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화 (201/259)

"정령사처럼 부릴 수 있는 그런 정령과의 계약은 아니다. 정령도 최하급보다 못한 정령들이지. 가느다란 의식만 있는 미약한 존재들이다. 덕분에 정령사들이 가지고 있는 감응 능력이 없어도 간단한 계약이 가능하지."

"나도 할 수 있나?"

"내 마법 장치와 마석만 있으면 어렵지 않다. 마석의 마나량 만큼의 물을 공급하는 단순한 계약이지. 정령의 의식이 흐려 애초에 그것 외에는 명령을 내리지도 못한다."

결국은 또 마석이다.

이쯤 되면 차원 기축 통화나 마찬가지 아닌가.

'원래 세계에서 마석을 좀 많이 비축해놔야겠어.'

원래 세계에서 미친 듯이 쌓이는 돈을 마석을 구매하는 데 쓰기로 마음먹었다.

"저택에 물이 나오는 것은 저택 자체에 걸려있는 정령과의 계약이다. 그리고 이건 그걸 연구하던 중에 나온 물건이지."

릴리아나가 오렌지 크기 정도 되는 금속으로 된 둥근 마법 장치를 하나 보여 줬다.

그 표면에는 신비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 작은 게?"

"구멍 있지? 그곳이 마석을 넣는 곳이다. 개량하면 모르겠지만, 그 구멍보다 큰 마석은 넣을 수 없지. 마석이 다 닳을 때까지는 꾸준히 물을 공급해 줄 거다."

구멍을 보니 대충 중급 침식체의 마석까지는 얼추 들어갈 거 같았다.

문제는 이것이 좀비 세계에 가서도 작동하느냐가 문제다.

"몇 개나 있지?"

"그거 하나다. 저택에 적용하기 전에 시험 삼아 만든 프로토타입이다."

"더 만들 수는 없나?"

"만들 수야 있지. 재료가 없어서 문제지."

"무슨 재료?"

"당연히 정령석이 필요하다. 그대는 마석은 있을 테니 정령석만 있으면 되겠지. 어차피 최하급보다 못한 녀석들과 계약하는 것이기에 정령석의 등급은 상관이 없다."

정령석이라….

일단 좀비 세계 가서 작동하는지 확인해보고, 고민해도 늦지 않았다.

"나중에 부탁하면 몇 개 더 만들어 줬으면 좋겠군."

"후후. 만들어 주는 대가는 알지?"

릴리아나가 내게 탐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 정도로 뽑아줬는데도 부족한가?"

"하아.....운호 그대는 정말 쪼잔하구나…. 그대가 뽑아준 혈액을 다 합해봐야 1리터도 되지 않는다. 실험에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게, 정직하게 장사했어야지."

릴리아나가 사기 치려 한 덕에 나는 중위 마법서를 헐값에 뜯어낼 수 있었다. 정상적인 거래였으면 1리터는 채우지 않았을까.

"흥!"

릴리아나는 토라진 듯 귀엽게 코웃음을 치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일단 그녀에게 받은 하나뿐인 마법 물품을 가지고 좀비 세계로 돌아가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

*

*

에일린과 앨버트는 같이 미궁을 들어갔던 동료인 찰스를 문병하러 갔다.

미궁에서 다리를 다친 찰스는 치료받고 여관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찰스 형님 다리는 어떻습니까?"

"찰스 아저씨, 괜찮아요?"

"모두 고맙다. 너희들 덕분이야. 다 나았어."

찰스는 가볍게 다리를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며 괜찮다고 어필했다.

앨버트와 에일린은 박운호의 제자가 된 후에도 종종 찰스의 상태를 보러 여관에 오고 있었다.

앨버트가 이그니스에게 두들겨 맞아 앓아누웠을 때는 에일린이 종종 찰스를 찾아 상태를 확인했다.

생사고락을 함께해서 그런지 참으로 끈끈한 동료애였다.

"그나저나 앨버트는 오랜만이네. 무슨 일 있었던 거야?"

"하하 형님....부끄럽게도 스승님의 수련 때문에 저도 며칠 앓아누웠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 하는 앨버트.

찰스는 쑥스러워하는 앨버트에게 부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앨버트는 자신이 다리를 다쳐 앓아누운 동안 소드 마스터의 제자로 들어갔다.

소드 마스터라니….

꿈에서라도 만나기 힘든 존재다.

변두리 촌마을 출신의 자신은 기사의 종자조차 들어가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러니 앨버트가 소드 마스터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부러움을 넘어 추악한 질투의 감정까지 느꼈다.

찰스는 모험가 파티 동료로서 오랜 시간을 함께한 아끼는 동생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게 괴로워 며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찰스의 눈에 결심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앨버트 앞에 바짝 엎드리며 바닥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애, 앨버트!! "

"찰스 형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앨버트는 갑자기 부복하는 찰스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부탁 하나만 하자!!"

"찰스 형님 우리 사이에 무슨 부탁입니까. 말씀만 해주십시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나는 네가 너무 부럽다. 소드 마스터의 제자라니......앨버트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 나도 그분을 한 번만 뵙게 해다오!"

"찰스 형님…."

엎드려있는 찰스를 보는 앨버트의 눈빛에 떠오른 것은 죄책감이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형님 속도 모르고........자랑질만 하고 있었군요. 형님이 염치없어할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일이고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미안하다."

앨버트는 엎드려있는 찰스를 일으켜 세웠다.

"찰스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승님께는 제가 책임지고 한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 정말이냐?! 고, 고맙다! 앨버트!!"

"형님 우리 사이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모험가 시절, 형님이 이끌어 주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찰스는 앨버트의 손을 꼭 쥐고 감동 어린 표정을 지었다.

둘의 훈훈한 동료애가 여관 객실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에일린의 얼굴은 희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

*

*

아파트에 물이 나오도록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아파트 옥상 물탱크에 물을 채우면 된다.

릴리아나가 준 마법 물품이 작동만 된다면 좀비 세계에서 물 걱정은 없었다.

"낭군님, 이 작은 것이 물을 공급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놀라운 보물입니다."

설화가 내 손에 들려있는 신비한 문양이 새겨진 금속 구체를 감탄하며 쳐다봤다.

평범한 인간에게 말하면 당연히 믿지 않을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내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아직 몰라. 뭐, 해보면 알겠지."

릴리아나 말대로 마법 장치에 나 있는 구멍에 D등급 마석 하나를 넣었다.

장치에 새겨진 문양이 은은한 빛을 발하더니, 작고 투명한 둥근 물방울이 눈앞에 생성이 됐다.

"이, 이건…."

설화가 그 장면을 보고 놀란다.

나는 마법 장치를 통해 그 정령과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릴리아나가 왜 최하급도 못 한 정령이라고 하는지 알 거 같았다.

가느다란 단편적인 감정? 의사와 같은 것이 전해져왔다.

《원..해.....마나....》

'마나를 원하면 이 안에 물을 항상 채워놔.'

《야.....약속....》

물방울이 천천히 날아가더니 물탱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석의 마력이 빨려 나가며 그 작은 물방울에서 물이 쏟아진다.

-콸콸콸.

순식간에 물탱크 안에 깨끗한 물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설화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리고 눈을 끔뻑이며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대박이군…."

너무 좋은 거 아닌가?

얼마나 오래 사용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릴리아나는 주의 사항으로 이 마법 장치와 정령의 거리가 멀리 떨어지면 안 된다고 했다.

그것만 적당히 주의해 마법 장치를 보관할 곳을 만들고, 소모 시기를 체크해서 마법 장치에 마석만 넣어주면 될 거 같았다.

*

*

*

일단 물 공급 아티팩트가 급하게 필요한 것은 천부문과 생존자 캠프, 두 군데다.

그다지 높은 등급의 정령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슬러버에 있는 마법 상점에서도 팔긴 팔았다.

그래도 희귀한 물건이라고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일단 급한 두 개만 사서 릴리아나에게 부탁해 물 공급 아티팩트를 더 만들었다.

하지만 이건 어쩌면 좀비 세계에 꾸준히 들어갈지도 모르는 물건이다.

급해서 정령석을 사기는 했지만.

계속 비싼 돈을 주고 사기에는 아까웠다.

"마스터. 정령석은 최하급이긴 하지만 미궁 4층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마리가 모험가 협회에서 정보를 구해왔다.

미궁 4층은 저층이다.

내가 가야 하나?

나랑 너무 급이 안 맞았다.

거기 가봐야 퀘스트도 못 한다.

겨우 4층에서 정령석을 구할 바에 11층 가서 골드를 벌어 사는 것이 남는 장사다.

너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냥 플렉스해?'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거 같았다.

냉정하게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존자들이 필요한 거다.

굳이 내 골드 들여가며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저택 안을 걷고 있을 때였다.

"스승님~!"

나를 저렇게 부르는 사람은 두 명뿐이다.

안타깝게도 에일린의 고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불쾌 지수가 확 올라갔다.

그동안의 요양으로 멀쩡해진 앨버트가 내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안타깝게도 후유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이냐."

가르침을 달라고 하려는 건가?

아직 특별히 생각해 둔 것이 없었다.

'귀찮은데 오러 비전이나 하나 던져줘?'

이놈도 허접한 오러 비전을 익히고 있는 거로 알고 있다.

릴리아나가 재능은 보장했으니 아마도 오러 비전이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얼마나 허접한 건지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던데 성과가 여태 없는 거 보면 어지간히 엉터리 비전으로 추측할 수가 있었다.

앨버트를 보면 릴리아나 말대로 비전을 고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재능이 있음에도 잘못된 오러 비전 하나로 그 오랜 시간을 허송세월한 거다.

생각해보니 〚베이 오러 단련서〛를 던져주고 몇 년 폐관 수련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사부님!"

-철퍼덕!

내 앞에 달려온 앨버트가 갑자기 도게자를 했다.

'.......갑자기 이놈이 또 왜 이러는 거지?'

당연히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앨버트! 네 이놈~! 서, 설마 내 여.......제자 에일린을 건드린 것이냐!!"

"예!? 스, 스승님. 아닙니다! 저와 에일린은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불같이 화를 내자 앨버트는 깜짝 놀라 황급하게 부인했다.

휴....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앨버트. 명심해야 한다. 언젠가 너도 결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넌 지금 중요한 시기다!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너는 여자를 절대! 멀리해야 한다! 지금의 너에게는 여자는 독이다!! 알겠느냐!?"

"예!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저는 스승님이 허락하기 전까지 그런 생각을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여자에 특별히 관심이 없다는 것이 이놈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 그러면 무슨 일로 그러는 것이냐."

나는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꿀꺽.....저, 저기....스승님…."

이놈이 도대체 어떤 폭탄 발언을 하려고…. 불안하게….

'어? 서, 설마....아, 아니겠지?'

"숨겨왔던~" 이 지랄 하면 바로 두들겨 패서 파문시킨다.

아니, 사형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내 손으로 제자의 목숨을 끊을 준비를 했다.

".........차, 찰스 형님을 한 번만 봐주실 수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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