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거대한 새에 타고 있던 것은 사람 아니었나?"
"저, 저도 그렇게 본 거 같습니다...마치…."
월터는 새 위에 타고 있던 로브와 고깔모자를 쓴 인간 같은 형상을 본 거 같다.
그 모습에 자연스레 연상되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월터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려다가 말았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말했다가는 바보 취급당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허…."
다니엘은 터무니없는 광경에 잠시 혼란스러웠던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검은 거인과 거대한 새에서 떨어지는 폭격 덕에 좀비의 수가 상당히 많이 줄어 한숨을 돌렸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는 게 좀비들이 전과같이 다시 몰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지금이라면….'
"월터, 지금이다. 최대한 신속히 탈출한다."
다니엘은 부관에게 명령했다.
"어, 어디로 말입니까."
섬으로 이주한다는 계획은 이미 좌초됐다.
그리고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을 거 같은 존재가 북쪽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이쪽에 적대감은 없어 보였지만….'
그건 그저 자기 생각일 뿐이다.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그 터무니없는 괴물들 사이, 먹이다툼의 일환일 수도 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남쪽으로 이동한다."
*
*
*
내가 도와준 생존자들에게 굳이 생색을 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좀비킹을 처리한 나는 까망이를 타고 쿨하게 서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울에서부터 이어지는 거대한 거인이 움직인 이동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걸로 좀비킹은 서울 쪽에서 주한미군 생존자들의 캠프 쪽으로 내려왔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좀비킹이 그곳을 처음부터 노렸다기보다 남하하면서 눈에 띈 것이 아닐까.
이쪽에 어그로가 끌린 덕분에 세종시 거주지 쪽에 오기 전에 처리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 도심을 둘러봤다.
과연 최대 인구의 도시답게 좀비는 많았지만, 좀비킹처럼 대단한 존재는 없었다.
서울의 지배자였던 좀비의 왕을 내가 죽인 셈이다. 그래도 아직 서울에는 좀비가 많이 남아있었다.
종종 움직이는 생존자들을 못 본 건 아니지만 무시했다.
내가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었다.
'방법이 없다기보다.....귀찮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
대충 서울 쪽을 둘러보고 세종 쪽 거주지에 그렇게 커다란 위협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다.
*
*
*
사령관 다니엘은 험프리스를 이끌며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될 수 있으면 부산까지 이동해 배를 구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중간중간 마트나 창고에서 보급해가며 일주일 가까이 이동하다 작은 도시를 하나 발견했다.
"저곳이 세종시라고?"
"네, 사령관님."
먼저 정찰하고 돌아온 스미스 중령이 말했다.
테일러 스미스 중령.
그는 험프리스 캠프의 최강 능력자다.
테일러 스미스는 사령관 다니엘이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험프리스 생존자 집단의 리더로 있는 이유기도 했다.
강력한 초능력자인 그는 세상이 엉망이 된 후에도 여전히 사령관인 다니엘을 상관으로 모시고 있었다.
테일러 그뿐만 아니라 그의 부대원들도 높은 충성심으로 사령관 다니엘을 지지하는 단단한 기둥이었다.
"도시에 생각보다 좀비들이 별로 없습니다. 진입해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그럼 인솔 부탁하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험프리스 캠프의 생존자들은 테일러의 인도에 따라 세종시에 진입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세종시의 정찰을 시작했다.
도시에 들르면 그저 위험뿐만 아니라 식량을 수급하기 위해서라도 주변을 철저하게 정찰할 필요가 있었다.
"중령님, 이것 좀 보십시오."
테일러는 부하가 가져온 드론의 촬영화면을 봤다.
"흠....이건...생존자 집단이군."
"예, 그렇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쪽에 장벽을 두르고 생활하는 생존자 집단 같았다.
테일러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서 괴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드론으로 촬영한 생존자 집단을 좀 더 유심히 살펴봤다.
생존자들의 옷과 겉으로 보이는 상태를 봐서는 상당히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이 보였고, 아이들의 표정도 밝았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보면 괜찮은 생존집단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테일러는 사령관인 다니엘에게 세종시에 생존자 집단이 있다는 것을 보고 했다.
"스미스 중령. 어떻게 생각하나."
"그들의 청결이나 몸 상태를 보면 상당히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생존자들의 표정도 밝습니다. 정상적인 생존자 집단으로 보입니다. 접촉을 해보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그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괜찮겠나?"
"예, 문제없습니다."
험프리스 최강의 능력자.
그의 부대원들도 상당한 베테랑이다.
그를 보낸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터였다.
"부탁하네. 스미스 중령."
"예, 알겠습니다."
테일러는 사령관 다니엘에게 경례하고는 생존자 집단과 접촉하기 위해 움직였다.
*
*
*
문명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온통 눈으로 뒤덮인 새하얀 세상.
그 세상 한가운데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
모닥불 옆에는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는 거대한 까마귀와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하나 앉아 있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얼어 죽을지도 모르는 추위 속 모닥불 하나 피워놓고 분위기를 잡는 사내….
그건 바로 나였다.
빨갛게 불타오르는 모닥불 위 펼쳐진 밤하늘.
그리고 그 하늘을 수놓은 오로라.
나는 그 오로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는 알래스카다.
까망이를 타고 북으로 이동하다 도착한 곳이다.
북한을 넘어 그냥 흘러 흘러 여기까지 오게 됐다. 여기까지 오면서 느낀, 특이하다고 할 만한 점은 역시 차원 균열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생각보다 세계의 위기가 아닌 건가?'
좆망 한 거 같지만 좆망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34포인트........그 정도 벌던 시절도 있었지….'
헛헛한 눈빛으로 하늘에 떠 있는 오로라를 바라봤다.
그때 이후로는 영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운호 12레벨 】
【 스킬 】
〔 육체강화 Lv 7 〕
〔 로그인 Lv 3 〕
〔 인벤토리 Lv 7 〕 : 〔영웅의 안식처〕
〔 마력변환 Master 〕
〔 차원상점 〕
〔 공격대 〕
〚 스킬 포인트 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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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도 하나 올리고.
처음의 대박과 이그니스의 노력에 힘입어 그럭저럭 포인트는 쌓였다.
그러나 나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처음 대박을 터트렸던 좀비킹.
나는 좀비킹에게서 그 대량의 포인트를 얻던 그때의 달콤함을 아직 잊지 못했다.
당시에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큰 대량의 포인트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는 사냥해도 뭔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북쪽으로 넘어오면서부터 하루에 중급 침식체 한 마리도 보기 힘들었다.
이 알래스카 얼음 벌판에 와서 잡은 건 겨우 중급 북극곰 한 마리.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나는 이그니스보다 훨씬 못 벌고 있었다.
작정하고 사냥터에서만 사냥하는 이그니스가 더 버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야심 차게 거처를 떠나온 것치고는 초라한 성과였다.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내 여자보다 못 버는 고개 숙인 남자였다.
그렇게 고개 숙인 남자가 된 나는 안될 거 같았던 금욕에 성공했다.
성욕을 자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무념무상.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면 된다.
다행히 환경도 나를 도와줬다.
광활한 대자연과 종종 튀어나오는 괴물들.
여자 구경은 할 수도 없었다.
이곳에는 나를 자극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금욕에 최적화된 환경.
내 지금의 상태는 콜라와 같다.
흔들지만 않으면 터질 일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생활을 원한 것은 아니다.
나를 이런 생활로 몰아넣은 후안 라즈카에 대한 분노를 곱씹었다.
'살려달라고 빌어도 용서는 없다. 후안, 넌 죽는다.'
원래 죽일 생각이었지만....
"중국 쪽으로 갈 걸 그랬나?"
인구수만은 무지막지한 나라다.
좀비킹 한두 마리는 더 있을 듯도 싶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중국 쪽으로 방향을 틀긴 싫었다.
이왕 이렇게 알래스카까지 온 거 미국 구경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서채영: 아저씨 언제와요?」
「강하나: 언제와요?」
알래스카의 오로라를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고 있으니, 채영이와 하나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꼬맹이들은 공격대 파티에 들어오고 나서 종종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오곤 했다.
「운호: 갈려면 멀었다.」
「서채영: 아저씨, 보고 싶어요.」
「강하나: 보고 싶어요.」
꼬맹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운호: 그래.」
대답하기 귀찮았지만 그래도 대답은 해줘야 했다. 해주지 않으면 꼬맹이들은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낸다.
차단할까도 생각했지만….
내 여자들에게 비난을 피하지 못할 거 같아서 참았다.
역시 꼬맹이들은 대하기가 껄끄럽다.
「백설화: 낭군님, 북쪽에서 생존자집단이 내려왔습니다. 주한 미군이었다고 하는데 상당한 규모입니다.」
「운호: 주한미군?」
내가 도와준 녀석들이 그쪽으로 내려간 건가?
「백설화: 예, 군복을 입은 것과 외국인인 것을 보면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낭군님.」
「운호: 설화, 네가 알아서 해라.」
「백설화: 예? 그래도 되겠습니까?」
「운호: 그래. 설화, 난 널 믿는다.」
「백설화: 가, 감사합니다. 낭군님의 믿음에 보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설화는 내가 앞에 있었으면 눈물을 흘리며 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힘든 것도 아닌데 설화가 좋아할 만한 말을 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