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아!!”
-둥!
눈앞에 둥근 빛무리가 생성됐다.
이어 그 빛무리가 금색으로 물들었다.
“화, 황금색?”
지난번 백번이 넘는 소환을 하는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이었다.
“떴나?”
-번쩍!
빛무리에서 황금의 빛이 터져 나오며 나를 덮쳤다.
*
*
*
나를 덮친 빛무리는 전과같이 내게 환영을 보여줬다.
황량한 벌판.
그곳을 끝도 없이 메운 검붉은 괴물의 바다.
그녀는 그 괴물의 바다 한가운데서 홀로 싸우고 있었다.
여자치고 키가 꽤 큰 편이었다.
180, 190정도 될까?
아름답고도 굳건한 얼굴.
불꽃처럼 화려하게 흩날리는 붉고 긴 머리카락.
탄탄하게 단련된 육체와 햇볕에 잘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그 위에 보이는 수많은 크고 작은 흉터.
그 흉터들은 흉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 여전사와 같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범상치 않은 창이 한번 뻗을 때마다 그 선상에 있는 몬스터가 수십이 터져나갔다.
다른 한 손에 들려있는 몬스터의 피로 화려하게 물든 둥근 방패가 몬스터를 후려치자, 그 충격파에 수많은 괴물들이 터져나갔다.
하지만 이내 그 틈을 다른 몬스터가 메운다.
그녀의 일격에 수십의 괴물이 죽어 나갔지만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나는 듯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투지는 굳건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투.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의 육체가 서서히 지쳐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내지르는 공격에 죽는 몬스터의 숫자가 줄었다.
예전같은 공격력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무심한 표정으로 괴물들을 향해 끝없이 창을 내지르고 방패를 후려쳤다.
몇 날 몇일을 싸웠을까.
결국 그녀는 몬스터 사체의 산 위에 홀로 서 있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멀리서 새로운 검은 물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끝도 없이 몰려오는 괴물의 대군.
그걸 보면 질릴 만도 하건만.
육체는 지쳐있을지언정.
그 몬스터의 대군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의 투지는 처음과 같이 조금도 줄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육체는 이미 한계였다.
그때 몰려오는 괴물들을 응시하던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헤엄친다.
그리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흠.....역시 이 세상은 끝난 건가?”
강인하고도 맑은 목소리.
“......좋다. 허락한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빛으로 화해 흩어졌다.
*
*
*
빛무리가 내게 보여주던 환영은 끝났다.
황금의 빛은 점점 어떤 형상을 갖춰가고 있었다.
<다른 차원에 까지, 그 전설적인 무용이 널리 퍼진 아그리테의 영웅 이그니스가 소환됩니다.>
“떴다!”
나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짝. 짝. 짝.
환영의 박수가 절로 나왔다.
나는 확신했다.
가챠 게임으로 치면 트리플 S급의 전설 영웅이 나왔다고.
황금색 빛무리가 사라지고 환영으로 봤던 화려한 붉은 머리의 여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흠. 그대가 내 주군이 될 사람인가?”
“될......사람?”
이거......이야기가 다른데.
“소환하면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어떤 인간인지도 모를 녀석을 덜컥 주인으로 섬길 수는 없지.”
그러면서 이그니스가 나를 훑어본다.
나도 그녀를 훑어봤다.
키가 크긴 하지만 내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나랑 비교하면 오히려 적당하다고 할까.
그녀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가슴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하게 단련된 육체로군. 부하들이 살아있었으면 보여주고 싶어질 정도야. 그대가 평소 얼마나 절제된 생활을 하는지 보인다.”
“그, 그래?”
그녀에게 진실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육체는 더할 나위 없이 합격이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다음은 무력이다. 그 육체에 걸맞은 무력을 보유하고 있길 바란다. 무기를 들어라! 전사는 몸으로 대화하는 법이다!”
그녀가 말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몸의 대화와는 조금 다른 거 같았다.
“내가 이긴다면 나를 주군으로 섬기는 건가?”
“날 이긴다고? 그러면 더할 나위 없겠지.”
뭐로 상대할까 조금 고민했다.
지금의 나는 무기를 드나 안 드나 별 차이가 없었다.
환영으로 그녀의 무력을 봤다.
쉬운 상대는 아니다.
인벤토리에서 대검을 꺼냈다.
마법사 로브를 인벤에 집어넣고 마력으로 검은 갑옷을 만들었다.
“음? 주술인가?”
“뭐 비슷한 거라고 해두지.”
“준비는 된 거 같군! 부디 날 실망하게 하지 않길 바란다!”
그녀가 방패와 창을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녀가 내지르는 창을 피했다.
하지만 그 충격파가 내 마력 갑옷에 충격을 줬다.
보통 인간이라면 갈기갈기 찢겼으리라.
나도 지지 않고 그녀에게 대검을 내리쳤다.
그냥 내리치는 게 아니다.
내 공격을 흘릴 수 없게 힘을 비트는 기술을 가미했다.
-쿵!
그녀가 방패를 들어, 내 대검을 막았다.
“놀라운 기교군. 순간 당할뻔했다.”
나도 놀랐다.내가 비트는 힘을 제대로 막은 인간은 처음이었다.인간은 아닌가?
엄밀히 말하면 외계인?
그녀와 빠르게 공방을 이어갔다.
주변에 살벌한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환영으로 봤을 때도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직접 상대해보니 더욱 대단했다.
나와 공방을 나누는 그녀의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그녀의 창이 쏘아져 온다.
가볍게 대검의 면을 이용해 막았다.
“어?”
창이 대검의 면을 뚫고, 내 눈을 꿰뚫어 왔다.
그 찰나.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
아니, 내가 느려졌다고 느낄 뿐이었다.
위기를 느낀 육체가 반응했다고 할 수 있었다.
간발을 차로 고개를 젖혀 창을 피했다.
“꿰뚫었다고 생각했는데 놀라울 정도의 반응속도군.”
그녀는 창을 피한 내게 감탄한듯했지만, 나도 놀랐다.
“이걸 뚫어?”
내가 고정한 마력의 단단함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그니스는 그걸 뚫었다.
“롱기누스의 창이다.”
“로, 롱기누스라고?”
익숙한 이름인데?
“이 창은 신조차 꿰뚫을 수 있다고 전해지는 신기다.”
“시, 신기? 뭐야! 사기 무기잖아!”
나도 궁니르를 한 자루 가지고 있다.그녀가 가지고 있는 창에 비교하면 꺼내기도 부끄러운 튼튼한 양산품이었다.
“전사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그걸 극복함으로써 전사다!”
“그걸 네가 말한다고?”
방심하다 애꾸 될뻔했다.
내 잘못이긴 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전투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녀의 창을 조심하면서 조금 더 강도 높은 전투를 벌였다.
-쾅! 쾅!
그녀는 적잖은 충격을 주는 내 대검을 그 둥근 방패로 거뜬하게 막아냈다.
“설마.....방패도 신기인가?”
“그렇다 아이기스라고 한다.”
.........내 장비가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압도적인 육체 능력을 바탕으로 그녀를 몰아붙였지만, 그녀는 방패와 창을 이용해 내 공격을 잘 버티며 전투를 이끌어 갔다.
이그니스는 내가 상대해본 괴물과 인간을 통틀어 가장 강한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한 두어 시간 싸웠을까?
그녀가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공격은 단순하다. 하지만 빠르고 강하군. 인정한다. 그대는 나보다 강하다. 어째서인지 전력을 다하지 않는군. 하지만 그런 그대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나의 패배가 맞다.”
이그니스는 다른 여자들처럼 적당히 설렁설렁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쓰러뜨리려면 한군데 잘라내거나 부숴야 하는데….
어떻게 뽑은 영웅인데 그런 짓은 못한다.
“그럼 이제 넌 내 것인가?”
“그렇다. 나는 그대를 주군으로 모시겠다.”
그녀의 무기가 빛으로 흩어져 그녀의 몸속으로 흡수됐다.
“신기하군.”
“이 무장들은 내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과도 결합이 되어있다. 내 몸과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신화급 아이템이라니 부러웠다.
그 부러움에 이그니스의 커다란 가슴을 움켜쥐었다.
탄탄하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뭣?!”
-철썩.
그녀가 가슴을 움켜쥔 내 손을 쳐냈다.
“무슨 짓인가! 주군!”
생각지 못한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음. 나는 네 몸을 원한다. 거부하는 건가?”
“그렇다.”
그녀의 얼굴은 단호했다.
“나는 이그니스, 너의 주인이지 않나.”
“주군이라고 수하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더할 나위 없는 바른말이었다.
“.........아쉽군.”
“주군, 아쉬워하지 마라. 나도 주군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다. 서로의 감정을 쌓아가는 것부터 시작하자.”
실망한 내게 이그니스가 위로하듯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