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 그러다 잡히면 날개 뜯고 시작한다.》
내 협박에 까마귀 놈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건지, 달아나는 속도를 줄이더니 멈추어 섰다.
"왜, 왜 그러냐 인간."
까마귀는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놀랍게도 텔레파시가 아닌 부리에서 한국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암컷인지 고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말도 할 줄 아나?"
"할 줄 안다."
"너, 나 알지?"
"그, 그렇다."
덩치를 보면 최소 5포인트짜리였다.
군침이 돌았다.
"사, 살려줘라. 인간 난 너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내 살의를 느낀 건지 거대 까마귀는 내게 빌었다. 그렇게 납작 엎드리니 살의가 약간은 누그러든다.
"잘못이 없다고? 네놈이 내 정보를 멋대로 멧돼지 녀석들에게 팔아넘기지 않았나."
놈이 맞나? 암컷 같으니 년인가?
"팔아넘기지 않았다. 그냥 이야기 한 거다."
"그래도 내 개인정보를 멋대로 퍼뜨린 네놈의 죄는 깊다."
개인정보네 뭐니 하는 걸 녀석이 알지 모르겠지만.....원래 힘 있는 놈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미, 미안하게 생각한다. 다시는 네가 있는 쪽을 살펴보지 않겠다."
"그거론 부족하다. 너는 이미 죄를 저질렀다."
"그, 그러면 어쩌면 좋겠는가."
녀석은 슬슬 내 눈치를 보며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망가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 테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목을 내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까마귀는 상당히 커다랬다.
거대 멧돼지 정도의 크기는 안 되지만 그 동체만 해도 5미터는 되어 보였다.
'이거….'
해볼 만한 괜찮은 생각이 났다.
녀석에게 공대 파티 초대를 보내봤다.
<까마귀? 에게 공격대 합류를 요청합니다.>
공격대에 합류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
"이, 이것은 무엇인가?"
"승낙해라."
내 반협박에 가까운 강요에 녀석이 주춤한다.
"안 하면 알지?"
"아, 알았다."
<까마귀? 님이 공격대에 합류했습니다.>
"너, 이름있어?"
"어, 없다."
"넌 이제부터 까망이다."
"까망? 뭔가 대충 지은 거 같다. 다른 이름이 좋을 거 같다."
짐승 주제에 눈치도 빠르고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그럼 까멍은 어때."
"아니다. 까망이 좋겠다."
암컷이라 그런지 변덕이 심했다.
"그럼 이제 가도 되나?"
까망이 내 눈치를 보면서 묻는다.
"그건 안 되지."
"왜 안 되나. 네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지 않았나."
"이게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개인정보유출을 그렇게 쉽게 용서받을 수 있을 줄 알았나?!"
그렇다.
개인정보유출은 심각한 범죄다.
까망이 짐승이라도 쉽게 용서받을 수 없다.
"그,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까망이 찔끔하며 내게 물었다.
"너 내 탈것이 돼라."
"뭐?"
*
*
*
캠프 험프리스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늘어가는 괴물 좀비들.
놈들의 공격에 점점 버티는 것이 힘들어졌다.
험프리스의 사령관 다니엘은 이곳의 시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아쉽기는 했지만, 결국은 옮겨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바다와 인접해 있는 험프리스의 장점을 살리기로 했다.
그래서 목표로 삼은 게 섬이다.
거대 좀비들이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고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캠프 험프리스의 인원이 모두 한꺼번에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으나, 안타깝게도 그 정도 규모의 배는 없었다.
당연하게도 순차적으로 이주하기로 했다.
이주 계획이 결정되자 각성자들이 자신들의 가족을 먼저 보내기를 건의 했다.
각성자들은 중요한 인재다.
사령관으로서는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터졌다.
캠프에 각성자들만 탈출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각성자의 일반인들에 대한 암묵적인 무시에 갈등이 생기고 있었는데, 그 소문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사령관인 다니엘이 나서서 그게 아니라고 했지만, 당연히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만큼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폭주가 시작됐다.
배를 가지고 달아나다가 각성자들의 능력에 배가 터지고 그걸 본 일반인들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배들을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그 사태로 인해 섬으로 이주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그렇게 각성자와 일반인들의 갈등이 극에 달할 무렵 대량의 좀비 괴물들이 들이닥쳤다.
그 좀비들의 공격은 잠깐일지는 몰라도 갈등을 봉합해 줬다.
그대로 계속 서로 싸웠다면 좀비에게 몰살당할 뿐이었으니, 캠프 안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결국 생존자들은 다시 손을 잡고 좀비들의 공격을 방어했다.
하지만 이미 배를 잃은 험프리스는 고립된 채 하염없이 좀비 괴물만 막는 상황에 닥쳤다.
육로로 탈출하기에도 이미 시기가 너무 늦었다.
장벽 전체가 두터운 좀비의 벽으로 둘러싸여 이제는 차로도 밀고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도 차로 도망가려던 인간들이 얼마 가지 못하고 고립돼 좀비들의 맛있는 한 끼 식사가 됐다.
그리고 새로운 괴물 좀비가 나타났다.
그동안 보던 2, 3미터짜리의 좀비와 차원이 다른 5미터 크기의 거대 좀비였다.
문제는 그런 한 마리도 감당하기 힘든 거대 좀비 놈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놈들이 장벽으로 달려들지 않고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포위한 모양새였다.
사령관 다니엘은 놈들 중 하나만 달려들어도 장벽은 그대로 무너졌을 텐데 어째서 저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파괴 욕구만이 아니란 말인가?'
그동안 무식하게 달려만 들던 좀비와는 다른 행태였다. 누가 봐도 도망가지 못하게 캠프 주변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방어하는 병사와 각성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얼굴에 점차 어둡게 변했다.
그저 장벽 뒤에 가족들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싸울 뿐이었다.
장벽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령관 다니엘은 이 상황을 헤쳐 나갈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쿵. 쿵.
둔중한 진동이 땅을 울렸다.
지진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무언가 걷고 있는 소리 같았다.
"사령관님......저, 저기…."
부관인 월터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사령관 다니엘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오.....마이...갓…."
그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거인.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2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압도적인 크기의 좀비 거인.
장벽을 둘러싼 좀비들이 벌레로 보일 정도로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놈이 나타났다.
놈은 그것뿐만이 아니라 호위로 보이는 그보다 작은........10미터정도 되는 거인을 대동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게 나타났다는 말인가….'
사령관 다니엘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넋을 놓고 초거대 좀비를 바라보는 캠프 험프리스 인간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똑같은 공포와 절망이 떠올라 있었다.
*
*
*
까망이는 내 탈것이 됐다.
나는 까망이를 타고 편하게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대규모의 좀비 떼에게 공격당하는 생존자 캠프를 발견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에 접해있는 커다란 장벽을 친 곳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좀비에게 둘러싸인 장벽 위에서 필사적으로 좀비들과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생존자들.
군복을 입은 이들도 꽤 많이 보였고 인종도 다양했다.
'미군 부대였나?'
전국의 좀비가 여기 다 몰려있는 거 같았다.
아니면 서울 경기 쪽의 좀비가 이쪽으로 다 몰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울과 경기도 쪽에 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살고 있으니......저 정도 숫자가 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밑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인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늘 위에서 보이는 장벽을 둘러싼 좀비 대군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장벽 위에서 방어하는 인간들은 이미 패닉상태였다.
작은? 좀비들이야 그럭저럭 막아내고 있지만….
뒤쪽에 작은 좀비들 사이에 불쑥불쑥 솟아있는 거대한 좀비들 때문이었다.
크기로 보면 중급 침식체였다.
어째서인지 중급 거대 좀비들은 움직이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마치 병사들을 보내는 장군들의 모습이랄까.
-쿵. 쿵. 쿵.
둔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산 넘어 산.
20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거대 거인 좀비가 옆으로 작은 거인 좀비 둘을 데리고, 마치 호위를 거느린 왕처럼 생존자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쿵. 쿵.
좀비 거인들을 이끄는 듯한 그 모습은 내가 그들의 왕이라고 어필하는듯했다.
'저게 좀비의 왕인가? 좀비킹?'
캠프 안 생존자들은 그 거대한 좀비킹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우어어!!
거인 좀비킹이 포효했다.
그러자 캠프를 향해 돌진 준비만 하고 있던 거대 장군 좀비들이 왕의 명령에 장벽을 향해 전진 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생존자들의 얼굴엔 공포와 절망의 감정이 떠올라있었다.
"운이 좋군."
그건 나와 생존자들 둘 다 해당하는 말이었다.
나는 대량의 스킬 포인트를 벌어서 좋고.
생존자들은 내 도움을 받아서 좋고.
"가자."
"저, 저 아래로 말이냐?"
"그래."
"......나, 난 지금 날개가 조금.....안 좋다…."
갑자기 엄살을 피우는 까망.
뻔한 수작이었다.
"......너한테 싸우라고 안 할 테니까 내려가라."
"정말이냐?"
녀석의 목소리에 금세 기쁨이 묻어난다.
겁쟁이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