 놈이다.

물론 거의 내 여자들과 함께지만….

그런데 세종거주지를 나오고부터 거의 씻지를 못했다.

이 근처에 깨끗한 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 위에서 구를 수도 없다.

어떻게 씻을 방법을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났다.

영웅의 안식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과 색깔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새하얀 풍경이 나를 반겼다.

차원 상점을 열었다.

〔영웅의 안식처 꾸미기 상품〕

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상품을 살펴보기로 했다.

환경조성 품목이 보였다.

〖사막〗 〖눈〗 〖황무지〗

〖초원〗 〖숲〗….

이건 지금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차원 상점을 뒤적이다 내가 원하던 것을 찾았다.

〖안식의 호수〗

<언제나 깨끗한 물을 공급합니다.>

<정화기능이 있습니다.>

기능도 좋았다.

크기는 소, 중, 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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