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동력을 이용해 땅을 깊게 파 들어 올렸다.
시체들을 모아 구덩이에 넣고 다시 흙을 그 위로 덮었다.
마법은 역시 편하다.
염동력 반지....업그레이드 안 되려나?돌아가면 릴리아나에게 물어봐야겠다.
“이동하지.”
깔끔하게 시체를 정리하고.
우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한동안 움직이니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차원 균열을 발견했다.
<판테라 차원 균열 발견.>
<새로운 퀘스트: 차원 균열 처리><처리 등급에 따라 스킬 포인트를 차등 지급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에 새로운 퀘스트가 떠올랐다.
차원 균열은 타이밍 좋게 중급 침식체 한 마리를 뱉어내고 있었다.사족보행을 하는 짐승형 침식체였다. 침식체 그 특유의 번들거리는 검붉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저, 저건?!”
“저, 저게 뭐야? 모, 몬스터가 나오고 있어!”
나야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루나와 아일라는 그걸보고 경악했다.
“흠.....역시 이곳에도 지옥의 문이 있군.”
“지옥의 문? 이그니스 님은 저것에 대해 알고 있나요?”
루나가 이그니스에게 급하게 물었다.
“그래, 나의 고향에서는 저것을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저 지옥의 문을 감당할 수 없어 세상이 멸망했지.”
역시 이그니스의 세계는 차원 균열에 의해 멸망한 건가….
“세, 세상이 멸망했다고요?!”
이그니스의 말을 들은 루나와 아일라의 눈동자가 떨렸다.
“저, 저것 하나만으로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루나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하다. 지옥의 문은 보이는 대로 처리해야 한다. 저 정도 크기면 느리긴 해도 끊임없이 괴물을 뱉어낼 거다.”
이그니스의 설명에 루나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다니...이건 아주 심각한 일이에요. 촌장님께 이 사실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드려야 해요!”
루나는 당장이라도 미궁을 나가, 엘프 마을의 촌장 프리실라에게 보고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엉덩이가 들썩였다.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예?”
“이건 10년 전쯤에 생긴 미궁이라고 들었다. 균열도 그때부터 있었겠지. 지금까지 별일이 없다는 건 그럭저럭 억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게 아닐까.”
“.........역시 몬스터를 잡으면 나오는 마석 때문일까요?”
“그렇겠지.”
“........이번만은 인간의 탐욕에 감사해야겠군요.”
“지금은 일단 저 균열을 정리하도록하지.”
차원 균열 근처에는 대형트럭 크기의 짐승형 중급 침식체 여섯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내가 선봉에 서겠다.”
이그니스가 창과 방패를 고쳐잡으며 나섰다.
탱커는 이그니스.
근접 딜러는 루나.
원거리 딜러는 아일라와 에일린.
대충 구분하자면 이런 식으로 되지 않을까.
“이그니스가 먼저 진입해서 어느 정도 몬스터의 주의를 끈다. 나머진 인원들은 그 후에 진입하도록. 루나는 알아서 하고, 아일라와 에일린은 뒤에서 지원해.”
탱커가 어그로를 끌고 나머지가 공격한다.
게임에서도 나오는 간단한 기본 전술이었다.
헌터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비슷한 전술을 쓴다.
“알았어.”
“예! 스승님.”
나는 이번 전투에 별일 없으면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파티 스킬의 설명대로라면.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파티를 맺은 것만으로 스킬포인트를 벌 수 있다는 게 된다.
그것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이건 이그니스가 있음으로써 가능한 계획이었다.
이그니스가 방패를 앞세우고 몬스터를 향해 돌진한다. 괴물들의 시선이 무섭게 달려드는 이그니스에게 쏠렸다.
빠르게 침식체에 접근한 그녀가 창을 내지른다. 침식체는 반항할 새도 없이 이그니스의 창이 머릿속에 깊숙이 박히며 죽었다.
<파티원이 중급 침식체를 처리했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1 획득했습니다.>
기분 좋은 시스템 메시지.
그런데….
‘저런....너무 센데?’
그렇다. 이그니스는 강하다.
그녀는 괴물 같은 크기의 최상급 침식체와 싸워도 우위를 점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혼자 다 정리할 판이었다.
그러면 파티 스킬의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운호: 이그니스 살살 해라.」
이그니스에게 파티 메시지를 보냈다.
“음? 주군인가? 살살하라니....아, 주군의 동료를 훈련할 셈이군.”
비슷하긴 했다.
속된 말로 쩔이라고 해야 할까.
나와 경험치 배분은 그녀들에게 다 몰아줄 생각이었다.
내가 강해지는 건 레벨업보다는 스킬 포인트가 더 중요했고, 지금 내 레벨은 그녀들의 경험치를 빨아먹는다고 큰 영향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 메시지를 이해한 건지, 이그니스는 몬스터의 주의를 끌며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 틈을 노려 나머지 일행이 하나씩 침식체를 처리했다.
이그니스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탱커였다.
그녀의 힘으로 무난하게 차원 균열까지 내 손 하나 까닥 안 하고 처리할 수 있었다.
<파티원이 차원 균열을 처리했습니다.>
<차원 균열 등급 산정 중….>
<스킬 포인트 2를 지급합니다.>
.......생각보다 짰다.
무슨 기준이지?
그래도 순식간에 스킬포인트 8포인트를 벌었다.
좀비 세계보다 좀 낫나?
청주의 거미 지대에서 마음먹으면 금방 벌 수 있는 포인트이긴 했다.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손가락 까닥 안 하고 스킬포인트를 벌었다는 게 의미가 있었다.
“마스터 죄송합니다. 괜히 고집부려 따라온 거 같습니다.”
옆에 있던 마리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전투에 도움이 안 되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냉정하게 지금의 그녀는 짐이 맞았다.
하지만 앨버트 녀석과 다르게 부담은 되지 않는 짐이다.
나야 그렇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나와 같은 마음일 수는 없다.
사내라면 내 여자를 신경 써줄 필요가 있다.
그녀가 무력감을 느낀다면 할 일을 쥐여주면 된다.
마리에게 적외선 촬영 드론 하나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건네줬다. 미궁의 10층 지역 자체가 어두우니 적외선 촬영 드론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마스터. 이건?”
내게 드론을 받은 마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드론이라는 거다. 마법 물품이지. 하늘에서 주변을 정찰할 수 있는 물건이다. 조종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그걸로 주변 정찰을 좀 부탁하지.”
마리에게 간단하게 조종 시범을 보여주고 조종기를 건네줬다.
그녀는 내가 준 조종기를 흥미롭게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곧잘 드론을 움직였다.
도적놈들뿐만 아니라 차원 균열도 하나 정리했다. 오늘은 이쯤하고, 적당한 곳에 마차를 설치해 쉬기로 했다.
*
*
*
“처음에는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당연했다. 괴물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으니. 오히려 처리하지 않고 관리까지 하면서 푸른 돌, 여기서는 마석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채취했다.”
이그니스는 자신의 세계가 어떻게 됐는지 모두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사안을 심각하게 본 루나가 차원 균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한 이그니스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다 보니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다.
“하지만 세상은 구석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다른 곳에도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일라와 루나뿐만 아니라 마리와 에일린도 이그니스의 이야기를 상당히 진지한 얼굴로 경청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지.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괴물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우리는 결국 세상을 지키지 못했다.”
어째 원래 세계랑 상황이 조금 비슷한 거 같은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그니스의 세상은 그렇게 과학이 발달한 세계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물론, 인구도 우리 쪽 세계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을 테고, 얻을 수 있는 정보량도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을 거다.
‘세계 멸망이라....나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나?’
이그니스가 풀어놓은 세계의 멸망이라는 무거운 이야기보따리에 휩쓸려 잠깐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차원을 오가는 내게는 압도적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뭐 지금도 그럭저럭 신경 쓰는 편이 아닌가?
세계평화를 위해 마법 보급에 힘을 쓰는 건 나밖에 없을 거다.
「이그니스: 주군.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군.」
마차 안에서 배불리 식사도 하고 옛날이야기도 들으면서 노곤하게 쉬고 있으니.
이그니스가 내게 파티 메시지를 보냈다.
‘단둘이라........고백인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녀와 함께 마차에서 조금 떨어진, 단둘이 이야기하기 적당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군. 그 무뢰배 놈들을 처리할 때는 긴가민가했지만, 내가 괴물을 처리했을 때 확실히 느꼈다. 놈의 목숨을 끊자 내게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이건 주군이 한 일인가?”
“그래. 몬스터가 죽으면서 네게 경험치가 흘러 들어가는 거다.”
“경험치?”
“마력이나 기, 마나 같은 말로 불리는 에너지를 말하는 거다.”
“역시 주군이 했다는 말이군.”
“그래. 내 파티원은 몬스터를 처리함으로써 그 마력을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다.”
“주군은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주군의 말대로라면 괴물들을 죽이면 끊임없이 강해진다는 말이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확실한 건 나도 모른다. 한계가 있을지 없을지. 그 정도로 파티원을 성장시켜 본 적은 없으니.”
얻은 지 얼마 안 된 스킬이다.
그건 이제부터 시간이 지난다면 알게 될 일이기도 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마리를 보면 같은 파티라고 해서 경험치가 분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같이 싸운 나머지 인원들에게는 분배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어느 정도 기여도 시스템 같은 게 작용하는 거 같았다.
“이해했다. 그녀들에게 몬스터 처리 기회를 준 것은 그 때문인가?”
“그렇지. 겸사겸사.”
“확실히 그녀들은 주군의 능력에 비하면 초라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 능력이라면 충분히 강해질 수 있겠지.........어쩌면….”
“....?”
“주군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우리 세계도 구원받았을지도 모르겠군.”
그 말을 하는 이그니스의 얼굴은 조금 침울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슬그머니 끌어안고, 그 풍성하고 아름다운 붉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주군...위로해 주는 건가? 나도 모르게 약한 소리를 한 모양이군. 이미 끝난 일이니 괜찮다. 그나저나....주군. 내 엉덩이를 만지고 있는 손은 좀 치워주면 안 되겠나?”
“.......”
*
*
*
마차 안은 어둠과 정적에 휩싸여있었다.
-새액. 새액.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
내 왼쪽에는 마리.
오른쪽에는 아일라가 자고 있었다.
감각을 곤두세워 주변을 살펴봤다.
모두 잠이 들어있었다.
이그니스는 영웅의 안식처에 들여보내 쉬게 했다.
11층 진입 통로를 찾아 헤맨 지 거의 일주일.
그동안 나는 놀랍게도 금욕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찬스가 찾아왔다.
참을 수 있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