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해하면 안 되나?”
임무를 완수하고 내게 받은 휴대용 게임기를 살펴보며 릴리아나가 물었다.
“이젠 네 거다. 분해해도 나와 상관없지. 그 대신 그 안의 게임들은 못 하게 될 가능성이 클 거야.”
내 말에 그녀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운호 하나 더 가진 게 없나?”
“하나밖에 없는 귀한 거다.”
지금은 말이지….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다. 지금은 게임기의 귀함을 어필할 때였다.
“운호 이 문자들은 무엇인가? 문자인가? 아니면 마법을 위한 장치인가.”
게임을 하며 나오는 영어를 보며 물었다.
“언어다.”
“언어라고? 나는 이런 문자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만.”
“네가 모르는 문자도 있는 거지.”
“그럴 리가 나는 거의 모든 언어를...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넓다. 네가 알지 못하는 언어 중 하나겠지.”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그렇다면 이 언어를 배울 수는 없는 건가? 이 언어를 배운다면 이 게임기라는 것을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거 같다.”
“배울 수 있지.”
“어떻게....설마.....운호 그대가? 알고 있다고?”
“그래.”
왠지 굉장히 무시당하는 기분이 드는데….
“내가 운호 그대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날이 올 줄이야.....세상일은 모를 일이군. 내게 이 언어를 가르쳐다오.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마.”
그녀의 입에서 바라던 말이 나왔다.
“대가라.....내가 쓸만한 마법 아이템이 없나?”
“역시, 아티펙트를 바라는 건가….”
릴리아나는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마법 아이템은 좋다.편하게 마법을 사용하게 해주고.
그리고 이미 명품 지팡이 맛을 봤다.
차원 상점에 있는 허접한 아이템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다.
릴리아나 정도 마법사라면 괜찮은 마법 아이템이 있을 거다.
“흠.......어떤걸 원하나?”
“순간 이동을 하는 마법 아이템은 없어?”
“......순간 이동?”
“네가 나를 상대할 때 했던 순간이동.”
가장 완벽한 회피기술이라고 볼 수 있는 개사가 마법이었다.
“그건 안 된다.”
“뭐? 왜 안 되는데?”
“그건 그곳이 나의 공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텔레포트는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로운 마법이다. 공간계열의 마법이 그렇지만, 위기 탈출의 용도로 사용하지, 전투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없다고?”
“있기는 하지만, 긴급한 상황에 탈출용이니 네가 만족할만한 물건은 아니다. 너는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길 바라는 거 아닌가?”
“그렇지.”
릴리아나는 주기 싫다면 싫다고 말하지, 구질구질하게 거짓말까지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내가 릴리아나를 상대하면서 탐났던 건 그거 하나였다.
그 후작 마법사가 도망간 마법이기도 하고.
하지만 아쉽게도 그게 안 된다고 한다.
“실망하지 마라. 네가 만족할 만한 다른 아티펙트를 주마.”
“뭔데?”
“이거다.”
릴리아나가 아공간에서 작은 반지 하나를 꺼냈다.
“그건?”
“염동력 반지다.”
염동력이라면 좀비 세계 쪽의 지아가 사용하는 능력이었다.
지아가 사용할 때 상당히 편해 보여서 조금 탐나는 능력이기는 했다.
“마력을 염동력으로 변환해 준다.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너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마력 부자인 네게는 딱 맞는 아티펙트지. 무엇보다 네가 다양한 마법을 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다양한 마법?”
“그래, 염동력으로 상대를 묶어둔다면 홀드 마법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늘도 날 수 있는 건가?”
“가능은 하지, 마법사들은 레비테이션이라는 마법이 효율이 높으니 그걸 사용하지만.....너라면 문제없을 거다. 비효율적이라 그렇지, 활용성 자체는 좋은 마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구미가 당긴다.
“........거리는?”
“마력의 양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히 먼 거리일수록 마력이 많이 들어가지.”
“콜......일단 하나는 그걸로 하지.”
“일단?”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릴리아나가 들고 있는 마법 반지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받으려던 반지를 자신의 아공간에 쏙 집어넣었다.
“뭐?!”
“후후....이건 내가 언어를 다 배운 다음에 주도록 하마.”
전에 당한 걸 갚아 주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릴리아나의 그 속셈은 통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나는 그녀에게 일일이 언어를 가르쳐주는 그 고생을 할 생각이 없었다.
500코인으로 차원 상점에서 영어 언어팩을 샀다.
그리고 그 언어팩 카드를 그녀에게 건네줬다.
“그게 무엇이지?”
“언어를 배우는 마법 아이템이다.”
“그.....런게 있다고?”
릴리아나는 내가 건네는 카드를 받고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다.
“뭐지? 앞에 문자가 떠오른다. 언어팩을 설치?”
“설치한다고 하면 언어를 익히고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 문자들을 읽고 쓸 수 있을 거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서, 설치….”
그녀는 반신반의하면서 언어팩 카드를 사용했다. 카드가 빛으로 흩어지며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이, 이건?! 너.....대체 뭐냐....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하지? 저, 정신에 간섭한 건가?”
릴리아나는 조금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내 마법의 위대함을 이제야 안 모양이군….”
“이, 이게…. 마법이라고?......나는 어쩌면 고정관념에 갇혀있었는지도 모른다.”
릴리아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야 나를 인정해 주는 건가?”
“.....너는 우리와는 다른 형태의 마법을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냥 사용하는 거다.
스마트폰의 구조나 작동원리를 이해 못 해도 문제없이 사용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너는 이 게임기란 물건의 작동원리를 알고 있는 건가?”
“......”
“그러면 그렇지….”
잠깐 감탄했다는 게 억울하다는 듯 릴리아나의 날 바라보는 표정이 짜게 식었다.
괘씸하게 날 무시한 그녀는 며칠 안 가 결국 예정된 천벌을 받았다.
*
*
*
언어팩을 주고 릴리아나에 받은 염력 반지는 내게 새로운 감흥을 안겨줬다.
굳이 말하면 진짜 초능력자가 된 기분이랄까?
“으악! 맞았다! 스킬 눌렀는데!! 무, 물약! 이놈이! 하, 한대만! 오오, 깨, 깬다!! 운호 내가 드디어 이 보스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 같다!”
반지를 이용해 마법 지팡이를 공중에 띄우고 이리저리 돌리면서 놀고 있는데 릴리아나가 상당히 시끄러웠다.
흥분하는 그 모습에 슬쩍 그녀가 몰두하고 있는 게임 화면을 쳐다봤다.
화면 안의 거대한 보스의 피통은 한 대만 때리면 죽을 거 같은 게이지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휴대용 게임기의 화면이 꺼졌다.
“어? 어? 아악!! 한 대만 때리면 되는데!! 운호!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게임기의 화면이 꺼졌다!”
그녀가 격분하며 내게 게임기를 내밀었다.
“음, 배터리가 다 됐나 보군.”
“배, 배터리!?”
“마석 같은 거다. 그 물건이 작동하려면 배터리에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다 떨어진 거지.”
그래도 나름 하이엔드 제품이라 그런지 배터리가 꽤 오래가긴 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진정해라. 충전하면 되니까.”
“추, 충전?”
“전기로 배터리를 충전하면 다시 사용할 수 있지.”
“전기라고? 라이트닝 마법을 가하면 되는 거냐?”
릴리아나의 손에서 번개가 튀었다.
“그러지 마! 그러면 고장 날 거다!”
그녀가 바로 마법을 쏟아 넣을 기세였기에 급하게 말렸다.
“뭐?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릴리아나가 내게 흉흉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의 눈자위의 진한 다크서클은 이미 게임 폐인의 눈이었다.
그저 그런 게임이 아니라 AAA 급 게임으로 꽉꽉 채워 놓았으니 그녀가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사람 하나 버려놓은 거 같은데….’
“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 방법이 무어냐! 운호!”
“충전을 할 수 있는 물건이 있다. 크흠. 그 물건은 지금 내 인벤....아공간에 있지.”
“그럼 뭐 하는 거냐! 빨리 그 물건을 꺼내 내 게임기를 충전해라!”
“그 물건이 좀 커서 말이지. 여기서 꺼내기에는 마차 안이 조금 작다.”
“그 말은 이 마차 안을 더 넓혀야 한다는 건가?”
“그렇지. 그리고….”
“그리고?”
“마법 아이템 하나만 더 있으면 좋겠는데….”
“뭐?!”
처음에는 한 번 충전에 마법 아이템 하나씩 뽑아먹으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생각해도 그건 너무 선 넘는 짓 같았다.
겨우 휴대용 게임기 하나에 나에 대한 그녀의 호감도를 심각하게 깎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해 너그럽게 마법 아이템 하나로 봐주기로 했다.
*
*
*
“주인님, 야영하기 괜찮은 곳을 발견했습니다.”
마리의 보고에 바깥을 보니 앞에 길옆에 누가 봐도 야영하라고 만들어 놓은 공터가 보였다.
실제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야영목적으로 사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동안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종종 이용하기도 했다.
“마리, 오늘은 저기서 야영하자.”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이제 하루 이틀만 더 가면 슬러버였다.
당연히 내가 알 리는 없었고, 지도의 축척도 엉망이니 감도 잡을 수 없었지만, 다행히 마리가 알고 있었다.
마차를 공터의 적당한 곳에 세웠다.
그리고 야영지에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저녁 메뉴는 라벤타의 맛집에서 가져온 진한 고기 스튜와 빵이었다.
“오늘은 다 밖에서 자거라, 마차 안의 공간을 늘려야 하니.”
릴리아나는 급하게 식사를 마치고 먼저 일어나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게임기 충전 때문에 마음이 급한 거 같았다.
릴리아나를 제외한 모두가 모닥불에 둘러앉아 포만감을 즐기던 그때.
-다각. 다각.
-덜컹. 덜컹.
어스름한 어둠 속.
마차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방향은 우리가 온 라벤타 쪽이었다.
*
*
*
“슬러버와 라벤타를 오가면서 장사하는 마이클이라고 합니다.”
갈색의 단정한 헤어 스타일을 한 젊은 남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자기를 소개했다.
“......”
하지만 나는 그 웃음에 보답해 줄 수 없었다.