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은 서쪽으로 잡았다.
마리가 가져온 정보에는.
11층의 진입 통로가 서쪽에 있을 거라 예상한다고 쓰여 있었다.
맨땅으로 헤딩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대략적인 방향을 잡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날씨의 변화도 없고.
밤낮도 없다.
이 어스름한 밝기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초월체는 몇 층에 있을까.
층수가 깊어질수록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 것은 명백했다.
하지만 모험가들의 공략상태를 보면 아직 상급 침식체도 접하지 못한 거 같았다.
생각보다 몬스터는 많지 않았다.
모험가들이 다 처리해서 그런가.
10년에 걸쳐 공략한 곳이다.
요새와 가까운 곳은 어느 정도 안전지대가 형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한참을 이동하던 우리는 적당한 시간이 됐다고 생각해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인벤토리에서 마차를 꺼냈다.
“주군의 주술은 놀랍군.”
그걸 본 이그니스가 감탄하기도 했다.
모두 마차 안으로 들어가 배부르게 먹고.
편하게 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마법 알람을 해제했어요.”
나는 루나의 말에 눈을 떴다.
일행들이 하나둘 잠에서 깼다.
그녀들의 얼굴은 살짝 굳어있었다.
“적인가?”
이그니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무장을 소환하며 물었다.
감각을 개방해 주변으로 살펴봤다.
“몬스터는......아니군.”
인간이었다.
열댓 정도의 인간이 마차를 포위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친구 하자고 오는 건 아닐 거다.
“뭐야? 이건....웬 마차가....여기 있는 거지?”
“우리가 쫓던 놈들이 아닌가?”
밖에서 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와 에일린은 이곳에 있어라.”
“알겠습니다. 마스터.”
“스, 스승님….”
불안과 걱정이 섞인 표정을 한 에일린을 뒤로하고 내가 먼저 마차의 문을 열고 나갔다.
놈들이 마차 안에서 나온 나를 보고 움찔한다.
“그놈이 맞군.”
“여자들은 마차 안에 있는 건가?”
여자?
그들을 훑어봤다.
살기와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약탈자의 눈이다.
나를 따라 마차에서 나오는 이그니스.
뒤이어 아일라와 루나가 나오자, 그녀들을 본 놈들의 혀가 입술을 훑는다. 눈은 음침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휘유~ 말콤, 네 말대로 죽이는 미모야. 수도에서 본 엘프만큼이나 예쁘군.”
엘프만큼이 아니라 그녀들은 엘프다.
놈들은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상대로 좋은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우리를 털어먹으려 작정하고 온 걸로 보였다.
‘요새에서부터 따라온 놈들인가?’
굳이 흔적을 숨기면서 이동하지 않았으니….
마음만 먹으면 따라오는 건 문제가 아니었을 거다.
그다지 원한을 산 기억은........있지만.원한이 있는 이들의 반응도 아니었다.
“덩치 큰 놈이 한가락 하게 생겼는데......저 덩치에 마법사인가? 그러면 별 볼 일 없겠군.”
“항복해라. 그러면 깔끔하게 죽여주마.”
역시 살아남는 선택지는 없었다.
놈들은 자신만만했다.
그럴 만했다.
도적질하는 놈들치고는 능력자들이었다.
전부 다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인간으로 보였고, 4서클 중위 마법사도 하나 끼어있었다.
이 정도의 강자가 모였다. 숫자도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놈들의 눈엔 우린가 이미 그물에 걸린 물고기로 보일만 했다.
녀석들은 옛날 게이트 초창기 시절.헌터들 뒤치기하던 양아치 각성자 놈들을 생각나게 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군.’
“주군. 어떻게 하나. 무뢰배 놈들로 보인다만.”
이그니스가 내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하긴. 심문할 놈 남겨두고 다 처리해야지.”
“미친놈. 설마, 이 인원을 보고도 해볼 셈….”
-으적!
이그니스의 행동은 빨랐다.
어느새 움직인 이그니스의 창이 떠들던 녀석의 입에 틀어박혔다. 놈은 무슨 일이 일어난 지도 모른 채 텅 빈 눈동자로 뒤로 넘어갔다.
“미친년! 죽여! 아니, 여자들은 생포해라!”
나도 재빨리 파악해둔 마법사 놈을 향해 마력창을 만들어 던졌다.
“시, 실드!”
그걸 본 마법사가 기겁하고 급하게 실드를 쳤지만, 마력창은 방어막을 가볍게 부수고 그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크억!! 이, 이렇게 허무하게….”
마법사는 무슨 짓을 해서 도망갈지 모른다. 방심한 틈에 최대한 빠르게 처리했다.
“시발! 심상치 않은 놈들이다. 저 빨간 머리 미친년은 시간만 끌고 이년들 먼저 잡아!”
인질극이라도 벌일 셈인가?
지금 상황에서는 적절한 판단이었다.
나와 이그니스는 모르겠지만.
냉정하게 아일라나 루나가 상대하기 쉬운 놈들은 아니었다. 실제로 루나와 아일라는 두세 명씩 덤벼드는 놈들의 인해전술에 버거워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염력 반지를 이용해 놈들의 움직임을 묶었다.
“모, 몸이!! 시발! 마, 마법이다! 저 마법사 놈 좀 누가 정리해!”
나름 한가락 하는 놈들이라 그런지 완전히 묶이진 않고 저항을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다들 오러를 다루는 초인들이다.콤마 단위로 생사가 오가는 전투에서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다?
치명적이었다.
내 도움으로 한결 편해진 루나와 아일라.
여유가 생긴 아일라는 훌쩍 마차 위로 올라가 활로 화살을 연이어 쏘아내 둔해진 놈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루나는 뇌전이 휩싸인 검으로 가차 없이 도적놈들의 목숨을 끊어내고, 다른 한쪽에서 이그니스가 압도적인 무력을 뽐내며 놈들을 도륙한다.
“죽어!!”
한 놈이 내게 검에 소드 오러를 뿜어내며 베어왔다.
지팡이를 마력으로 감싸고 마주쳐갔다.
“미친놈! 지팡이째로 잘라주마!”
-퍼석!
박살 나는 건 놈의 검이었고.
“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지팡이에 죽음을 예상한 건지 놈의 눈이 떨린다.
그 눈 위로 내 지팡이가 내려꽂혔다.
-으적!
얼굴이 함몰되며 그대로 꼬꾸라졌다.
죽었겠지.
머리가 부서졌으니 좀비라도 살아남지 못한다.
슬슬 놈들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시, 시발! 도망쳐!”
도망치려는 놈들을 염동력으로 묶었다.
놈을 팔을 휘저으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뒤로 세 여자의 살벌한 공격이 이어졌다.
한 놈을 살려 염동력으로 끌고 왔다.
그래도 물어볼 건 물어봐야지.
도적놈들은 어느새 다 정리돼 살아남은 건 내가 염력으로 잡은 한 놈뿐이었다.
“야, 네놈들 대체 뭐야?”
선량한 모험가를 다짜고짜 암습하다니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다, 다크 블러드 클랜입니다.”
녀석은 반항할 생각이 없는지 순순히 불었다.
생존본능이 뛰어난 놈 같았다.
다크 블러드....중2병스러운 이름이었다.
“다크 블러드 클랜? 그게 뭐지?”
나야 슬러버에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당연히 모른다.
“마스터. 모험가들의 3대 세력 중 하나입니다. 가장 소문이 좋지 않은 모험가 단체 중 하나입니다.”
마차에서 나온 마리가 설명해 줬다.
“그렇군.”
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다.
슬러버에서 유명한 강자의 이름은 이미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이제 막 도착한 우리는 처음 보는 놈들이었을 거다.
여자만 잔뜩 데리고 다니는 이상한 놈.
거대 길드에 소속돼있는 모험가도 아니었으니, 뒤탈도 없는 먹기 좋은 먹잇감이어서 노렸다고 한다.
참나 이 정도 능력을 갖추고 강도질이나 한다니.
있는 놈들이 더한다.
“11층 진입 통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아, 알고 있습니다!”
“어딘데.”
“그, 그게 말로 설명하기가....제,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뭔 수작인지 뻔히 보인다.
“서쪽에 있나?”
도적놈이 눈을 데굴 굴리더니 말했다.
“예, 서쪽에 있습니다.”
놈은 방향 정도는 말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고 판단이 선 듯했다.
“그렇군.”
“그, 그럼….”
놈의 얼굴에 희망이 떠오른다.
하지만 마력창이 녀석의 가슴에 꽂혔다.
“이....개....왜….”
“왜긴….”
11층 진입 통로?
이번 미궁 탐사 목표로 정하기는 했지만, 못 찾으면 다음에 오면 된다.
급한 것이 아니다.
난 시간이 많았다.
안내받는답시고 끌고 다니려면 먹여주고 재워줘야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뭔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는 놈을 신경 쓰면서 데리고 돌아다닐 바에, 설사 이번에 11층 진입 통로를 못 찾더라도 지금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
“크, 클랜에서 복수를….”
놈이 원한에 찬 눈으로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하든가 말든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제는 즐거운 루팅 시간이다.
도적질 따위를 하는 놈들이긴 했지만.
인정해야 했다.
나름 한가락 하는 놈들이다.어떤 아이템을 줄지....기대가 됐다.
“루나 마법 아이템 있으면 좀 알려줘.“
“알았어요.”
놈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릴리아나가 만든 아티팩트급은 안 되겠지만, 마법 아이템은 그 자체로 상당한 고가였다.
챙겨둬서 손해 볼 건 없었다.
-드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